1950년대 대구 전경 항공사진 (美 LIFE) :: 2011/06/1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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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가 대략 동쪽, 아래가 서쪽입니다.
위에서부터 팔공산, 금호강, 허허벌판, 신천, 대구시내, 달성공원 등입니다.
왼쪽 위에 대구공항, 왼쪽 아래는 달성공원, 오른쪽은 서문시장, 계성학교 등..
대구역도 보입니다.
서성네거리에서 중앙네거리에 이르는, 왜정시대 말기에 조성된 소개도로도
그 모습이 잘 확인됩니다.
#출처 : 디씨인사이드 도시 갤러리
흩어진 대구읍성 성돌을 모읍니다. :: 2008/02/1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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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성 성돌 모아 모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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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離散의 恨
일제때 강제해체, 매립 등 뿔뿔이 흩어져
시민캠페인 전개…성곽로 재현 사용키로
"흩어진 대구읍성 성돌을 모읍니다." 대구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대구읍성 성돌모으기 시민캠페인이 전개된다.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 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캠페인은 14일부터 다음달 말까지 추진되며, 모은 성돌은 대구읍성 성곽로 재현에 사용될 계획이다. 동성로는 대구읍성의 옛 성곽로였으나 1906년에서 1907년 사이 식민지 개발을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신작로를 내면서 성곽으로서의 원형을 완전히 잃게 됐다. 추진위원회측은 "그 과정에서 성돌은 개천이나 습지에 매립되거나 근대건축물의 기초돌로 활용되는 등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대구읍성의 성돌은 계성학교와 동산의료원, 제일교회 등 근대건축물의 기초돌로 쓰였으며, 일부 가정에서도 정원석 및 담장석 등으로 활용되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이번 캠페인을 통해 흩어진 성돌을 기증받아 동성로 공공디자인개선사업의 하나인 '한일극장~대구백화점 본점간 대구읍성 성곽로 재현'에 사용할 것"이라며 구체적 활용방안을 밝혔다. 한편 중구와 추진위원회는 14일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이달 중 대구약령시 소공원에서 성돌기증식을 갖고 대대적인 시민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다. ◇ 대구읍성 최초의 대구읍성은 토성이다. 임진왜란 2년 전 왜구 침략에 대비해 만들어졌지만 불행히 임진왜란 때 파괴돼 없어졌다. 영영축성비에 따르면 이후 대구읍성은 1736년 경상도 관찰사 민응수의 건의로 둘레 2천650m, 높이 5.6m, 두께 8.7m 규모의 석성 형태로 세워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읍성에는 남문 영남제일관(남성로), 서문 달서문(서성로), 동문 진동문(동성로), 북문 공북문(북성로) 등 4대문이 있다. 군사목적으로 한차례 중수한 대구읍성은 1906년 관찰사 서리 박중양에 의해 철거된 뒤 당시자료와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상태다. |
[매일춘추] 대구읍성 재조명 :: 2008/02/13 10:04
| [매일춘추] 대구읍성 재조명 | |||
대구읍성은 조선 영조 13년(1737)에 축성되었으나, 1906,7년 철거된 이후 성터에 대한 내력이 당시의 자료와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고 있는 상태이다. 1888년 대구를 찾은 프랑스의 지리학자 샤를 바라의 기행문을 보면, 대구읍성은 한 폭의 그림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우며 중국의 북경성처럼 위용이 대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샤를 바라는 “둥근 길을 따라 쌓인 성벽이 북경성을 축소한 것과 같다.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고, 사방 성벽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성문의 정자에는 옛 역사를 나타내는 그림과 조각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곳에서 가을 햇볕아래 찬란한 색채를 빛내며 전원을 휘감아 흐르는 금호강의 낙조를 지켜보았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민들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고, 양반들이 사는 중심부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샤를 바라, 성귀수 역, 조선기행, 2001, 눈빛)라고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는 대구읍성을 중심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읍성의 규모는 성벽 600~700m, 둘레 2,680~2,700m, 여장을 포함한 높이 4.5~5.6m, 폭 8m 내외로 추정된다. 성곽의 사방에 진동문, 달서문, 남문(영남제일관), 공북문이 있었고, 성벽의 동서에 한 개씩의 돌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찰사 감영이 지금의 경상감영공원 자리에 있었고, 업무를 보던 선화당과 징청각, 유치장, 객사와 육방관사, 대구부사가 중부경찰서와 종로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점에서 대구읍성을 재조명하는 것은 바로 대구읍성이 문화 창조도시를 지향하는 대구의 전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적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구를 영남의 전통적 중심도시라고 말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흔적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대구읍성의 재현은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외래 방문객들에게 대구의 참모습을 소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에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최근 20~30여 년간 문화자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전개되었던 대구의 도시개발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앞으로 다시 지금과 같은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최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대구 도심 재창조'의 밑그림을 그리면서 대구읍성 등과 같은 전통문화자원의 재현이나 다각적인 활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서인원(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