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대구 추억기행 .49] 다방이야기<5> - 파란시절 :: 2006/04/01 11:25

[대구 추억기행 .49] 다방이야기<5>-파란시절
전쟁 중엔 절망만 있는 게 아니다. 낭만도 있는 법이다. 6·25때도 그랬다. 격전지와 달리 후방은 그 나름대로의 흥청댐과 설렘이 있었다. 1950년 12월 12일 계산성당에서 육영수와 혼례를 올린 박정희는 구상·조지훈 시인 등 피란문인들과 함께 막걸리집과 다방을 오가면서 ‘낭만의 50년대’를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 인이자 국회의장을 역임한 이효상은 48년과 51년 추레한 옷차림에 파리한 표정으로 북성로 모나미다방에서 두번이나 시집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50년 7월 문총구국대 경북지대가 조직되고, 51년 1·4 후퇴땐 대구에서 공군종군문인단(창곡구락부)이 결성돼 덕산동 공군홀에 사무실을 두고 매일 종군기를 발표했다. 51년 5월26일 밤엔 아카데미 골목 안 에 있던 아담다방에서 육군종군작가단이 발족됐다.  자리에는 소설 ‘자유 부인’과 고교 교과서에 실린 수필 ‘산정무한’으로 유명한 정비석, ‘목마 와 숙녀’란 시로 잘 알려진 박인환, 가곡 ‘명태’의 작사가 양명문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출판사 관계자, 만화가까지 가세했다. 다방은 그런 흐름 을 고스란히 끌어안으면서 피란지 대구가 문학예술 도시로 자리잡는데 일조 를 했다.

중구 화전동 대구극장 옆 골목, 대구역전, 북성로, 향촌동, 교동은 마 치 크리스마스 전야의 도심지처럼 한낮에도 제대로 걸어다니기조차 힘들 정 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영업이 잘 된 업종 중의 하나가 다방이었다 . 다방 커피가 잘 팔리자 빵집도 돈을 벌기 위해 커피를 몰래 팔았다.

다과점(茶菓店)도 그런 배경을 안고 태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50년대 커피는 거의 밀수품이거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자연 공급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다방 커피의 질도 수준 이하였다. 상당수 다방에선 ‘꽁 피(담배꽁초 커피)’를 몰래 밀조해 팔았다. 담배 가루를 삶아서 커피와 섞 어 팔았는데, 물론 육안으론 구별이 안됐고 입안이 약간 화끈거리는 것 말 고는 여느 커피 맛과 비슷했다. 참고로 1960년대말 연간 커피 수입비용이 780만달러에 달하자 보다못한 정부가 적극 개입해 국내 커피제조업체 설립을 허가한다. 1970년대 전후 국내에선 처음으로 미원음료가 원두커피를, 동서 식품이 미국의 제너럴 푸드사와 기술제휴로 ‘맥스웰 하우스커피’를 생산하 기 시작한다.

6·25때 피란문인들이 주로 찾았던 다방은 백록(현재 향촌동 골목 뉴대 구여관 자리), 상록, 아담, 향수, 녹향, 르네상스, 나룻배, 낙양 등으로 광복 직후 백조와 함께 북성로의 대표적인 다방으로 알려진 모나미와 함께 대구 다방사 1기를 주름잡았다.

현재 향촌동 뉴대구여관 자리에 있었던 백록, 그 옆에서 50년대 후반에 생겨난 호수다방은 향촌동 미인 마담 시대를 연다. 백록의 출입문에는 청 전 이상범이 직접 각(刻)을 한 나무간판이 걸려 있어 운치를 더 했다. 예 인들이 이 집을 선호한 것은 여주인의 교양과 미모가 한 몫을 했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오랜 시간 앉아 있어도 야박하게 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동 대표였던 여주인 정·안모씨 둘 다 경북고녀 출신이었다. 당시 경북고 녀 출신이 다방을 경영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이었으니 화 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안씨는 경산 안부자 딸이었고, 정씨는 불문학에 나름대로의 조예가 있어 당시 대구의 내로라하는 예술가이면 백록에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일본, 중국, 한국 등 동양 3국을 통틀어 최고의 주먹으로 추앙받았고 고희(古稀)에 구상 시인의 추천으로 시인이 돼 화제 가 된 박용주(1911∼89)가 다방에 나오면 갑자기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돌변 했다. P사교춤을 잘 추었고 부드러운 눈웃음이 인상적인 이설주 시인이 나타 나면 다방 분위기는 일순 화사해졌다. 백록의 두 마담도 나름대로 한 미모 가 있었지만, 제일모직 여공출신인 호수다방의 장 마담을 결코 따를 수 없 었다. 그녀는 최은희처럼 빼어난 미모에 키도 컸고, 예의범절까지 겸비해 백록이 문을 닫고 난 뒤 그 단골들을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었다. 미인박 명이란 말을 실감케 해주듯 향촌동에서 놀고 먹던 룸펜을 남편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바람에 호수를 정리하고 서울로 도망쳤지만 70년대후반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하지만 대다수 다방은 매상올리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와서 커 피를 마시고 2∼3시간이 넘어서면 마담과 레지의 눈총을 받게 되어 마지못 해 한 잔을 더 시켜야만 했다. 50년대 다방의 풍속도는 지금과 조금 달랐 다. 손님이 오면 바로 주문을 받지 않는다. 일단 성냥과 재떨이를 두고 간다. 5분여동안 주문이 없으면 엽차와 신문을 갖다주고, 그래도 주문이 없 으면 냉소와 함께 야멸차게 엽차와 신문을 갖고 가버린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50~60년대 대구대표다방

대구 역전에는 나룻배, 시골, 대우빌딩 지하에는 야담, 북성로에는 동해 반점 동편 성미초밥 2층에 청포도, 그 맞은편에 꽃자리, 몇 집 건너 낙원 식당 2층에 모나미. 향촌동 뉴대구여관 골목에는 백록, 몇 집 건너 호수( 현재 서울 삼계탕 랜디아제화), 현대약국 옆에 녹향(1946년 개업한 음악감상 실), 판코리아 성인텍 바로 서편에 르네상스. 중앙로변의 경우 롯데양복점 2층에는 춘추, 한국은행 근처에 캔들, 형제양복점 2층 롯데부동산 자리에 서라벌, 모모양복점 자리에 상록.P 학원서림 바로 남쪽에 향수, 제일문구프라 자(전 로얄호텔) 남편 골목 안에 성좌. 아카데미 극장 남편 골목 끝 왼쪽 골목 안에 아담, 그 맞은편에 혹톨(스페인어로 칵테일이란 뜻) 중앙공원에서 동아백화점 방향 금은방거리 석금당 동편에 돌체(이탈리아어로 부드럽고 우 미하게란 뜻), 그 옆에 모카, 그 맞은편에 무랑루즈, 그 옆에 살으리, 세 르팡, 나포리가 자리잡았다. P한일로 한일극장 맞은편에 보림, 동성로로 오면 옛 런던제과(현 LG패션) 근처에 맥심, 맞은편에 은다방(훗날 동문동으로 이전 동문다방이 됨) 서성로 옛 영남일보 사옥 근처 낙양. 현재 남산동 고려다방에서 북쪽으로 20∼30여m 가다 보면 원조격인 고려다방 자리가 나오 고 대구시립도서관 건너편 백제다방으로 태동한 미도는 한일극장 건너편과 중앙파출소 옆 화방골목 중간 왼편으로 갔다가 80년대 초 진골목으로 이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중앙파출소 근처에는 파초와 내고향이 진 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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