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추억기행 .34] 대중문화 뒤안길 <7>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람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왔다 울고가는 삼각지’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대목에서 오른손을 불끈 거머쥐며, 핏대를 세우며 목소리를 돋운 그 시절 숱한 사나이들. 그들에게 가수 배호 는 박정희 대통령보다 더 대단한 존재였다.P

“어젯밤 한국 가요계의 별이었던 배호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71년 11월8일 오후 2시. 전국에 걸쳐 방송됐던 KS 라디오 방송프로그램 ‘오후의 로터리’ 진행자의 상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부터 약 1주일간 극성팬들은 망연자실의 시간을 보냈다. 일부 극성 여성팬들은 소복을 입고 서울 미아10동 빈소로 몰려들었다.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뒤편에서 거행된 노제(路祭)에는 워낙 많은 애도 인파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 에 영구차가 식장에 들어오지 못한 채 연예인 합동장이 진행됐다. 그의 시 신은 11월12일 경기도 송추 신세계공원에 안장됐다.P

중국 산둥성 제남시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난 배호(본명 배신웅). 1963년 가수로 데뷔해 5년여동안 300여곡을 발표, 한국 가수 중 가장 짧은 시간 , 가장 많은 히트곡과 2001년 11월 서울 용산구 삼각지 근처에 배호로(路) 까지 남긴 그였다.P

배호는 대구와 이런저런 인연이 많다.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그 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성주군 성주면 대흥리에서 태어난 작곡가 배상태. 그는 배호에게 ‘삼각지 로타리’와 ‘안개낀 장춘단 공원’ ‘능금빛 사랑 ’등 숱한 히트곡을 안겨주었다. 배호가 불렀던 노래의 반은 배상태 작품이 었다. 배호에게 돈과 명예를 가져다준 ‘돌아가는 삼각지’(1965년 6월 발표 ). 그 곡을 만든 배상태는 배호의 삼종숙(三從叔)이었다. 배상태는 대구시 중구 칠성동 성광중학교를 졸업(1회)했고, 한때 대구방송국 전속가수로 활동 하다가 해병대 군악대에 입대, 클라리넷을 불렀다. 제대후에는 서라벌예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60년대초 서울의 오아시스 레코드사 전속 작곡가가 되기 전 그는 대구시 중구 남산파출소 옆에서 배상태 작곡사무실(당시 대구에는 이병주, 추월성 작곡사무실 등이 있었다)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출세를 위 해 상경했다.P

‘돌아가는 삼각지’는 배상태가 군대 시절 군용열차를 기다리며 만든 작품이다. 오후 7시 용산발 부산행 군용열차. 그는 당시 휴가 나오면 칠성 동 형님(배상진) 집에 주로 머물렀다. 열차 출발시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용산 미군부대 바로 옆 삼각지 로타리 근처 빗소리 들리는 선술집에서 그 노래의 악상을 간추렸다. 배상태는 원래 ‘님과 함께’를 불렀던 남진에 게 그 곡을 주려고 했는데 외면당했다. 결국 일반 트롯 가수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저음과 고음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애절하고 독특한 보이스컬러를 가진 배호한테 그 곡이 돌아간다. 1965년, 지병인 신장염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 청량리 시립병원 뒤켠 집에서 요양중인 배호에게 악보를 보여주었다. 아직 별다른 히트곡을 갖지 못한 배호도 그 곡에 반해 다음날 부리나케 앨범을 취입한다. 하지만 ‘돌아가는 삼각지’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일부 가요 평론가들은 배호 음성을 ‘깡패 목소리’로 비 유하면서 평가절하했다. 당시 종로 2가 궁전 카바레 싱어 겸 드럼 마스터 였던 배호의 노래 실력은 1968년과 69년 영남일보 주최 ‘제2·3회 서라벌 가요대상’ 최우수 남자가수상을 수상하면서 입증됐다. 이때 패티김과 이미자 도 함께 최우수 여자가수상을 받았다.P

두 사람은 대구 연고성을 앞세운 채 대구방송국에 ‘돌아가는 삼각지’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서울과 달리 영남권은 배호의 목소리가 금방 먹혀들 었다. 얼마 안돼 대구와 부산지역 방송가 가요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서울 로 인기몰이를 했고 20여주동안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P

스타덤에 오른 배호. 그러나 얼굴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배호는 그걸 내색하지 않기 위해 늘 멋을 부렸다. 승용차도 흰색을 좋아했 고, 중절모자도 즐겨 쓰고 다녔다. 눈이 나쁘지 않으면서도 선글라스를 즐 겼다. 그는 너무 맵고 짠 것을 먹지 못해 늘 운전기사가 간맞는 설렁탕 등을 갖다주었다.P

배호는 전국 순회공연을 자주 다녔지만 1970년 오픈한 동촌카바레 무대를 선호했다. 배호의 공연은 보통 밤 8시30분·10시30분, 두 타임. 당시 갤런티는 배호가 이미자보다 많았다. 요즘 1억원이 넘는 공연 겔런티를 받 고 있는 나훈아(69년 데뷔)도 당시에는 출연료가 변변치 않아 동촌카바레 악단장 조정영한테 차비를 빌려 갔을 정도였다.P

공연 직후 대구의 유명인사들이 은근하게 그에게 동석을 요청했지만 내 성적이고, 지병까지 있었던 그는 막바로 휴식을 취하려 숙소(당시 서라벌레 코드 대구지점장 김광옥씨가 경영한 동인동 청수장여관을 애용했다)로 직행했 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너무 많은 여성과 관계를 하다보니 성병 때문에 타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그로선 일종의 유명세를 치른 셈이다. 그는 지병때문에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물론 독신인 그의 맘을 사로잡은 미모의 여인이 있었다. 대구의 한 고등학교 교장 딸이었던 옥이(배호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였다. 옥이의 상경 구애에 감동한 배호는 60년대 후반 그녀와 약혼을 했다. 대구 공연이 있을 때마다 배호는 옥이와 단둘만의 시간을 보냈지만 배호가 요절하는 바람에 부부의 연은 맺지 못했다.P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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