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추억기행 .46] 다방이야기<2>-이중섭과 다방
1930년대 서울 중심가. 26세 룸펜 소설가 구보(仇甫)씨는 정오에 집을 나와 광교, 종로, 명동을 산보하다가 새벽 2시에 움막같은 집으로 돌아간다.

그 중간에 그가 쉴 곳은 온종일 커피 한 잔만 먹고 버틸 수 있는 다방뿐. 이 풍경은 34년 소설가 박태원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 시절 ‘노동 생산성 제로 인간’이었던 구보를 흉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가전체가 ‘GNP 제로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50년대, 대구에도 제2, 제3의 구보가 길거리에서 좌장(座長) 구실을 했 다. 쓴 커피 한잔은 당시 그들의 존재 이유였다. 룸펜, 보헤미안, 히피, 걸인…. 그 경계에 분간이 안갔던 사내들은 30년대 대공황기 미국 뉴욕의 구직자처럼 거리를 배회했다. 이중섭 역시 또 다른 구보였다. 그는 피란시 절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을 돌아다녔다.

6·25, 피란 지식인들이 움을 틀 곳은 대구와 부산 밖에 없었다. 김동리는 구상 시인과 중섭이 만났던 밀다원 다방을 배경으로 ‘밀다원시대’를 그렸다. 일부 문인은 수건과 칫솔이 들어 있는 낡은 손가방을 들고 바다가 보이는 다방인 금강, 춘추, 녹원, 청구 등으로 몰려들었다. 마감에 쫓긴 문인은 구석자리에서 원고를 썼고, 고료가 생기면 밀린 외상값도 갚고, 기분이 내키면 선창가 대폿집에서 피란살이의 시름과 울분을 달래며 ‘예술대회’(유행가 부르기)를 열기도 했다.

이 풍경은 대구도 마찬가지였다. 50년대초 영남일보 주필로 있던 때 구상은 서울에서 개인전을 한 중섭을 대구로 데려온다. 전 영남대 영문과 교수이자 미공보원 원장을 역임한 맥타카트(작고)와 대구화단의 원로 정점식도 중섭의 대구시절을 열게하는 데 한 몫을 했다. 3원짜리 ‘승리’ 담배도 부담스러워 버려진 담배꽁초 속 담뱃가루를 끄집어내 신문종이에 말아 피웠던 중섭의 얼굴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하지만 대구는 그런 그림자까지 끌어안고 낭만의 도시로 빛을 발했다.

55년 가을, 중섭은 낙엽을 밟으면서 말벗을 찾아 음악감상실 녹향(처음에는 향촌동에서 출발, 현재 대구극장 맞은편으로 이전) 구석자리를 찾는다. 그곳에는 명태를 작사한 양명문과 당시엔 ‘광장에서’란 우수어린 시까지 적고 다녔던 경북대학생 김윤환(지금은 허주란 아호로 잘 알려진 원로정치인), 군화를 즐겼던 이어령 전 문화관광부장관도 진을 치고 있었다. 중섭은 일제 때 제작된 SP판에서 흘러나오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즐겨들었다. 술을 먹지 않을 땐 중섭은 지극히 여리고 말이 없었다. 그는 부산 피란시절 광복동 밀다원 다방을 배회하면서 틈틈이 못 끝으로 그려보았던 은지화 솜씨를 녹향 주인 이창수(83)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로선 이창수도 중섭의 은지화가 지금처럼 유명해질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시절 대구에서 이중섭의 그림을 구입해갈 수입상도 없었고, 중섭 역시 은지화는 본격적인 창작품이 아니고 일종의 낙서화였다 . 심지어 이젤, 화포, 물감을 살 처지도 못 됐으니 자연 담배를 포장했던 은박지가 도화지 구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중섭은 당시 미 공보원장 맥타카트의 주선으로 현재 유풍문구사 옆에 자리잡은 미 공보원 1층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작품은 20여점.

퀭한 눈빛, 땟국이 흐르는 외투, 교동시장에서 구해 온 워카를 신고 다녔던 중섭은 미 공보원 바로 옆 경복여관에서 함께 기거한 미소년 같았던 소설가 최태응(미국에서 작고)과 함께 도심을 돌아다니길 좋아했다. 여관문을 나와 대구역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구 상업은행 향촌동 지점 앞 횡단보도 앞에서 둘은 잠시 갈등한다. 오른편, 교동시장 쪽으로 가서 대구·송죽·자유극장 간판그림을 바라 볼 것인가, 아니면 길건너 향촌동 골목 다방가를 기웃거릴 것인가. 칩거형인 중섭은 다방 커피 앞에서 노닥거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부산의 백조다방에 대한 향수 때문에 북성로 백조를 점 찍으려다가 한두번 가보곤 결국 발을 끊고만다. 왜그랬을까? 자기하고 코드가 별로 맞지 않는 백조 주인 이삼근 때문이었다. 백조 주인은 너무 야수적이었고 병적일 정도로 매사에 도도하기만 했다. 중섭도 그런 기질이 있어 왠지 그가 부담스럽고 밀쳐내고 싶었다. 중섭은 당시 계성중·고 교사였던 화가 정점식과 흉허물 없이 지냈다. 거식증에 정신분열증세까지 보였던 중섭은 대구에서 극도의 외롬병을 앓았다. 술에 취하면 중섭은 어린 애처럼 극도의 스킨십을 갈구했다. 심지어 옆에 있던 정점식을 마치 애인 끌어안듯 부둥켜안은 뒤 깊은 키스 공세를 폈다. 그런 어느날 최태응이 당시 계성중·고교 미술선생이었던 정점식한테 급전을 날린다. 이중섭이가 애써 그린 은지화를 모두 태우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점식은 하던 일을 접어두고 급히 경복여관으로 달려가 중섭을 설득한다. 정 그 그림이 보기 싫으면 당분간 자기가 보관해 줄테니 갖고 있는 걸 모두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중섭의 은지화 30여점이 정점식한테 흘러들어갔다. 정점식은 그 은지화를 모두 구상 시인 등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주었다고 최근 증언해 주었다.

중섭이 대구에서 보낸 시간은 불과 1년 남짓했지만 그의 고독한 예술혼은 녹향, 백록, 백조는 물론 북성로 모나코·꽃자리·청포도·향수다방, 향촌동 호수·서라벌·르네상스, 포정동의 살으리·오리온, 대구역앞 나룻배와 야담, 동성로 은다방·파리다방·춘추다방, 남산동 고려다방, 중앙공원 옆 낙양다방, 중앙파출소 근처의 내고향 다방, 동성로 미도, 몬파리 등에서 진을 쳤던 50년대초 향토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중섭은 병세가 악화돼 중구 종로호텔 근처에 있는 가톨릭계 성가병원에 입원했다. 먼 저 서울로 올라간 구상 시인은 중섭을 서울로 데려온다. 하지만 육군병원, 청량리 정신병원을 거친 중섭은 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다음주는 백조다방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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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우연찮은 기회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는데요...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대구에 살고 있어서인지 더욱 공감가는 글이네요..
    마치 그날, 그 자리, 그 골목을 기웃거리며 훔쳐보는 듯한 생생한 글이네요..
    종종 들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 그리고 이 글은 제가 스크랩해서 제 블로그로 옮겼는데 그래도 괜찮은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