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대구 추억기행 .51] 다방이야기<7> - 왕비다방 :: 2006/04/01 11:57

[대구 추억기행 .51] 다방이야기<7>-왕비다방
“1979년, 그리고 1980년의 이야기다. 대학에서는 현상학과 실존철학을 가르쳤고 우리는 그것이 아닐거라고 회의하던 시절이었다. 중략 왕비, 정 확한 이름은 커피숍 왕비. 2층에 기성세대, 어둡고 칙칙한 3층은 20대 청 춘. 2층을 통과해야 3층이 나온다.”

소설가 박일문의 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 ‘왕비 를 아십니까?’의 초입부 발췌문이다. 훗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장 편소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박일문은 중앙로 코리아백화점(현재 옆에 있 던 송죽·자유극장과 함께 보세의류 전문매장으로 변했다) 옆 왕비다방 3층 에서 그 소설을 구상했다. 당선 당시 한 선원에서 구도행을 걷고 있었던 박일문 역시 그 다방 단골이었다.

왕비는 60년대와 80년대 다방문화의 가교 역할을 했다. 70년대 중반쯤, 무랑루즈 등 60년대 유명했던 예술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던 고풍스런 다방들도 고급 시설을 앞세운 세련된 젊은이 취향의 다방군에 밀려 하나둘 자취를 감추게 된다. 갈 곳이 마땅찮았던 예인들을 향해 왕비가 러브 콜 을 보낸 것이다. 기인 박훈산 시인은 말할 것도 없고 노산 이은상 시인도 대구에 오면 여기서 사람을 자주 만났다. 계명대 음대교수 이강일, KS대 구방송총국 PD를 역임했던 이재진 시인, 문예지 죽순의 산파역이었던 고 이 윤수 시인, 김원중 시인 등 지역 예인이라면 거의 이곳을 한두번 거쳐갔다.

왕비다방 시대를 열었던 여주인 김옥주씨(57). 수소문 끝에 그녀가 96년 파동에 C한정식을 오픈, 한정식의 신지평을 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 다.

그녀는 76년쯤 도산직전의 호다방을 인수해 왕비로 재탄생시켰다. 70년대 초, 대구엔 이미 티켓영업이 이뤄지고 있었고 매상을 올리기 위한 얼굴 반 반한 레지들이 돈많은 손님들을 유혹하는 게 당시 다방가의 대표적 풍속도 로 자라잡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방 시장조사를 위해 대구백화점 근처의 한 다방에 들어갔을 때 레지가 그녀를 본체 만체 하는데 큰 충격을 받았 다.

대낮에 2명의 레지한테 둘러싸여 커피 값을 날리고 있는 남성들의 변질 된 낭만문화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여성들을 깍듯하게 대접하는 파 격적인 영업전략을 수립한다.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 원칙을 고수했다. 비슷한 또래의 손님이 들 어오면 여성한테 먼저 주문하고 커피도 여성한테 먼저 주었다. 제대로 대접 받고 있지 못하는 여성들을 최고를 모신다는 취지로 다방 이름까지 ‘왕비 ’로 정했다. 커피잔도 좀 특별난 걸로 구입했다. 남성용은 좀 투박한데 비해 여성용은 당시 최고급 커피잔으로 평가받고 있던 행남자기 브랜드로 정했다. 영국의 한 궁성 식탁에 어울릴 만한 아이보리 바탕에 양각 문양이 우아하면서도 귀품이 느껴졌다. 왕비는 일그러진 ‘레지 문화’도 고쳐나갔 다. 남자손님이 레지를 불러도 절대로 손님자리에 앉아서 매상을 올리지 못 하도록 특별교육을 시켰다. 짧은 치마도 입지 못하게 하고 신발도 운동화로 통일했다.

다방은 역시 커피맛. 당시 유행이었던 레귤러 커피에 도전장을 낸다. 커피 콩을 직접 갈아 사이펀으로 원두커피를 빚었다. 게다가 주간 스페셜 커피 시스템도 도입했다. 월요일에는 콜롬비아, 화요일에는 모카, 수요일에는 아메리칸 브랜드 식으로 매일매일 커피 종류를 바꿔나갔다. 왕비에 가면 제대로 된 다양한 커피를 맛 볼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커피 마니아들이 왕비로 몰려들었다. 동서식품 맥스웰 본사가 그 소문을 듣고 직접 왕비를 챙길 정도였다.

왕비의 영업전략은 제대로 적중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고 개업 1년만에 한개 층을 더 올렸다. 박일문의 소설에서처럼 2층은 늙은 손님들, 3층은 대학생 등 젊은이들의 공간이었다. 장사가 너무 잘 돼 한 달 번 돈으로 당시 비산동의 13평형 아파트 한 채를 구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왕비는 예인들과의 동거시대를 끝내고 당시 붐이 일기 시작한 음악다방 붐에 가세하기 위해 대구백화점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왕비의 전통은 79년 쯤 대백에서 중앙파출소로 가는 길 오른편 아세아 다방으로 옮겨간다. 아세 아 시절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80년대 민주화의 봄, 그리고 연일 계속되 는 시위와 이를 진압하려는 체류탄의 난무 속에 문을 열고 닫았다. p내부 인테리어도 젊은이 취향으로 개조했다. 의자도 안락형에서 직각형으로 만들었 다. 자연 나이든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아세아는 그게 가슴 아파도 젊은이를 택했다. 이때부터 프리섹스적 흐름이 대구 도심지에 상륙하게 된다 . 예전에는 연인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런데 80 년 초입으로 접어들면서 다정하게 붙어 앉아 가벼운 키스와 포옹 등 적극 적인 애정표시도 서슴지 않았다. 왕비의 맥은 아세아 다방에서 2년 정도 머물다가 81년쯤 대백에서 동아양봉원 가는 길에 있었던 클래식 전문 다방 예전으로 이동한다. 예전은 7년여간 대구 다방문화에 몇가지 기여를 한다. 우선 음악시설 수준을 녹향과 하이마트 등 음악감상실 수준으로 업그레이 드했다.

당시 대구에는 음악다방 붐이 일었다. 심지어 3공단내 다방에서 뮤지박 스를 설치할 정도였다. 거금을 들여 현악파트 사운드를 잘 뽑아내주었던 탄 노이 스피커를 들여놓았다. 게다가 별도의 차 실을 마련해 당시 지역에선 드물게 전통차까지 맛 볼 수 있게 했다. 예전은 당시 일반인들한테 외면 받았던 전통차를 커피숍 안까지 끌고온 것이다. 좋은 사운드에 걸맞게 종업 원의 품격도 높였다. 엄격한 면접을 통해 대학교 재학생만 아르바이트생으로 기용했다. 물론 음악도 당시 유행하던 일반 팝송은 멀리하고 정통 클래식 곡만 엄선했다. DJ도 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새 곡이 흘러나올 때마 다 분필로 곡명과 작품번호까지 친절하게 칠판에 적었다. 그런 음악적 분위 기 탓인지 공연차 대구에 왔던 테너 엄정행이 당시 KS대구방송총국 박연옥 아나운서의 즉석 소개로 손님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제 그런 추 억담도 동성로 거리에선 접할 수 없게 됐다. 80년대 후반까지 그 많던 다 방들은 의류·휴대폰·패스트푸드점한테 점령되고 말았다. 다방시대가 끝난 듯 했다. 그때 그 왕비다방은 어떻게 됐을까? 40년 전에 지어진 4층 건물은 무너질 듯 퇴락해 있었고 2층은 잠시 미장원을 거쳐 지금은 철학관으로 변해 있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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