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추억기행 .45] 다방이야기<1>-아루스 다방
1896년 2월11일 밤. 고종황제가 왕세자(순종)와 함께 일본의 눈을 피해 서울시 중구 정동 덕수궁 근처 러시아공사관(당시는 아관(俄館)이라 부름)으 로 피신한다. 한국 다방사의 1막1장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아관에서 보낸 1년여동안 고종은 식사 후에도 왕세자와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 누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커피를 마실 정도로 커피 마니아가 된다. 고종이 스스로 커피를 찾은 건 물론 아니다. 고종에게 접근한 여성 로 비스트가 있었다. 당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한테 발탁돼 구한말 한국 사교계 에 등장한 독일 출신 손탁(Sontag·孫澤)이었다.

고종은 자기한테 커피를 소개해주고 적적할 때 말벗까지 되어준 벽안의 여인에게 보답하기 위해 1902년 아관 옆에 184평규모의 대지를 하사한 뒤 2층 적벽돌조 손탁호텔까지 만들어준다. 고종의 속맘을 헤아린 손탁은 1층 에 사교클럽을 겸한 커피숍을 꾸미는데, 거기가 한국 최초의 다방격인 정동 구락부가 된다. 일본은 1726년쯤 네덜란드 상인으로부터 커피를 소개받았고, 일본 최초의 커피숍은 1886년 도쿄에 세수정(洗愁亭)이다. 일본에선 다방이 기사댕(喫茶店)으로 불렸다.

1930년대 두 명의 천재 예술가가 서울과 대구에서 다방을 개업한다. 당시 예술가에게조차 난해했던 ‘오감도’란 시를 발표했던 시인 이상은 33년 서울 종로에서 제비다방을 연다.

대구시 중구 태평로에서 태어난 화가 이인성은 36년쯤 중구 아카데미 극장 옆에 대구사람으로선 처음으로 아루스다방 문을 연다. 이인성은 일제 때 한국 화가들의 최대 소원이던 일본 제전(帝展), 문전(文展)은 물론 한국인 을 대상으로 한 선전(鮮展)에도 여러 차례 입상하는 등 일본화단의 기린아 로 촉망을 한 몸에 받으면서 대구에 안착한다.

그는 자신의 재주를 아껴주던 당시 대구여고보 교장 시라가 주키지(白神 壽吉)의 중매로 남산병원장 김재명의 장녀 옥순(玉順)과 결혼한다. 김 원장 은 맏사위가 술독에서 빠져나와 명화를 그려주길 바라는 맘에서 병원 옥상에 그를 위한 아틀리에를 만들어주었다. 대구에선 첫 화실이었다. 당시 전국적인 명사였던 이인성은 ‘반월당’과 함께 일제 대구의 대표적 백화점이던 ‘무영당’ 사장 이근무(李根茂)와 계성고교 재학시절 ‘뜸북새’를 작곡 한 음악평론가이자 동화작가인 윤복진 등과 교유했다.

밤이 돼 무료하면 아틀리에 맞은편 고려예식장 옆 골목에 있던 민족시인 이상화 사랑채로 마실을 나가기도 했다. 아틀리에 손님들이 갈수록 늘어나자 장인어른한테 미안하기도 해서 자기 손님들을 위한 별도의 사랑방이 절실했다.

그런 필요에 의해 아루스다방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다방에서 끔찍스러운 사건(10월30∼31일 매일신보 4면 기사 게재)이 37년 10월28일 오후 6시에 발생한다. 이인성은 선민의식이 너무 강했고 술을 먹으면 인사불성이었다. 그가 워낙 도도하게 놀자 수창소학교 선배이자 화가 지망생이던 김부돌(金扶乭)이 심통을 부렸다. 너 한번 당해봐란 심산으로 25세때 일본 제전에 입선한 400호 크기의 ‘한정(閑庭)’의 중앙 상단부를 칼로 30cm 이상 찢자 분을 삼키지 못한 이인성이 김부돌의 칼을 빼앗아 선배의 가슴을 찔렀다.

