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훈산(1919∼85), 정석모(1922∼87), 최광열(1925∼95). 이 세 사람은 ‘대구의 천상병’으로 통했다. 보헤미안·집시·룸펜 유전 자를 가졌던 이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역 예술사도 방자·향단이 없는 춘향전처럼 무미건조했을 지도 모른다. P1950년대 중반 1년여간 대구에 머물렀던 이중섭, 뒷골목 술판을 주름잡던 구상·조지훈 시인 등 피란 문 인들이 서울로 올라가버리자 대구 문화계는 잠시 공허감에 빠지지만 이들 3 인방이 다방을 돌며 빚어냈던 각종 기행(奇行) 덕분에 푸석하던 대구의 표 정에도 다시 생기가 돌았다. 박양균 시인(영주 출신으로 1961년 한국문협 경북지부장 역임, 영남일보 논설주간 역임)과 부인이 계성고교 근처에서 약 국을 경영하던 화가 주경 등은 호주머니 사정이 비교적 넉넉해 세 사람에 게 술을 잘 사주었다. 이들의 기행에는 늘 그늘이 있어 일부의 비판 대상 이 되기도 했지만 문단의 좌장격인 백기만 시인(1902∼67)은 “원래 예술가 란 다 그런 사람들”이라면서 훈훈하게 감싸안아 주었다. 살으리, 몬파리 등에 출근도장(?)을 찍었던 박훈산. 그는 베레가 잘 어 울리는 시인이었다. 향토 문인들 중에선 키와 발이 가장 커 신발은 일명 ‘보트’로 불렸고 겅정겅정 걷는 모습을 본 문인들은 “저기 말이 간다” 면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커피 한잔 값으로 다방에서 하루를 보내는 그를 마담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숱한 눈총도 그에겐 소용이 없었다. 그는 원래 돈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청도의 부유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유 산으로 물려받은 적잖은 재산을 경마 등으로 모두 탕진했다. “눈 둘 곳을 몰라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어 보면/ 기인 손가락 사 이로/ 모두가 잘 났구나/…중략…/ 인생은 저마다 가는거라/ 허지만…/ 가는 길은 하난데”(시 ‘가는 길은 하난데’ 중에서)란 시구처럼 그는 인생무 상의 눈매로 자신의 가난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6·25때 현재 노영하 산부인과 앞 길에서 연출한 박훈산 자살소동은 ‘ 향토예술계의 1급 해프닝급’으로 기록된다. 미모가 남달랐던 한 마담에게 대화의 손길을 뻗어보았지만 모두 좌절된 그가 마담의 맘을 돌리기 위해 독약을 먹고 길바닥에 드러누운 것이다. 마담은 그 사실을 알고도 일부러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았다. 그 광경은 당시 영천 부관학교 교관이었던 신동 집 시인(올해 작고)이 목격한 것이다. 지독한 역마살의 소유자 박훈산. 결혼한 몸이지만 집 밖으로만 돌아다녔 다. 보다 못한 아들이 어머니의 특명을 받고 현재 석금당 맞은편 태극도서 옆에 자리잡았던 60년대 지역 예술가들의 대표적 사랑방 무랑루즈를 급습 했다. 아들은 구석자리에 앉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앉아 집으로 가자고 읍소를 했지만 박훈산은 화랑 담배만 연신 피워대면서 고개를 외로 돌려 버렸다.
---------------------------------------------------------------------------------------------------
[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 .23] 시인 박훈산 | 6척 거구서 풍겨나는 토속적 체취 혼자 술마시다 사람 생각나면 술병 안고 달려가 등단 12년째 첫 시집…'향촌동 주인'불리기도 | 생전의 박훈산 시인. 대구문인 중 키가 제일 컸다는 그의 큰 키가 앉아있어도 느껴진다. |
|
1950년대 서울의 이봉구가 '명동백작'이라면 시인 박훈산은 '향촌동의 주인'이었다. 휘적휘적 마르고 큰 키로 혼자 걸으며 그는 스스로 향촌동의 보스 행세를 했다. '봄이 오면 건너리라, 푸른 바다….' 57년, 꽁꽁 얼어붙은 춥고 어두운 향촌동을 지나며 박훈산은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밑바닥까지 얼어붙은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는 남들이 터놓은 길은 다니려 하지 않는 성격을 지녔다. 벌판의 칼바람이 후려쳐도 박훈산은 그만의 스타일로 고집스럽게 뚜벅뚜벅 혼자 걸어갈 뿐이었다. 타협을 잘 하지 않는 대신 그는 부정 속에서 긍정을 갈구하는 편이었고 배척당할 때마다 속으로 눈물짓는 그런 형이었다.
