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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는 KS대구방송국 1세대 전속가수로 1983년 가수로선 드물게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KS KG홀 사옥 시절 가수 분과 위원장, 70∼72년 한국연예협회 경북도지부 9·10대 지부장, 복현 세계 노인대학장, 월간지 ‘대한화보’ 대구지사장을 역임하는 등 다채로운 인생여 정을 걸어왔다. 그는 오리엔트레코드사가 50년대 중반 중구 대신동 서문시장 네거리에 있던 시민극장에서 주최한 가수 선발 콩쿠르와 인연이 돼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육군 군복 차림으로 출전한 그는 실력파들 때문에 3등 밖으로 밀려났다. 당시 1등은 경산 출신의 김석희. 그는 동향 출신의 방운아(본명 방태원·현재 경기도 안양에 거주)가 ‘마음의 자유천지’ ‘한많은 청춘’ 및 영화 주제가 ‘두 남매’ 등을 불러 50년대 인가 가수 반열에 든 것과 달리 상경해 이렇다 할만한 히트곡을 내지 못하고 세인들의 기억속에 서 잊혀버렸다. 콩쿠르 직후 김상규는 불편한 심기를 안고 심사위원장이던 이병주를 찾 아가 심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그게 인연이 돼 이병주가 63년 2대 대 구연예협회 지부장이 됐을 때 사무국장으로 발탁된다. 당시 대구연예협회 사 무실은 KG홀 1층에 있었다. 자연 방송국 가요담당 PD들과 긴밀한 업무협조 를 하게 됐고 그 인연으로 김상규는 이 지부장과 함께 62년부터 전속가수 제도가 실시되기 전까지 무대에 설 가수 추천권을 위임받게 된다. 당시 지 역민들한테 가장 인기가 좋았던 주간 라디오 프로그램은 ‘KS 노래의 향연 (녹화는 일요일, 방송은 화요일 낮 12시30분부터 30분간)’이었다.P 정오 뉴 스가 끝나자마자 ‘K--S, 노래의 향연∼’을 외치는 유필기 아나운서의 오프닝 멘터가 도민들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당시 도민들중 형편이 괜찮은 사 람들은 제니스(ZENITH) 라디오, 중산층은 58년 금성사보다 먼저 나온 국내 최초 천우사 라디오로 이 프로그램을 들었다.P 그는 경쾌하고 빠른 리듬이 인상적인 스윙스타일의 ‘국산연초 아리랑’ 과 ‘연탄공장 노총각’을 즐겨불렀다. ‘국산연초 아리랑’은 양담배 추방을 주제로 한 노래였다. 아리랑 담배를 피워물면 사랑이 피고, 아리랑 담배 를 피워물면 행복이 온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연탄공장 노총각’은 비록 연탄공장 일꾼으로 겉은 검지만 맘만은 하얗다는 신파조 내용이었다. 노래 속 연탄공장은 당시 대성연탄(현재 주 대성가스로 발전)이었다.P 당시 전속가수들의 선민의식은 대단했다. 팬들의 불시 악수 요청에 대비 해 늘 흰색 장갑을 끼고 다녔다. 그도 가끔 흰색 장갑을 끼고 다녔지만 나중에는 장갑끼고 악수하는 게 팬을 위한 게 아니란 생각에 맨손을 고집 한다.P 언변이 탁월한 그는 지역의 회갑·희수연 명사회자였다. 그는 체면을 생 각하지 않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잔치 당시 D극장 사장 장모 회갑연 때 생긴 해프닝이다. 그 장모는 사위가 20만원을 요구하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부르려고 하자 난색을 표명하고 김상규만 고집했다. 동구 신암동 대구측후소 근처 넓은 저택. 민우호·정기원 악단의 오프닝 사운드 끝자락을 물면서 “안녕하십니까, 저는 KS 김상규입니다.” 김상규의 다정다감하고 리듬감 넘치는 인사말에 가족들은 물론 잔치구경 온 이웃사람들까지 일제히 환호성 을 터트렸다. 행사 막판쯤 한 민요가수가 장모의 만수무강을 비는 신나는 민요 메들리를 불렀다. 김상규는 갑자기 장모를 등에 업고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등에 업힌 장모는 너무 기분이 좋아 쌈지에서 축의금으로 들어온 수십만원을 김상규에게 몽땅 줘버렸다. 김상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P 자존심이 무척 강했던 김상규는 73년 3월3일 대구방송국이 한국방송공사 로 통폐합될 때 자기 시절이 끝났다는 판단을 하고 명강사로 변신한다. 미 국으로 유학, 사회학 박사까지 취득할 정도의 학구열도 대단했다. 대학강의, 민방위교육장, 노인대학 등 다양한 공간에서 특강순례를 하는 한편 연예인 자녀 결혼식 주례로도 자주 불려다녔다. 수성못 근처 재즈 라이브 레스토 랑 ‘SKY OX’ 대표 재즈색소포니스트 김일수(그의 아버지는 2군군악대 대 원이었던 올해 일흔셋의 테너 색소포니스트 김인배)가 1994년 대구문화예술회 관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도 그가 주례를 섰다. 제1회 자랑스러운 시민상(사 회복지부문)을 수상한 그는 방송에 대한 미련때문인지 장남 웅진(타계), 둘 째 충진을 전국 유일의 형제 아나운서로 키웠다. 다음회에는 60년대초 팝송 을 주 레퍼토리로 활동했던 클로버3중창단과 가수 김해광 이야기가 이어진다 .P /이춘호기자 leekh@yengnam.com
지난 7월31일자 ‘대구추억기행- KS대구방송국 전속가수 김상규’편에 타 계한 것으로 게재된 장남 웅진씨는 생존해 있기에 바로잡습니다. 웅진씨는 지난 30여년간 지역 방송문화 창달에 큰 기여를 하다가 2000년 안동MC방송 국 아나운서 부장으로 정년퇴직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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