이인성은 자기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그림을 난도질한 선배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다. 김부돌은 남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이인성은 한동안 다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정신을 찾은 이인성은 정형수술 전문의처럼 ‘한정’을 정성스럽게 봉합해준다. 당시 아루스다방에 가본 적이 있는 신해철(82·전 대구일보 사장, 이인성와 종동서간), 대구시의원과 영남일보 상무를 역임한 강판룡(80), 일제때 일본 유학을 갔다 온 성만경(83)의 회고 에 따르면 당시 아루스의 명물은 실로 기워진 ‘한정’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작품은 호암갤러리는 물론 맏아들 이채원(54)의 손을 벗어나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아루스다방 탁자는 검정색이었 으며, 빅타(Victor) 회사에서 만든 유성기, 여종업원까지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인성은 남산병원을 떠나 아루스다방 옆으로 아틀리에를 옮겼다. 하지만 그는 알코올에 중독된 듯 그림보다 술에 더 무게중심을 둔다. 1940년대초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으로 거처를 마련했지만 주사는 더욱 심해갔고 급기 야 6·25 전쟁이 발발하던 그해 겨울, 서울 시내 술집에서 마포경찰서 교통순경 김성환과 사소한 시비를 벌이다가 피격돼 39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인성이 대구에 남기고 간 아루스다방은 중앙로 YMCA 바로 북편 아루스 제과점을 낳았으며, 이화진 등이 다방의 명맥을 잇다가 60년대 의학박사 박태환이 인수해 다방을 허물고 그 자리에 박내과를 세웠다. 빌딩은 현재 충무김밥 및 비디오방, 커피숍 등 복합상가로 임대돼 젊은이의 양지로 변모했다. 아쉽게도 그 공간을 찾는 젊은이들은 그 자리가 대구 최초의 다방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료사진 제공= 이인성기념사업회 /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PDF] 일제치하 선전 최고작가의 영광과 비애 :




contents 1999.11 작품 발굴 --





일제 시대 한국 서양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인 이인성의 작품 여러 점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삼성문화재단이 기획하고 한국미술연구소가 진행하는 ‘한국의 미술가’ 시리즈 《이인성》편 출간 준비중 발굴된 것이다. 정물화와 풍경화 뿐만 아니라 그동안 흑백 도판으로만 알려졌던 <카이유> <복숭아> 등, 그리고 미공개작이었던 수묵화도 함께 소개된다. 향토적 서정주의 경향의 작가로 알려진 이인성의 새로운 작품세계를 감상해 본다.


▲ <단발머리 소녀> 나무판에 유채 33×24cm 1949 개인 소장.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모델로 했다.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1930년대 우리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근대기에 활동한 대부분의 작가들이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정립했던 것과는 달리, 이인성은 1930년대에 이미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이인성이 화가로서 활동한 기간은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으로 약칭)를 통해 데뷔한 이후, 1950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작가 중 그림만을 전업으로 삼은 몇 안 되는 화가였다. 그런 만큼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에겐 이인성의 작품을 직접 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1972년 서울의 한국화랑에서 <이인성 회고전>이 열려 많은 작품이 공개되었지만, 그후로 열렸던 대부분의 전시회는 소규모였거나 몇몇 대표작들만이 간헐적으로 공개된 정도였다.

이번에 삼성문화재단과 한국미술연구소가 공동으로 기획한 ‘한국의 미술가’ 시리즈 중 《이인성》편이 발간되어 이인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의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카이유>를 비롯해 <복숭아> <산사> <단발머리 소녀> <아기> 등 새롭게 찾아낸 10여 점의 작품들은 이인성의 예술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미술사적 위상을 세우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새로 발견된 이인성의 회화와 후원자들