1956년 이중섭의 부음을 지상에서 본 박훈산은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 해 초겨울 당시로선 귀한 '카나리안 위스키' 한 병을 혼자 마시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시인이 있어 술병을 가슴에 품고 어두운 거리로 나와, 쏟아지는 흰 눈을 머리에 얹으며 달려와서는 안주도 술잔도 없이 무작정 술을 권하며 같이 나누던 그였다. 평생 술을 좋아한 박훈산은 그 무렵 유일하게 김수영으로부터 시로,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1919년 청도 출생인 박훈산은 일본 니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46년 국제신보로 등단했다. 그는 시대적 진통과 고뇌 속에서 솟구치는 절규로 시를 썼다. 등단 10년이 지났어도 시집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시에 대한 겸허가 있어서였다.
그는 6척 가까운 거구였다. 긴 머리를 하고, 그러나 온유한 표정과 부드러운 음색으로 다방이나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시를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서민적인 소탈함이 있었다. 쉽게 범하지 못할 위엄이 있었고 그러면서도 토속적인 체취가 물씬 묻어나는 시인이었다. 58년 첫 시집 '날이 갈수록'을 출간한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향촌동에 나타나 살다시피 했다. 그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모습을 | | | 1983년 이상화 시비 앞에 선 박훈산 시인(맨 왼쪽). |
|
|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주머니의 형편이 좋은 편이어서 도원동에 들어가 며칠간 옴짝달싹하지 않고 칩거하곤 했다. 그러다가 주머니 사정이 어려우면 구부정한 큰 키로 다시 향촌동에 나타났다.
그 무렵 아카데미극장 뒷골목에 있는 다방 '파초'에 그는 온종일 자리를 지키고 있다시피했다. 다방은 좌석이라야 대여섯개 뿐인 좁은 공간이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을 경마, 도박 등으로 탕진한 그는 호남 출신인 미모의 다방 마담을 흠모하고 있었다. 마담과 보통사이가 아니라는 말이 흘러 다녔다. 결국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음독 소동을 벌였다. 그러자 길 가에 쓰러져 있는 그를 마담이 알고 달려와 가까운 중앙병원으로 옮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병원은 이중섭이 운명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열정적인 시인의 갈망으로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어쩐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방 파초는 문을 닫고 말았다.
62년 경북예술가협회를 모체로 해 유치환과 함께 경북예총을 창립하고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 해 예총에서 주관한 '제1회 신라문화제'가 경주에서 열렸는데, 당시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참석,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박훈산은 첫 시집을 낼 때 표지그림이 필요했다. 마침 조기섭이 이중섭의 그림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빌려달라 하고 가져갔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조기섭은 처음엔 "어떻게 그림과 나를 바꿀 수 있나"고 서운해 했으나 "시인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덤덤해 하는 관대함을 그 후에 보였다. 그런 단편적인 추억들이 오히려 아쉽고 그리운 것은, 큰사람은 그림자도 커서 이런저런 것들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 시집 '날이 갈수록' '박훈산 시선집' 등을 남긴 그는 85년,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끊고 고생하다가 지병으로 별세했다. 그의 문인장이 대구문협(회장 도광의) 주관으로 장남의 집이 있던 청구고 뒤편 공터에서 거행됐다. |
---------------------------------------------------------------------------------------------------
