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로(嶺南大路) 일천리 (30~33) - 대구 영남일보 1997년 기획기사 :: 2006/03/31 20:35
< 영남대로 일천리 . 30 > 대구읍성 | ||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대구는 감사가 있는 곳이다. 산이 사방을 높게 막 아 복판에 큰 들을 감추었으며, 들 복판에는 금호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하류에 합친다. 고을관아는 강 뒤쪽에 있다. 일도(一道,경상도를 지칭)의 한복판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거리가 매우 고르니, 또한 지형이 훌륭한 도회지이다" 라고 적고 있다. 택리지는 이서가 신천을 축조하기 1백여년전에 쓰여진 만큼 관아앞의 강은 당시 대구천 물길을 말한다. 팔조령과 비슬산계곡들에서 발원된 대구천 물길은 대구시 수성구 상동교 지점에서 곧게 펴져 지금의 신천이 됐으나, 앞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은 일제가 도시계획을 하기 전인 1930년대까 지만해도 여전히 대구학원~반월당~적십자병원~동산동제일교회~중소기업은 행~동산파출소~달성공원정문~서구 원대동~달서천~금호강으로 흘렀다. 대구학원에서 대서로를 따라 동서로 흐르던 하천은 저지대 범람원이었던 계산오거리지점에서 서북방향으로 굽어 대구읍성의 축조에도 영향을 미쳤 다. 이 지점 성곽이 물길따라 굽은 것이다. 대구시가지에 석성이 구축되기 전에는 토성이 있었다. 임진왜란 두해전인 1590년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영천.청도.성주.진주. 동래.안동.상주성과 같이 만들어졌다. 임란 때 파괴된 토성자리에 석성이 구축된 것은 1736년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閔應洙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에 옮겨져 있는 영영축성비(嶺 營築城碑)에 의하면 성체는 석달여만에 완성됐다. 성의 둘레는 총2천1백24보(약 2.7km), 여첩(女堞.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 로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하는 곳) 8백19개, 높이는 17~18척(5~5.5m)으로, 동서남북 4개의 정문을 쌍홍문(雙虹門)으로 건축한 뒤 동남간에 동소문을 서북간에 서소문을, 암문(暗門.야간통행문)으로 두었다. 서민들은 검문이 덜한 암문을 주로 이용했다. 동문은 지금의 동성로 제일은행 대구지점 네거리, 서문은 대구은행 서성 로 지점, 남문은 약전골목 대남한의원 네거리, 북문은 북성로 경북소방설 비 네거리에 정방향으로 세워졌으며, 동소문은 중앙파출소에서 대구백화점 가는 중간지점 네거리에, 서소문은 서성로가 북성로를 만나기 전인 제민 약국 자리쯤에 섰다. 이 문들을 연결한 성곽의 흔적이 지금의 동.서.남.북 성로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관리들이 부임하는 관문이었던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는 편 액 그대로 현재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에 복원돼 있다. 동서문과 남북문 간의 길이는 각각 8백m. 성이 정방형임을 나타낸다. 동원된 인부는 군위.성주.선산.대구부민과 승려등 연인원 7만8천5백84명 이었다. 읍성을 수축한 돌은 붉은색이 도는 이암(尼岩)으로 팔달교건너 지역에서 가져왔다. 이 바람에 성돌은 인부 한 사람이 짊어질 만한 크기로 다소 작았다. 대구읍성은 1870년 대원군 이하응의 군사정책으로 한차례 수리되면서 성 벽위에 네 개의 누각을 세우고 그 사이에 8개의 포루를 설치했다. 