이인성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타고난 재능으로 어려서부터 주위의 관심을 끄는 가운데 여러 번의 행운과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우선 그를 후원한 사람으로 1920년대 후반 대구에 수채화를 보급시켰던 서동진을 들 수 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되었던 이인성은 서동진이 경영하던 대구미술사에 입사하여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동진에게 수채화를 배우며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하던 이 무렵의 작품들은 대부분 조선미전의 도록을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어서 초기 작품세계를 파악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 <아기> 종이에 수채 18×12cm 1940년대 후반 개인 소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지만 유연한 선과 능숙한 묘사로 정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이인성이 조선미전을 통해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다시 그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후원자가 나타난다. 당시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장으로 고미술 수집가였던 시라가 주키치(白神壽吉)는 이인성이 1931년 <세모가경>으로 특선을 차지하자, 동경에 있는 미술 용구 제조회사인 오오사마상회(王樣商會)의 사장에게 그를 소개하여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시라가의 주선으로 일본에 도착한 이인성에게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작품으로 1932년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카이유>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일본 궁내성(宮內省)에 판매되어 그동안 흑백 도판으로만 알려졌다가 최근에 국내로 반입되었는데, 유학 초기 이인성의 작품세계를 연구하는 데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풍경화만을 그렸던 그가 정물화를 개별적인 장르로 인식하고 그렸다는 점에서 주목되기 때문이다. 즉, 유학 이전에는 인물화나 정물화를 독립된 장르로 다룬 적이 없었으며, 인물은 그저 풍경의 일부분으로 등장할 뿐이었다. 따라서 그가 정물화를 관전에 출품하였다는 사실은 유학 이후 일어난 큰 변화의 하나로 기록될 만하다. 또한 청회색이나 황갈색이 지배적이던 대구 시기 작품들과 달리 원색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점, 작은 터치로 수채화의 경쾌한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는 점 등은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일본 유학을 계기로 다양한 서양 회화를 수용하며 자신의 화풍을 정립해 나가던 이인성은 1935년 고향 대구로 돌아와 남산병원 원장 딸인 김옥순(金玉順)과 결혼을 한다. 결혼으로 그는 다시 든든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다. 1936년 장인 김재명(金在命)의 배려로 남산병원 3층에 그토록 소망했던 아틀리에를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37년에는 조선미전에서 추천 작가의 자리에도 오른다.


30년대 후반의 새로운 작품세계

생활은 이렇게 안정이 되어갔지만 1930년대 후반의 작품은, 1930년대 중반에 이룩한 향토색이 소재주의로 귀착되는 한계를 보인다.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은 장식적인 배경을 생략하고 하나의 소재를 화면에 가득 채워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번에 도록 발간을 계기로 찾아낸 1939년 문부성미술전람회 입선작 <복숭아>에도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930년대 중반 작품들이 인물·풍경·정물을 한 화면에 종합하여 향토색을 구현했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은 나무 자체만을 확대하여 화면 가득히 채워놓았다. 또한 붉은색·녹색·노란색이 미묘하게 혼합된 바탕색과 녹색의 나뭇잎이 조화를 이룬 화면은 강렬한 원색으로 채색했던 1930년대 중반 작품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 일본 유학 시절의 이인성(아틀리에에서) 1932
그러나 <복숭아>는 화면을 가로지르거나 사선으로 교차하는 나뭇가지의 기하학적인 형태와 동그스름한 열매가 어우러져 구성의 묘미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구성은 그가 오랜 시일을 갖고 연구한 결과였던 듯하다. 1935년 8월에 제작한 <복숭아나무>를 보면 <복숭아>와 화면 구성이 거의 똑같은 것으로 보아 수채화 특성상 스케치삼아 가볍게 소품으로 그린 것을 다시 대작의 유채로 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인성은, 수채화가로 더 잘 알려져 있듯이, 초기부터 수채화를 즐겨 그렸는데 이번에 발굴한 <산사>나 <바위가 있는 해안 풍경>은 수채화가로서 능숙한 경지에 이르렀던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두 작품은 종이 크기와 필치, 물감의 강약을 조절한 기법 등이 유사할 뿐만 아니라 둘 다 ‘Lee.i.s. 星’이라는 사인을 사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인의 형태로 보아 1940년대 초반의 작품들로 여겨지는데, 야외 사생을 나가 그 자리에서 직접 제작한 작품인 듯 사생에서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배어 있어 경쾌함이 느껴진다.