경산 출신인 정석모는 지독한 독설가였다. 정석모는 돈은 없지만 문심( 文心)만은 부유했다. 그러니 자존심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 향토 문 인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한테도 천적은 있었다. 하루는 그가 중앙로 대구 YMCA 2층에서 열린 서정희 시인(1924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67년 마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 출판기념회의 불청객으로 나타났다. P평소 정석모는 당시 경북도청 공보실에 근무했던 서 시인을 무척 가까이 하고 싶어했다. 낮술에 취한 정석모는 삿대질까지 해대면서 “네까 짓 주제에 문학은 무슨 문학”이라며 참석한 문인을 향해 욕설을 마구 퍼 부었다. 보다못한 김용성 시인이 발끈해 정석모를 끌어안고 2층 창문 밑으 로 떨어트리려고 했다. 50년후반 경산금융조합에 잠시 적을 둔 적도 있지만 그는 늘 무직의 범주를 못 벗어났다. P한때 경산 고산에 있는 그의 집 대문짝을 가마니로 달았을 정도로 빈궁해 지인들한테 신세를 질 수밖에 없 었다. 1963년쯤 정석모는 대구서적 근처 골목 안에 있었던 나그네 다방(이 재철 시인이 경영)에서 당시 원화여고 교사였던 김원중 시인을 만나 액자지 원을 요청했다. 김원중이 원화여고 문예반 액자 20여개를 빌려주었다. 하지 만 정석모는 개인전 직후 그 액자를 돌려주지 않고 중앙파출소 옆 골목 한 화방에 모두 팔아버린다. 결국 박양균·김원중 시인이 반씩 갚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됐지만 그 다음 정석모의 행동이 가관이었다. 동성로에서 김원 중을 만난 정석모는 액자를 돌려주지 못한 걸 미안해 하면서 김원중을 근 처 다방으로 끌고갔다. 커피 한 잔 사주고나선 “김형, 집에 가는 버스비 좀 빌려주시오”라고 손을 내밀어 김원중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
[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 .4] 시인 정석모(上) | 6·25에 빼앗긴 문학적 야심 1950년 '木花' 모윤숙 추천받아 과도기에 등단 취중 시국발언, 몇번이나 사찰기관 끌려가 고초 | 1979년 경산시 용성면 덕천리 김윤식 시인의 생가에서 동료 문인들과 찍은 사진. 왼쪽부터 전상렬, 정석모, 윤혜승, 김윤식 시인. |
|
대구 수성구 고산의 5관구 소속 육군수송파견대의 철조망 담장 옆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면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넓은 마당을 안고 있는 초가 삼간 정석모(鄭夕茅)의 집이 있다. 1970년도 쯤이었다. 정석모는 연락없이 찾아간 내방객을 위해 충남 예산 태생인 그의 아내를 시켜 주전자로 막걸리를 받아오게 했다. 그리고는 작은방에서 기타를 끄집어 내어 못 물결처럼 잔잔하게 이미자의 노래를 들려 줬다. 수준급 솜씨였다.
뜨락 위에는 밭 어디에서 캔 것인지, 시골장에서 사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통통하게 살찐 굵은 고구마가 한 가마 쏟아져 있었다. 문득 그의 시 '감저기(甘藷記)'가 떠올랐다.
"텅 빈 정오의 한복판에/ 고구마 1관을 쏟아놓으면/ 나는 어엿한 포로수용소장이 되고만다// 아직은 그로 하여금 살아있는 /내 위엄의 /흐뭇한 보람의 만끽이자/ 공복같은 것…"
그 무렵 정석모는 KG홀(현 시민회관)에 있던 예총 사무국에 근무하면서 타블로이드판 4면 '예총경북'을 편집하고 있었다. KG홀 지하에 '문화싸롱'이 있었지만 그는 길 건너 대폿집에서 고구마, 번데기를 안주로 혼자 술을 마시거나 찾아 오는 손님을 맞기도 했다.
원래 경산이 집안인 그는 1922년에 최근 독도문제를 야기한 시마네현의 마추에에서 출생했다. 일본 중앙대학 전문부를 수료한 그는 광복이 되자 포항으로 건너와 금융조합에 잠시 근무하다가 고향 경산의 금융조합 서기로 안착했다. 그의 담당은 술도가였다. 도가에 자금을 융자해 주고 회수하는 일이었다. '정주사'로 널리 알려진 그는 인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안 통하는 술집이 없었다.
일제시대 많은 문예지를 탐독, 단단한 문학적 소양을 닦아 놓았던 그는 대구에서 유치환을 알게 됐고, 50년 그를 통해 시 '목화(木花)'로 '문예'지에서 모윤숙의 추천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6·25전쟁이 발발했고 그것은 정석모의 문학적 야심과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았다.