읍성에는 관찰사감영이 지금의 중앙공원자리에조성됐으며, 관찰사가 업 무를 보던 선화당(宣化堂)과 징청각(澄淸閣)이 들어섰다. 감영에는 이밖에 유치장건물 등이 있었고, 감영곁에는 객사와 육방관사, 대구부사가 지금 의 대구중부경찰서와 종로초등학교 자리까지 걸쳐있었다. 감영의 정문은 포정문이었으며, 관풍루(觀風樓)라는 누각이 섰다. 백성들의 풍속을 살핀다는 뜻의 이 누각은 현재 달성공원에 옮겨져 있다. 감영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포정문 외에 만경관 남쪽지점에 있던 홍살문을 거쳐야 했다. 윤용진 경북대 명예교수(66)는 "경상감영은 서너차례 화재 피해를 입은 기록이 있으며, 순조 6년(1806년) 12월3일의 화재는 관찰사비 서실에서 발화돼 징청각, 선화당, 연초당, 좌우익관청, 공창, 내아 등 1백 84칸이 전소되는 대화재였다" 며, "일부화재는 부정을 저지른 것이 탄로날 것을 우려한 증거인멸이 목적이었을 것" 으로 추정했다. 현재 남아있는 선화당과 징청각은 그 뒤 복원된 것이다. 읍성내의 길은 종로가 가장 넓었으나, 1907년 관찰사서리였던 박중양이 성곽을 허문 뒤에 는 동서길이 확장되는 등 교통흐름이 달라졌다. 박중양이 조정의 반대를 무시하고 읍성을 헌 배후에는 한국상권을 침탈 하려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일하다 그와 맺은 인연으로 관찰사자리에 오른 인물로, 그가 대구부에서 전남으로 전임할때 일본인들이 시계를 선물하면서 뒤에 십자가를 새긴 것은 지금까 지 향토사기록으로 전한다. 십자가는 읍내 십자로를 상징하는 것이다. 허물어진 성의 돌은 일부 민간건축에도 쓰였다. 최근 계명대 성서 캠퍼 스 본관 주춧돌 공사에 쓰인 돌이 대표적이다. 이돌은 현재 계명대 동산의 료원 홍보과로 쓰이는 북미 선교사 스윗즈의 사택 기초공사에 쓰였던 것이 다. 열강의 각축전이 벌어지던 구한말 대구읍성 지역의 거주 분포에 대해 권 영철 교수는 "중심가인 종로에는 중국인이, 동산동은 개신교인이, 동산아 래는 천주교인이, 동성과 북성 주변은 일본인이, 서성과 남성주변은 한국 인이 세력을 형성했다" 고 설명했다. 대구천과 대구읍성 남쪽 성곽사이에 난 영남대로(염매시장골목)에는 서 울로 가는 길손이 남문과 서문.동소문으로 빠져나왔다. 한양가는 서북방면 길에 여관과 시장 주막이 집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취재기 대구구간 취재는 여러모로 정리되지 않은 향토사학의 허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일제시대 단절된 역사기록은 가치를 몰라 폐기됐거나 정리되 지 않기 일쑤여서, 학자들이 일본에까지 가서 사진자료와 지도 등을 구해 오는 형편이다. 윤용진 경북대 명예교수(66)는 "앞선 세대가 거의 사라져 가는 마당에 우리 세대에서도 이런 역사 정리작업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고 토로했다. 전쟁피해가 없던 지역인 만큼 과거와의 단절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탓일까.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3월 대구지역 중.고등 학교 교사 11명 등이 펴낸 '대구역사기행' 은 귀중한 향토사 탐구자료로 취재에 큰 도움이 됐다. 변성석 기자 |
< 영남대로 일천리 . 31 > 대구읍성~팔달교 | ||