작가에게 물질적·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부인 김옥순이 1942년 세상을 떠나자 이인성은 삼덕동에 새로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딸 애향과 함께 지낸다. 지금까지는 부인 김옥순이 1940년에 사망하자 상경하여 서울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이번에 조사한 결과 김옥순의 사망 연도는 1942년이며, 1944년 작품 <해당화>를 조선미전에 출품한 곳이 대구로 나와 있는 것을 볼 때 1944년까지 대구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주위의 권유로 재혼한 후 상경을 하지만, 두 번째 부인마저 딸 하나를 낳고 그의 곁을 곧 떠나게 된다.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1949년의 작품 <단발머리 소녀>는 바로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승란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한국인의 인물상 정립시켜

그의 인물화들은 대부분 입을 꾹 다물고 무표정하게 화면 한쪽을 응시하고 있는데, <단발머리 소녀> 역시 몸은 약간 측면을 향하고 있지만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화면을 벗어날 정도로 꽉 채운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에서 일정한 방향을 따라 작은 터치를 가한 얼굴부분은 마치 목조각 같은 느낌을 주는데, 얼굴에 사용된 이 꼼꼼한 필치와 대조적으로 옷과 배경에는 대담하고 활달한 터치가 구사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나무판 위에 그려서인지 필치에서 강한 힘이 느껴진다.


▲ <복숭아> 캔버스에 유채 90×115cm 1939 개인 소장 문부성미술전람회 입선작으로 배경을 생략하고 한 소재만을 화면에 가득 채워 묘사했다.
유족이 소장한 책 속에 끼여 있던 것을 발견한 <아기>는 엽서 크기의 작은 수채화로 통통한 볼과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지닌 귀여운 아기의 모습을 특유의 유연한 선과 능숙한 묘사로 정감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머리에서 콧등을 타고 목까지 내려오는 광선 처리와 아이의 투명한 눈망울, 단 몇 번의 붓질로 공간감을 조성하고 있는 배경, 단순해 보이는 인물화에 장식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작은 꽃을 그려 넣은 모자에서 무르익은 솜씨가 묻어 나온다.

전체적으로 아주 연하게 물감을 칠했지만 얼굴과 배경을 녹색 계열로 처리한 대신 모자와 옷은 주황색 계열로 칠하여 산뜻한 느낌을 준다. 이인성은 이렇게 자기 주변에 있던 인물을 모델로 삼아 한국인의 얼굴상을 정립한 작가다.

서양화가가 그린 수묵화의 세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인성은 재료나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작가였다. 이번에 발굴된 작품 중 마지막으로 언급할 수묵화들은 이인성이 얼마나 폭이 넓은 작가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동안 이인성의 수묵화가 공개된 적은 더러 있었지만 사군자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사군자를 그린 이 작품들에서는 자유분방한 필치와 파격적인 구도가 돋보이며, 특히 이 작품들의 제작 시기가 해방 직후로 여겨져 관심이 집중된다.

1945년 이인성은 이화여중의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우리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교장 신봉조의 뜻에 따라 학급의 명칭을 종전의 일본색 짙은 사쿠라(櫻)·쓰바키(椿) 대신 매·난·국·죽을 각 학년에 사용하는 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인성이 내놓은 안이 채택되어 종전의 학년별로 사용하던 학급명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인성이 사군자라는 전통적인 소재를 그린 것은 이렇게 해방 이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었던 시대적인 흐름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 <뱃놀이> 종이에 수묵 채색 12×46cm 1940년대 개인 소장 배 위에서 두 여인과 물장구를 치며 유희를 즐기는 정취를 묘사.
이와 더불어 언덕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소년과 물동이를 이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여인을 그린 <피리 부는 소년>이나, 배 위에서 두 여인과 장구를 치며 유희를 즐기는 여름날의 정취를 묘사한 <뱃놀이> 또한 1940년대 후반에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여백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이 느껴지는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수묵으로 그렸다는 점 외에도 등장 인물들이 전통적인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그가 향토색을 표현하기 위해 연구 범위를 전통화에까지 넓힌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contents 1999.11




