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추억기행 .47] 다방이야기<3>-백조다방
일제 때 모도마치(元町)로 불렸던 북성로. 지금은 공구·기구상 거리로 변했지만 일제 때만 해도 ‘대구의 긴자(銀座)’로 불렸다. 태평로, 대안동, 서성로, 중앙로, 향촌동에 둘러싸인 이 금싸라기 땅은 1905년쯤 경부선 철도 건설붐이 일 때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일본에서 대구로 온 일본사람들이 조성한 거리였다.

해방 직후 대구 첫 다방격인 백조(白鳥)다방은 그곳에서 태동했다. 북성로 1가 21번지, 무려 7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일제때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구 향촌동 상업은행 대구지점에서 뉴대구호텔을 향해 170여 보를 걸으면 북성로 길과 만나고 좌회전해서 20여m 가면 오른편에 신진이발기구상회가 보인다. 이 자리가 47년 1월1일 개업한 백조다방 자리다. 신진상회 바닥엔 바둑알만한 갈색 타일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었고, 20개의 나무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당시 이삼근씨가 생활했던 10여평 규모의 거실도 먼지에 쌓인채 보존돼 있었다. 격자창과 호마이카 장롱이 세월의 소리를 물씬물씬 피워내고 있었다.

일제 때 백조 자리엔 바이올린을 잘 켰던 주인 무라세가 경영했던 찻 집 ‘아오이(靑)’가 있었다. 독신인 무라세는 음질이 좋은 빅타 축음기와 다량의 SP레코드판을 갖고 있었고 가끔 동산병원 옆에 자리했던 개신교 선교사 자녀들에게 바이올린 레슨도 했다. 아오이는 골기와 지붕이 인상적인 현재 유풍문구사 맞은편 가게츠(花月), 송죽극장 맞은편 쓰바사(翼)와 함께 일제시대 대표적 스낵형 다방으로 각광을 받았다.

이삼근은 도쿄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져 대구의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지도가 있었다. 그는 깔끔하고 독선적이며 프라이드가 매우 강해 언뜻 무사적 풍모도 엿보였다. 당시 대구에선 이삼근 자체가 화제의 인물이 었다. 복장도 매우 파격적이었고 빨간 스카프, 베레, 지팡이가 늘 3박자로 따라다녀 행인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45∼46년 아오이는 잠시 술집으로 변했다가 이삼근이 ‘낭만의 백조시대 ’를 연다. 가게 이름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의 백조에서 따왔다. 1층은 다방, 2층은 거실로 사용됐다. 2층 외벽은 모두 42개의 유리창으로 치장됐는데 현재는 신진상회에서 스티로폼 패널로 가려버렸다. 홀에는 12개 정도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앞뒤로 머리까지 기댈 수 있는 높은 등받이 의자 4개가 놓여있었다. 손님들은 장방형 구조에 홀 양편으로 흡사 열차 객실처럼 의자를 배치해 백조를 ‘열차다방’이라고 불렀다.

백조는 상업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손님이 들어와도 이삼근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커피와 주스, 우유만 팔고 술은 팔지 않았고 수십년 묵은 때까지 애지중지했다. 담갈색 양 벽엔 김법룡 등 선전(鮮展) 입상작, 기증한 일본 화가 마츠우라 히데오(松浦秀雄)의 그림, 한 소련인이 그린 그림 ‘코카서스 부인의 성장’ 등 68년 당시 모두 14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음악애호가였던 이삼근은 시끄럽다며 축음기도 멀리했다. 다만 피아니스트인 외아들 이공주(李公主)를 위해서는 그랜드 피아노를 마련했다. 이 피아노가 오랫동안 대구의 명물이 된다. 해방직후 대구에서 피아노를 구경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들었다. 자연 백조는 피아노를 사랑하는 향토 음악인들의 고급사교장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65년 연주차 대구에 들른 독일 피아니스트 루스 스렌치스카도 연습 후 사인을 남겼고 안동에서 태어난 대구의 1세대 음악가로 60년 제1회 경북문화상을 수상한 권태호(1903∼72), 계산동에서 태어나 46년 그 유명한 노래의 날개, 금잔디를 작곡한 김진균(1925∼86),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등 내로라하는 음악가와 효성여대·계명대 음대 학생들의 연습공간으로 애용됐다. 경북대 사범대 지리교육학과 홍경희 교수(작고)는 공부할 곳이 마땅치 않아 늘 그곳으로 등교를 해 논문준비를 했고, 공평동 청구대(영남대 전신) 대학원생이었던 김원중 시인도 석사학위 논문 ‘한국 근대 희곡문학 연구’를 그곳에서 정리했다.

경북대 문리대 법대에 다녔던 이공주는 아주 내성적이었고 타고난 정력가인 아버지의 분에 넘치는 ‘사랑놀이’에 큰 반감을 가졌다. 군 제대 후 미국으로 귀화하기 전 이공주는 54년 현재 동인동 금융결제원 자리에 있었던 예식장 문화장에서 경북대 학생회 주최 ‘문학과 음악의 밤’에 출연 피아노 연주를 했다. 피아니스트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이공주의 등장은 백조의 유명세와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공주와 친구처럼 지냈던 권기호 시인(경북대 국문과 명예교수)도 당시 문리대학장이었던 이효상 전 국회의장(작고), 경북대 법대 학생이었던 이문희 대주교, 김종길 시인, 유치환 시인 등이 참석했던 그 밤을 그리워했다. 미국 여성과 결혼한 이공주 는 가끔 백조에서 아버지의 바이올린 반주에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이삼근과 점점 멀어졌고 결국 미국으로 귀화하고 만다. 이공주는 연주인으로 대성하지 못하고 현재 미국에서 조율사로 활동중이다. 여러번 이혼 경력이 있는 이삼근의 말년은 무척 쓸쓸하고 고독했다. 70년으로 접어들자 손님들은 자꾸 떨어져 나갔다.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는 고급 다방의 안락한 의자, 예쁘고 싹싹한 레지, 좋은 음향시설 앞에 백조의 경쟁력은 날이 갈수록 저하됐고 결국 72년쯤 문을 닫고 만다. 이삼근도 도심을 벗어나 수성구 파동에서 칩거를 시작하고 그가 80년대 타계했을 때도 단골들 대부분은 그 사실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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