현재 2백만명을 넘는 대구인구는 한일합방 당시3만명이 채 안됐다. 1918 년에 제작된 지도는 읍성에서 1km만 벗어나면 논밭과 과수원 임야로 채워 져 있다. 영남대로가 이 지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경부선 철도가 경산 을 우회하는 바람에 철도부지 편입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남제일관(남문) 남쪽 대구천 건너에는 관덕정(觀德亭)이 있었고 주변 에는 병사들의 훈련장이 있었다. 현재의 적십자병원 자리는 죄인들의 처형 장으로, 1861년 천도교 교주 수운 최재우가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 로 참살당한 곳이다. 기록에는 그의 처형장이 '대구장대(大邱將臺)' 로 돼있어, 감영에 가까운 현재의 대구병무청 뒤편 군 연병장 자리를 그의 처 형장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관덕정 형장에서는 1815년 을해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 해때 24명의 천주교인이 순교해 천주교 대구대교구측이 지난 91년 한국포 교 2백주년을 맞아 관덕정을 복원한 뒤 순교기념관을 열어놓고 있다. 관덕정 남쪽 남산교회 비탈길 지점에는 석빙고가 있었고, 겨울에 금호강 얼음을 가져와 여름에 썼다. 석빙고는 1907년 읍성파괴때 허물어졌으며 비석이 경북대 박물관 앞에 옮겨져 있다. 영남제일관앞 덕산동 일대를 나 타내는 반월당이라는 지명은 일제때 세워진 반월당이라는 백화점 이름에서 유래됐다. 대구읍성길 영남대로를 많이 이용한 사람들은 상인들이었다. 큰 장으로 통했던 서문시장과 약령시는 전국상권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전 국 최대규모의 한약재시장이었던 약령시는 1650년이전 조정의 진상약재를 구입할 목적으로 경상도관찰사가 열었다는 설과, 약재가 귀한 일본의 요구 로 열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인들은 때로 낙동강을 거슬러 달성군 화원의 왜물고(倭物庫)에서 직 접 약재를 구입해가기도 했다. 남문밖 염매시장은 일제시대 일본인이 이용 하는 중앙시장보다 물건값이 싸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명절이나 잔치용 떡, 강정, 돼지머리 주문이 지금도 많다. 경부가도(京釜街道 곧, 영남대로)가 뻗어간 서문시장은 김정호가 대동여 지도를 제작할 당시 읍성서문(조흥은행 서성로지점 자리)에서 3백m정도 떨 어진 지금의 시장북로 본전다방 주위 오토바이골목일대에 있었다. 성주, 고령, 의성, 김천, 안동 등 먼곳에서도 2일과 7일 장날에 장꾼들이 모여들 었다. 중구 동산동 동산파출소~본전다방~달성공원앞 골목에는 말을 매어두고 매매한 말전골목이 있었고 등겨진골목, 떡전골목, 엿장수골목 등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평양 강경시장과 더불어 조선 3대시장이었던 서문시장이 중구 대신동 현재 자리로 옮긴 것은 1922년. 천황당못을 메워 장터로 삼았 다. 옛시장이나 옮긴 큰장이 모두 대구읍성 서문밖이어서 서문시장 이 됐다. 천황당못은 주변구릉에서 흘러내린 물이 저절로 만든 자연호수로, 주변에 는 참나무숲이 무성했다. 동산병원앞길~대신로터리~대신파출소앞~계성중학 교 담을 따라 위치한 건어물상 일대가 못자리였다. 이 못은 성내한량들은 물론 부녀자들의 봄 가을 나들이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은 교통과 상권변화로 옛명성이 퇴색했으나, 조선시대에는 평양.강 경시장과 함께 삼남(경상.전라.충청)상권을 거머쥔 국내 3대시장으로 이름 을 떨쳤다. 영남대로는 대구천물길(현 인쇄골목)을 따라 동산파출소 일대 서문시장 가운데로 들어간 뒤, 말전골목~자갈마당~달성네거리~원대지하도~원대동으 로 이어졌다. 대구천을 따라 오토바이골목을 직진해 달성공원 동북쪽 뉴그랜드여관골 목을 통해 경부선 철길 굴다리지점을 지나 원대동에서 영남대로와 합친 길 도 있었다. 서문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서문시장을 거치지 않는 시장 서북쪽 서문로2 가의 신용보증기금 대구서지점~서성새마을금고~한일은행북성로지점~한남정 밀~달성파출소~달성네거리길은 지금도 남아있다. 