한국의 고갱 이 인성 화백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 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돌연 거리를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걸음을 막아 세운다.
“나 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오.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오.”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고위층의 인물인가 은근히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준다. 그리고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어?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치안대원은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종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 취해 자리에 누워 있던 이인성이 옷도 입기 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뛰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적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작가 최인호가 오래 전에 화가 이인성의 최후를
소설적으로 각색해 쓴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의 한 부분이다.
한국의 고갱이요 세잔으로 불렸던 이인성은 1950년 늦가을
서른아홉 나이로 북아현동 집에서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최후를 마친다.
어떤 기록은 이미 집 근처 술집에서부터 경찰관과 시비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이인성의 최후는 이 땅에서 예술 한다는 것의 자리매김이
어떠했는가를 소스라치게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천하의 이인성이라고 했을 때 치안대원은
당시의 세도가 중 이기붕 일가쯤의 한 사람으로 지레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이씨 천하였으니까. 그래서 어떤 기록에 보면
취한 이인성을 정중히 ‘모셔다 드렸다’고 나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세도가는 커녕 일개 ‘환쟁이’였던 것. 치안대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글쓴이는 묻는다.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우리 곁의 천재를 죽인 것은 너와 나 우리 모두”라고,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다. 총을 쏘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고.
허다한 우리 곁의 천재적 예술가를 멸시하고 심지어 죽음의 길로 까지 내몰고 나서
추모비, 기념비를 세운다 호들갑 떨지 말라고.
“너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
한때 대구에서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에게 ‘화가 되겠구나’ 대신 그렇게 말했다 한다.
그는 1912년 대구 남성동에 있는 작은 음식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근대 화가들이 대부분 지주나 자본가 혹은 관료가문 출신의
자제들이었던 데 반해 이인성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가의 길을 갔다.
그가 쓴 어떤 글에 의하면 부친은 그의 뜻에 극구 반대하여
몽둥이를 들고 나올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세계아동작품전에 슬며시 출품하여 특선하였으나
정작 부모님은 화를 내시는지라 서럽기까지 했노라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주변의 몰이해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당시 구로다세이키가 빠리로부터 돌아와 일본 화단에 일으킨
외광파의 영향을 받은 일인 미술교사들에 의해 서양화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한국 고미술 연구가로 이름 높던 시라카미 쥬요시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어 태평양 미술학교에 적을 둔다.
그는 메이지(明治, 1868-1911) 말기로부터
다이쇼(大正, 1912-26) 초기에 걸쳐 이입된 후기 인상주의적 기법을
‘조선의 향토색’으로 수용하여 토착화시킨다.
이를테면 평범한 주변의 일상적 사물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한국적 색체, 형태와 정서로 덧입혀갔던 것이다.
그에게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가져다 준 <경주의 산곡에서>와 같은 작품은 천년 영화가
몇 개의 기왓장으로 나뒹구는 폐허가 된 고도 경주와
힘없는 어린 소년들을 대비시켜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는데,
헐벗은 아이들과 매미와 산하를 통해 당시의 민족상황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붉은 황토색을 통해 특유의 조선정서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그는 도시에서 출생하여 도시에서 살다간 도시인이었지만
대부분의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토착에 탐익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세련된 근대적 감각을 불어 넣었다.
버터 냄새나는 서양 기름 물감을 토장국 맛 나는
카슬카슬한 조선 황토의 토착미감으로 바꾸어버린 이인성.
아니다. 인위적으로 바꾸었다기보다는 체질로 풀어내고