경산의 금융조합에도 오래 근무하지 못했다. 평소 선량하고 결벽증 같은 것이 있던 그였으나 술 취하면 실수가 많았다. 그 당시 금해야 할 위험한 시국적 발언도 거리낌없이 툭툭 내뱉었다. 자연 사찰계 등에서 요주의 인물로 주목하게 됐고, 몇 번 끌려 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금융조합에서 문제가 됐는지 스스로 물러 나오고 말았다. 사상적으로 그는 엉뚱한 피해를 입은 셈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술에 취하면 제어하지 못할 내부의 것들이 줄줄이 터져 나오곤 했다. 그것은 무슨 잣대로 잴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나 없이 먹고 살기 궁핍한 시절이었다. 당시 뚜렷한 직장을 가진 문인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차라리 시에 좀더 몰두했더라면 그런 일은 숙지게 되었을 지도 몰랐다. 과도기에 등단한 그라 시기적으로 조금 빨랐거나 늦었더라면 그런 현상은 없었을 것이다.
자유당 말기였다. '호수' '백조' 다방에서 30대 후반의 정석모는 상대방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이야기하지 못할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다.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기도 했다. 치아가 고르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 무렵 '현대문학'에 시 '능금 두벌꽃' '극락전에서' 등으로 2회 추천을 끝낸다. 당시 응모자의 주소가 경산군이라 현대문학사에서는 소박한 농부인 줄 알았는데 시상식장에서 40세 가까운 정석모를 보고 아연했다. 그 날 수줍어 하면서 그는 유치환과 술을 나누었는데 차츰 술에 취하자 유치환은 안중에도 없다는 투의 언행을 했다. 그러나 유치환은 이를 잘 받아 주었다. |
[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 .5] 시인 정석모(下) | 벌어진 문학과 삶의 간극 반항의식 노출 좌충우돌식 언행, 日노래와 기타 능숙 술자리'스타' 한때 신문사 교정부 기자로 근무 | 1988년 칠곡 지천면 청구공원묘지에 세워진 정석모 시인의 시비 제막식날, 고 이재행 시인이 경과 보고를 하고 있는 모습. 원내는 50대의 정석모 시인. |
|
그 무렵 정석모에게 있어서 문학과 삶의 간극은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었다.
"나는 허탈에서 자포자기로 자리를 바꾸었고 그때부터 나이답지 않게 조금씩 노출되는 반항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요설'이라는 주를 단 시집 후기에서 정석모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가진 것 모두를 잃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집이 고산이던 정석모는 덕산탕이 있는 반월당 버스정류소에서 차를 타거나 내리곤 했다. 대구에서 고모까지 기차가, 고산까지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는 하루 세 번 왕복했다. 버스표를 끊고 가게 겸 정류소에서 무료해지면 그는 술을 마시거나 했다. 종종 술에 취해 귀가하곤 했다. 한 번 버스를 놓치면 옴짝할 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여인숙 신세를 지는 일이었다.
정석모는 일본말에 능숙했고 일본 노래와 기타에 뛰어났다. 주석에서 일본 노래를 부르면 좌중은 최면당한 듯 옴짝 못했다. 시인이 시보다 노래에 뛰어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바바리코트 차림의 시인 서정희는 그런 모습의 정석모에 흠뻑 빠져있었다. 외로운 삶을 살았던 서정희는 40대 초반의 우수에 찬, 순박한 정석모의 모습과 노래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정석모가 부른 노래 중 모두를 흔든 것은 일본말로 부른 '인생은 갈대'였다. "나는 강가의 외로운 갈대…당신 역시 외로운 갈대…우리 모두는 하나의 외로운 갈대…." 구슬픈 음색으로, 또 수줍은 표정으로 부른 이 노래는 절박했던 당시의 모두를 고스란히 감염시키는 그 무엇이 있었다. 특히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시인 서정희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정석모는 이 노래로 많은 자리에 불려 갔다. 불려 가서 노래 부르고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나 술취한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뜨게 마련이었고 마지막에 남아있는 사람은 그 뿐이었다.
4·19 혁명 직전이었다. 당시 '대구매일'의 이호우 편집국장은 정석모를 교정부 기자로 특채했다. 일본 유학과 정식 등단한 시인이어서 그랬다. 그러나 몇 달 못가 자유당 정부가 무너지자 이호우 국장은 스스로 사임하고 말았다. 그러자 신문사에 남아서 근무하면 될텐데도 정석모는 따라서 사직하고 말았다. "당신이 무엇때문에 사직했느냐"는 주위의 말에 "나를 신문사에 넣어준 사람이 나갔는데 어떻게 내가 더 있을 수 있겠느냐"고 천연스럽게 받아 넘겼다.