대구천물길과 소로가 지나간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은 청동기시대이래 이 지방 중심세력들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으로, 고려 공양왕때에 이어 조선 선조 29년(1596년)에 다시 석축을쌓아 경상감영을 두기도 했다. 성리학자 서침(徐沈)을 배향한 구암서원(대구시 중구 동산동 229) 비석 에 의하면 세종때 성을 쌓기 위해 남산동 국가소유부지와 교환할 것을 제 안받은 서침이 환지를 사양한 대신, 당시 대구사람들이 빌려먹은 관곡의 이자를 한 섬에 5되씩 감해줄 것을 청원해 성사시켰다. 달성을 국가에 헌납한 혜택을 대구읍민이 고루 입은 것이다. 달성공원은 일본인이 신사를 건립해 참배를 강요했던 곳이기도 하다. 신사는 1966년 철거됐다. 공원에는 최재우 동상과 함께 대구출신 민족시인 이상화 시인 (1901~1943)의 시비가 남아있다.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 이 다르지 않느니/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가자 아 름답고 오랜 거게로' 상화 시인의 생가는 대구시 중구 서문로2가 11의 1에 타인소유로 남아있다. 경부선철길을 건넌 영남대로는 서구 원대동 대원아파트 정문을 지나 달 성초등학교앞에서 왼쪽으로돌아 보신탕으로 유명한 대원식당 앞길로 났다. 대원아파트 일대는 원대걸이라는 마을이 형성돼 있었고, 주민들은 주변 날 뫼못물로 농사를 지었다. 지명의 '원(院)'자는 대구북부의 관문인 원이 위치했던 데서 유래됐지만 원자리는 찾을 길이 없다. 대원식당~달서로네거리~신팔달시장~풍국면 대구 공장~금호강 팔달교에 이르는 영남대로는 2.4km정도. 풍국면 대구공장부 터는 공단이 조성되면서 취락의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길자리는 길 로 남아있다. * 취재기 7월하순 폭염의 도심길취재가 적성에 맞는 사람이 있겠는가 마는 대구시 중구 도원동 속칭 자갈마당을 취재하는 동안은 잠깐 더위를 잊었다. 습지 여서 자갈을 깔아 자갈마당이 됐다고도 하고, 창녀촌이어서 일본인이 행정 명을 도원동(桃園洞)으로 바꿨다는 말이 "복숭아 나무가 많아 그렇게 불렸 다"는 설과 함께 남아있는 곳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경부선철도건설이 한창이던 1906년쯤 건설 인부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모인 창녀들이 많았다는 것. 한때 7백명이 넘던 여인들 이 지금은 3백여명으로 줄었다. 59개업소의 포주들은 동심회라는 계를 만 들어 외압을 막고 우의를 다지고 있다. 관할 달성파출소 소장의 말이 걸작이다. "관례상 탈없이 자고가면 그만 이지만 문제를 일으키면 손님이고 업주고 윤락행위방지법을 적용할 수 밖 에 없습니다." 변성석 기자 |
< 영남대로 일천리 . 32 > 노원~장태실 삼거리 | ||
금호강, 한양 일 천리 기약없는 길에 벗과 님을 보내는 애절함이 밴 곳. 배를 타고, 때로는 나무다리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을 긴강 다리 목. 그곳에는 이제 조선시대 사람들의 사랑과 풍류를 간직한 모래펄은 사 라지고 초현대식 팔달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향토출신 조선시대 가객 서거정(1420~1488)은 대구십경(大邱十景)으로 금호강에 뜨는 배(琴湖泛舟)와 노원송객(櫓院送客)을 노래했다. 官道年年柳色靑/短亭無數接長亭/唱盡陽關谷分散/沙頭只臥雙白甁/관도(영 남대로)에는 해마다 버들빛이 푸른데/단정(짧은 거리에 있는 주막)은 수없 이 장정(먼 정자)에 잇닿아 있네/양관곡(이별할 때 부르는 노래)을 부르고 나서 각각 이별한 뒤에/모래밭에는 다만 두개의 흰술병만 남아 있다. 