토해냈다는 편이 낫다. 조선의 붉은 토지와 맨드라미,
조선 여인의 흰 저고리와 검은 무명치마 같은 색채의 대비로써
그는 암묵적으로 민족적 미의식을 드러낸다.
투쟁적 모습을 보이거나 목청 높여 드러내놓고 민족주의를 부르짖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의 그림은 향토 정서 이상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가 그린 <아리랑 고개>와 그 그림에 관한 고백은 그의 이런 생각의 뼈대를 가늠하게 한다.
“보리타작 시즌은 과연 아름다운 볼거리다. 모두 ‘예술적 콤포지션’의 하나이다.
다른 나라에 없는 조선의 보리타작이라서일까? 몸을 가볍게 들어서
‘도리깨’를 번쩍 들어올리는 그 순간의 이즘(ism)은 얼마나 대륙적인가?
여기저기서 흘러오는 아리랑의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며 또 걷기 시작한다.
황혼의 들길은 끊없이 아름답고 ‘감정적’이다.”
- 1935.6.19. 유족 소장의 신문자료-
그는 거의 독학으로 수채화와 유화를 공부해 열여덟 나이에
선전(鮮展)에 입선한 이래 연달아 입. 특선을 거듭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약관 26세 나이로 추천작가가 되었던 식민지 화단의 별이었다.
경쾌한 붓터치와 동양화의 파묵법(破墨法, 거친 먹그림 기법의 하나)을 연상시키는 필세에
토속적 정감 넘치는 소재의 화면들. 그 위에 강한 명암 대비에 의한 미묘한 긴장과 울림,
넘치는 문학성 등으로 ‘이인성류’는 선전(鮮展)뿐 아니라
해방 후의 국전 작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선전(鮮展) 참여 이력이 때로 그를 평가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그가 한국적 미의식을 명료히 드러낸 작가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인성의 아들 채원씨는 그 부분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아버님이 줄곧 선전(鮮展)에 참여하셔서 각광을 받았대서
그 부분을 약점으로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신 분으로서
그런 제도적 관문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화가로 입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처럼 화랑이 많아 개인전을 통해 자신을 알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니까요.
비록 선전(鮮展)에 참여는 했지만 아버님은 끊임없이 우리 그림을 그리려 애쓰신 분입니다.
아버님의 그림은 숫제 동양화입니다. 저희는 아버님께서 고이 간직해 오신 미발표 작품
백여 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는 종이에 그린 수묵화가 많습니다.
제 짧은 눈에도 아버님의 수묵화는 아버님의 개성과 기질을 유화 쪽에서 보다 휠씬 잘
발휘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대서 서양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수채와 유채를 주로 쓰긴 했지만 아버님의 그림은 한국화였습니다.”
그는 도시인이었으면서도 우리 산, 우리 물의 아름다움은 물론 심지어
공기의 흐름까지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때로는 일상의 풍경에서 암울하고 애잔한
식민지적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세잔의 <생 빅트와르 산>은 알아도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는 무지하다. 고갱의 <타히티 여인>의 그 원시적 생명력은
예찬하지만 <어느 가을날>의 황막한 들판에 반나(半裸)로 선 조선여인에는 무심하다.
모네의 <수련>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이인성의 <해당화>는 낯설다. 우리는 거의 늘 그랬다.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눈으로 허다한 일본인 화가들이
식민지 청년 이인성의 재능을 시샘했지만 나라 안에서 그 이인성은
정작 보잘 것 없는 ‘대구의 식당집 아들’이었을 뿐이다.
1936년 24세에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던 김옥순과 결혼한 그는 귀국 후
장인되는 김재명의 남산병원 3층에 현대식 화실을 꾸며
안정된 가운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40년 상처하고 실의에 잠기면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1947년 김창경과 재혼하면서 이듬해 서울 동화화랑에서 재기전을 갖게 되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그는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1950년 장남 채원군이 탄생하고 제2의 전성기가 열리는가 했지만
그 해 11월 4일 그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서양화로 조선의 ‘향토색’을 담으려 노력했던 이인성의 흔적은 대구에서 찾을 길이 없다.
이인성의 활동 반경을 짚어주는 것으로는 봉산 문화거리 입구에
사각의 표석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옛 정취와 연경되는 것은 그나마 약전 골목, 그리고 메마른 도시의 향기같은
한약 냄새가 끝나는 지점의 계산동 성당. 하늘에 닿을 듯한 뾰족 십자가에
남북으로 길게 익랑(翼廊)을 단 이 고딕식 성당을 이인성은 몇 차례나 화폭에 담았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이인성의 그림 속의 그 붉은 빛 구도 안에 서 있건만
천지간에 화가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김병종의 화첩기행
B.G.M A Orilla Del Rio  ;  Duo Orient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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