특유한 정석모의 체질이었다.
종종 술좌석에서 정석모는 자극적인, 상대방이 듣기 거북한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남자들에게는 무턱대고 "야, 이 속물아",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도 "야, 이 ××야" 이런 식으로 좌충우돌 소리지르며 상대방의 신경을 건드렸다. 호주머니가 궁하면 문인들에게 돈을 빌렸다. 많은 액수가 필요 없었다. 모두가 궁핍했던 그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경산까지의 버스비와 막걸리 한 되 값이면 족했다. 어쩌다 많은 돈을 받게 되면 필요액만 제하고 나머지는 되돌려 줬다. 향촌동의 '고바우집' '뚱보집' '노새집' 등이 단골 술집이었다. 특히 노새집엔 문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그러나 고바우집은 그 집 마담과 일시 동거하고 있는 시인 박지수가 닻을 내리고 있는 귀항지였다. 거기 자리잡고 있으면 문인 한 둘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어 자연스럽게 술자리는 벌어졌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면 대포 한 잔으로 일어서기도 했다.
1987년 지병으로 타계한 정석모의 시비가 그 이듬해 생전에 누구보다 가까웠던 고 이재행 시인이 힘을 써서 칠곡 지천면 청구공원묘지에서 제막됐다. 가장 정석모적이고 토속적이란 그의 시 '능금 두벌꽃'이 거기 새겨졌다.
"바늘끝만치/ 귀뚜리 갈빗대도 닳아버린/ 세상에// 예감-/ 꼭 무슨 기별이 올 것만 같은/ 마리아의/ 그때의 그 두볼.// 사랑이 아니면/ 입김이 아니면…// 몸채로의 대답이 지레 피어난 것이다."
그가 떠난지 20년. 막걸리 젖은 입술로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생전의 정석모는 주위에 애도 많이 먹였으나, 참으로 좋은 사람으로 평가한다"고 소설가 윤장근은 덧붙였다. |
---------------------------------------------------------------------------------------------------
포항 출신인 최광열은 결혼식부터 해프닝이었다. 장기곶 등대지기 딸과 결혼했지만 최광열 아버지는 그 며느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결혼식날 새 구두를 마련하지 못한 그는 신동집 시인한테 구두를 빌려 신고 혼례를 올렸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에겐 아동틱한 구석이 많았다 . 호주머니에 돈이 좀 들어있으면 아는 문인들을 대구시민회관 맞은편 청과 시장 골목 좌판 죽집으로 데려간 뒤 쭈그리고 앉아 함께 먹는 걸 즐겼다.기분이 나면 향촌동 중화요리집 양자강으로 들어가 배갈도 사주었다. 시, 소설, 수필 문학평론 등 여러 장르의 문학 작품에 손을 댔을 정도로 문 재(文才)가 남달랐던 그는 늘 “세상 소리가 듣기 싫다”면서 귀구멍을 솜 으로 틀어 막고 다녔다. 1955년쯤 ‘인간을 팝니다’란 시문집이 나왔을 때 , 그는 서점을 통하지 않고 가방 안에 책을 넣어 다니면서 직접 팔러다녔 다. P그한테 걸리면 책을 안 사고는 못 배겼다. 만만한 사람에게는 일방적 으로 책을 우송해버리고 뒤에 만나면 다짜고짜 책값을 독촉해 상대편을 황 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야행성인 그는 낮에는 거의 집에서 잠만 자고 밤이 되면 시내 다방가를 전전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주민들이 경찰에 간첩 신고를 해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도 박훈산처럼 집에 진득하게 붙어 있질 못했다. 술 취하면 길거리에서 자기도 하고 여인숙에서 아침을 맞기도 했 다. 돈이 떨어지면 무턱대고 아는 사람을 찾아갔다. 이제 세 사람은 가고 없다. 그 기풍(奇風)은 작고한 이재행 시인한테 옮겨졌다가 지금은 종로 무림식당에서 무심의 빈주(貧酒)를 들이키고 있는 취석 금동식 시인(72), 밥보다 술을 더 많이 먹는 도광의 시인한테로 모여 든 듯하다. 다음주에는 왕비다방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춘호기자leekh@yeongn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