지금이야 공단으로 둘러싸여 볼품없이 변했지만, 수백년전 이 일대는 서 울나들이 길(영남대로) 상의 절경이라고 짐작된다. 대구읍성을 떠나 한양가는 길목인 금호나루터에 길손들이 쉬어가는 집이 있었던 노원(櫓院)은 현재 3공단 금호강 언덕, 팔달교 남쪽지역으로 나루 터 주변 버드나무와 주막이 어우러져 길손의 휴식처 겸 대구 북부의 관문 역할을 했다고 대구읍지 등 고문헌은 전한다. 고문헌과 고지도 등 각종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영.정조시대 이후 얼마 까지 영남대로는 현재 팔달교 우측 3공단 뒤에서 금호강을 건너 노곡동으 로 넘어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확한 기록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영. 정조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칠곡부(漆谷府) 고지도에도 대로를 칠곡에 서부터 시작해 금호강과 합치는 팔거천 동쪽으로 비껴가는 것으로 표기하 고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이 길은 팔거천 서쪽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한문교씨(71.대구시 북구 사수동)를 비롯한 일흔살 이상의 주민들 은 당시 교량역할을 했던 나루터와 목교(조선시대 팔달교)의 위치를 현재 팔달교 서쪽 달서천 하수종말처리장 관리사무소쯤에 위치했던 것으로 들어 왔고, 자신들의 어린시절까지 그 자리에 나루터와 목교가 있었던 것을 분 명히 기억하고 있다. 한씨는 "해방되는 해까지 목교가 남아 있었으며, 이 나무다리는 주로 겨 울철에 이용됐고 물이 불어나 여름철로 접어들면 나룻배가 그 역할을 대신 했다" 고 전했다. 강 너머 좌측 1백여m지점에 덩그렇게 서 있는 한 그루의 감나무 자리가 뱃사공의 숙식처. 해방 2년후까지만 해도 장씨 성을 가진 노인과 젊은 청 년이 뱃사공으로 일했다고 한다. 한씨는 "비가 올때면 당시 영남 제1의 시장인 서문시장에 가신 어머님을 그집 안에서 기다렸다" 며 생생하게기 억해 냈다. 이곳은 멀리 부산 동래에서 만선으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배의 정박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읍성내 사창에 보관해 둔 한양가는 쌀, 모포 등 조세를 운반하는 역할에 더 충실했을 것으로 보인다. 목교는 한 사람이 겨우 건너갈 수 있도록 가설돼 많은 양의 물품은 배로 운반했 다. 금호강을 건너서 목교 인근지역은 당시 밤숲이었다. 밤숲은 길손들의 휴 식처였고, 강을 따라 사방 수백m까지 뻗쳐 있었으며, 현재 북구 태전동 동 양자동차학원부지 일대가 이 밤숲의 중심지였다. 이 일대는 재래종 밤나무가 무성해 가을걷이때는 수백가마의 알밤을 따 냈다고 한다. 당시 밤숲 주인들의 인심 또한 후했다. 이연정씨(73.대구시 북구 태전동)는 "가을철 열리는 계모임이나 유지들 의 가을 소축제(小祝祭)인 밤사리놀이 때는 농민들이 알밤을 말떼기로 헌 납했다" 고 전했다. 밤숲은 또 씨름경기의 주경기장이었고 피서지였다. 여 름철이면 강변에서는 모래뜸질을 하는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부 녀자들은 이들을 위해 미역국을 끓여 팔기도 했다. 금호강을 건넌 영남대로는 현 금호인터체인지 못미쳐 난 경부고속도로 밑 굴다리를 통과해 현재 대구에서 왜관가는 우회길에 닿는다. 이곳이 바 로 수리봉 장태실삼거리이다. * 취재기 "서서 본다. 서울장 다리가 아파 못보고, 아가리 크다 대구장 너무 넓어 서 못보고... 이천저천 이천장 개천많아 못보고, 똥쌌다 구례장 구린내 나 서 못보고..." 조선후기 보부상들이 요즘 랩송처럼 흥얼대며 불렀던 이 노래는 단연 최 고의 인기가요였다. 대구시 북구 노원동 주막거리에서 걸죽하게 한 잔 걸 치고 상주장으로 향하는 보부상들은 이 노래의 흥을 배에 실었다. 