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대구 추억기행 .48] 다방이야기<4> - 광복전후 풍경 :: 2006/04/01 11:10

[대구 추억기행 .48] 다방이야기<4>-광복전후 풍경
공초(空超) 오상순(1894∼1963)은 신출귀몰했다. 1951년 대구시 중구 북성로 31, 그가 정장을 하고 모나미 다방에 등장 했다. 죽순문학회(광복 직후 대구에서 태동한 한국 첫 문학회) 주최 한솔 이효상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를 빛내기 위해 참석한 것이다. 검정색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 그는 기념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담배를 잡고 있었다.

현 죽순문학회 회장인 소설가 윤장근이 간직하고 있는 이 귀한 사진 속 에는 공초와 청록파의 한 사람이었던 조지훈, 현재 투병중인 구상시인, 고인이 된 죽순문학회의 산파역 이윤수 시인 등이 축하객으로 자리했다. 잠자는 시간 외엔 담배를 입술에서 떼지 않았던 공초는 풍찬노숙의 삶을 사랑한 우리 문단의 으뜸 허무주의자(공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아호 공초(空超)가 아닌가)로 특히 대구와 이런저런 인연이 많았다.

그가 대구에서 머문 기간은 20여년. 공초는 일제 때 서울 남산에서 수주 변영로, 횡보 염상섭과 대낮에 발가벗고 스트립쇼를 벌여 살아가는 재미를 잃은 한국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적이 있었다. 1927년 약전골목 구일당 한약방 주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방한상(方漢相) 집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그는 장발이었다. 남산동의 한 여관에 진을 친 공초는 고월 이장희, 이상화 시인, 백기만 시인과 교우했고 상주 출신 퇴기 덕분에 주막 상주집 골방을 차고 앉을 수 있었다. 그가 진을 치고 있던 골방은 아무리 많은 지인들이 찾아와도 모두 수용할 수 있어 일명 ‘고무줄방’으로 불렸다. 공초는 서울에선 명동의 청동 다방, 이인성이 오픈한 아루스 다방에도 한두번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중섭이 북성로 백조다방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처럼 그도 귀족풍 분위기에 거분반응을 일으켰다.

매일 얻어먹고 사는 자신이 한스러웠던지 공초는 상화의 도움을 받아 아세아란 이름의 술집을 경영한다. 그러나 공초와 돈의 관계는 물과 기름과 같았다. 들어오는 돈보다 외상 등으로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몇달만에 빚을 안고 폐업을 하고 말았다. 아세아와 거래한 주류도매점 안동옥의 사장은 그가 유명 시인이란 사실을 알고 이색 제안을 한다. 안동옥 광고문안을 빚을 청산하는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공초도 흔쾌히 허락한다.

“거품과 같은 인생이다. 어둡고 헛되게 살 것인가. 불안한 세상을, 짧은 인생을 웃으며 명랑하게 살자. 새 봄이다. 명랑한 인생이다. 부라보. 희망의 잔을 비워라. 강하게 즐겁게 짧은 인생을 즐기자.”

공초가 대구 첫 카피라이터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공초의 기행은 ‘창조적 낭만’이라기보다는 ‘절망적 낭만’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1920년대까지 서울 중구 다동(茶洞)에는 우리의 전통차 문화가 살아있었다. 하지만 30년대로 접어들면서 커피(Coffee)를 앞세운 근대식 다방의 위세에 밀리게 된다. 그 뒤부터 전통차 문화는 일부 종교권에 흡수됐다가 대구의 경우 80년초 예전다방, 차하늘, 군불로, 진솔천 등이 부활시킨다.

다방커피는 식자층에게 마약처럼 파고들었다. 파리한 얼굴, 게슴츠레한 눈빛의 룸펜 지식인들한테 음악, 푹신한 소파, 상냥한 마담과 레지가 기다리고 있는 다방이 유토피아 같았다. 30년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우리나라 주요도시에선 카페와 다방문화가 꽃을 피운다. 서울시 중구 충무로 강석연(姜石燕) 마담이 경영했던 모나리자 다방에선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 음악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일본 교토, 도쿄를 출발해 현해탄을 건너 한반도에 상륙한 빅타, 콜롬비아 등 클래식, 재즈 복각 SP음반은 경성역을 출발, 대구역에 도착했고 순식간에 대구 중앙통(중앙통 말고도 대구에는 종로통, 시장통이 있었다) 좌우편 골목에 포진한 다방, 바, 카페, 레스토랑으로 스며들었다.

광복과 함께 대구의 대중문화도 일대 전기를 이룬다.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려 대구에 진주한 미군들의 무료한 밤을 흥겹게 해줄 유흥프로그램이 절실했다. 45년 대구일일신문 9월호 광고란을 보면 서비스걸, 보이, 여급, 댄서교습생 모집공고가 쇄도한다. 완다풀 댄서홀(현 외환은행 대구지점 옆)은 35명 숙식가능한 남녀직원을 모집했고 낫쇼나루그라브(북성로), 남선사교사 등도 댄서 교사를 찾았다. 대다수 다방들은 일본 다방 경영 스타일을 모방 , 낮에는 커피만 팔고 밤에는 술을 팔았다. 마담 인심이 좋으면 춤과 노래도 허용됐다. 당시 대구 상권은 동성로∼서성로∼남성로∼북성로로 연결되는 대구읍성, 일명 성내(城內)에 국한됐다. 동인로터리, 반월당, 계산오거리, 대구역 뒤편으로 가면 논과 밭, 초가, 판자촌이 즐비했다. 변두리 사람들한 테 ‘성내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대구역전∼태평로 ∼북성로∼대안동∼종로∼향촌동∼포정동∼화전동∼공평동∼동성로 거리 안에 포진한 다방 역시 성내 사람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참고로 45년 11월 지역 신문에 게재된 주요 유흥업소의 면면이다. 향촌동 능라도빠, 미화빠, 백조카페, 북성로 삼중정(三中井; 미나카이) 백화점 안에 국제회관, 대구 역전 카바레 루나파크, 동성로2가 장미빠, 신천지, 봉산동 갈매기빠. 이들 빠는 요즘 다방과 흡사했고 훗날 비어홀, 나이트클럽, 카바레, 회관, 디 스코장 등으로 세분화된다. 다음주에는 50년대 대구 다방을 주름잡았던 대구 문단의 3인방 기인 박훈산 시인, 정석모 시인, 문학평론가 최광렬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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