금호강 나룻배에 몸을 싣고, 냄새나는 고린전을 뱃사공에게 뱃삯으로 한 두 푼 주면 서로 족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기장수가 뱃사공과 함께 "결 세좋다 안성유기, 도듬질좋다 김천방짜.. 장맛좋다 놋탕기, 살결좋다 놋요 강..." 아낙네의 몸매를 빗대 간드러지게 부르는 노래로 노부꾼들(늙은 보 부상)의 애간장을 녹였다한다. 금호강 너머 사공막에 살았던, 주민들에게 마지막 뱃사공으로 기억되고 있는 장씨의 한 평생도 그랬을 것이다. 오가는 보부상과 장단치며 대나무 노와 배에 평생을 의지했다. 가끔 사공막에서 노름판을 벌이는 보부상들이 불전(노름장소를 빌리는 대가로 주인에게 주던 삯)이나, 나들이에 나선 양반이 행하(行下:양반이 밑사람의 수고에 내리는 상)라도 쥐어주면 효복 (배고픔)은 면했다고 한다. 특별취재팀 |
< 영남대로 일천리 . 33 > 탈안바위~유목정 | ||
금호강을 넘어온 영남대로는 대구시 북구 팔달동 수리봉 밑으로 난 소로 를 따라 북부농수산물 시장 방향으로 향한다. 바위산 정상의 나무 한 그루 에 독수리 한 마리가 날마다 마을을 굽어보고 날아가곤 해 붙여진 수리봉, 그 밑자락이다. 팔달동 414의 6 합동연사 공장에서 방주교회~삼호이용소~동양식당까지의 길은 아직까지 콘크리트 포장길로 잘 보존되어 있다. 수리봉 밑 길은 내 를 끼고 경운기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다. 나무 숲에 가려 항상 그늘이 져 있는 이 길의 끝 지점은 북부농수산물 도매시장. 여기서 길은 시장 왼쪽 수리봉 밑에 위치한 국성기계 공장 앞에 서 농수산물 시장내 대구수산시장 오른쪽 길을 따라 동성기업사, 제일빌라, 매천초등학교를 지나 매남이용소에 이른다. 현재도 농로나 칠곡쪽 사람들 의 지름길로 이용되는 폭 3m 도로로 남아있다. 매남이용소에서 북쪽 방향 왼쪽 길로 들어서면 큰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토박이, 그것도 여든 이상의 고령이 아니면 들어보지도 못한 사연이 있는 바위다. 탈안(脫鞍) 바위. 임진왜란 당시 경상감사가 왜군의 막강한 병력을 상대 하기 힘들어 탈안바위에서 잔꾀를 부렸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사와 말 안장을 벗긴 군마를 탈안바위 위에서 쉬게 해 당시 위급한 상태에 놓인 우 리군 병력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왜군을 철수시켰다는 것. 바위 위 돌산에 올라보면 금호강이 내려다보이는 점을 생각할 때 일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탈안바위 바로 위 태전동 147 집 옆에는 차람바위가 또 있다. 2평 남짓 보잘 것 없는 바위인 차람바위에도 역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왜군을 탈 안바위에서처럼 잔꾀로 물리쳤다는 비슷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탈안바위와 차람바위의 유래와 현 위치에 대해서는 향토사학자들 사이에도 이론이 분분해 확실치가 못한 상황이다. 탈안바위를 빠져나온 영남대로는 북구 태전동 태원빌라앞에서 왜관의 국 도 4호선과 마주친다. 이곳이 가죽진. 현재는 태전교 삼거리를 두고 가죽 진(가죽징이)이라 부르고 있으나, 이 자리는 일제때 옮겨진 지명이다. 조 선시대 이 근처에 가죽나무, 특히 개가죽나무가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 다. 가죽진을 통과한 길은 대구시 북구 관음동 경진공업 공장~대구전문대 정 문앞에서 구안국도로 내려와 길을 건넌 다음, 조선시대 새주막거리였던 동 아백화점 칠곡점으로 향한다. 구안국도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 법무부 대 구소년원, 읍내중학교가 위치한 자리가 조선시대 고평역터였다. 이 역은 한때 일본인들이 거주, 칠곡의 거점도시로 활용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아시랑고개로 유명했다. 이곳에는 해방 당시까지도 객주집들이 있었는데 읍내사람들이 대구에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자주 들렀 으며,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으레 '아리랑 스리랑 아라리요' 하면서 신 세타령과 한말의 설움을 노래했다고한다. 지금은 평지나 다름없는 조금 경사진 국도이지만 일제시대 이전에는 제법 큰 고개였다는게 주민들의 말 이다. 동아백화점 칠곡점에서 칠곡목련아파트~보성아파트~대천동창대교회~현대. 산호.한양아파트 옆 인근 야산 밑을 지난 영남대로는 대구시 북구 읍내동 으로 들어선다. 이 길은 팔거천을 가로지르는 읍내교를 건너 북구 학정동 경북도 농촌진 흥원에서 북구 동호동 370 박상목씨 집 앞까지 연결된다. 이 집 우측에 있 는 우봉이씨의 재실인 도산재에서 다시 팔거천을 건너 칠곡군 동명면 봉암 리 조선시대의 유목정 마을로 들어간다. 봉암리에 사는 조장수씨(88)는 "유목정은 어릴때 까지만 해도 버드나무 가 무성했고,주막이 즐비하게 들어섰던 자리였다" 며 "현재는 개간돼 논밭 이 들어서 있다" 고 말했다. 도산재에서 팔거천을 건너면 봉암리 289 박 재형씨 집이 나온다. 이 집 근처에 군수공덕비, 송덕비 등이 많이 서 있었 으나 개간으로 모두 묻혀 버렸다. 폭 2m정도 되는 조선시대 옛 길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 길에는 아직도 관찰사 이호준, 조강하 불망비가 비닐하우스와 닭장옆에 반쯤 묻힌 채 서 있어, 이 길이 조선시대 관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칠곡중학교 내 칠곡향교 앞에 있는 하마비는 본래 이곳에 서있던 것을 옮겨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 취재기 조선시대 칠곡도호부가 자리했던 옛 칠곡면 지역(현 팔달교 넘어 대구시 북구 지역) 을 취재하면서 칠곡면의 역사가 어느새 칠곡 사람들에게서 잊 혀져 가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이제 팔달교를 넘어서면 빽빽히 들어찬 아 파트 숲만이 가득할 뿐, 칠곡도호부의 옛 역사를 짐작 할 수 있는 사적은 거의 없었다. 취재팀은 옛 칠곡면 지역의 영남대로를 취재하기 위해 우선 왜관의 칠곡 군청을 찾았으나, 지난 81년 대구시로 편입돼 버린 옛 칠곡면의 역사에 대 해서는 사료나 역사적 결과물이 거의 없었다. 칠곡군청으로서는 조선시대 칠곡도호부의 행정중심이었던 읍내동이 대구 시로 편입돼 버리자 향토사 발굴 주체로서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 대구 시 북구청을 찾았더니 북구청은 불과 16년 전까지만 해도 칠곡군 땅이라 자료 수집에 한계가 많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결국 옛 칠곡면의 역사는 주인이 없어져 버린 셈이 됐다. 대구시의 역사 도 아니고 칠곡군의 역사도 아닌, 두 지방자치단체에 '미운 오리새끼' 가 돼버린 꼴이라고나 할까. 아파트만이 옛 역사를 깔고 앉아 주인으로 남은 셈이다. 옛 칠곡면은 사라지고, 대신 조선시대 일본인들의 교역장소이자 낙동강 변 허허벌판일 뿐이었던 왜관(倭館)이 한일합방을 겪으면서 일인들에 의해 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칠곡면의 역사는 외면받고, 왜관이라는 지명은 아 직도 학교와 기관 등 각종 관공서 문에 떳떳이 붙여져 있는 현실이 왠지 서글프기만 했다. 특별취재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