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29] 달성공원 옛 일제 신사(神社)의 흔적. 등롱(燈籠) 답사. :: 2006/03/3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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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60주년이다. 오는 8월 15일까지 대구지역 곳곳에 배여 있는 일제잔재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취재해 5~6회 정도 싣고자 한다. <필자 주> <1>달성공원 ![]()
“1906년, 11월. 달성공원. 나이 어린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1학년들도 이곳에 설치된 신사 앞에서 허리를 숙여야 했다. 매월 2회 꼴로 20~30리길을 걸어서 참배를 해야 했고 발가락이 부르트면 상급생 등에 업혀서라도 이곳을 방문해야 했다.” 4월말 문화관광부 광복60주년기념 문화사업추진위원회에서 제공한 일제하 신궁, 신사는 총 1141곳이다. 이중 대구경북권을 보면 신사 6곳(대구, 김천, 포항, 안동, 경주, 울릉도)과 경주 등지에 설치된 작은 신사 46곳이었다. 그 중 대구신사는 1906년 현재 달성공원 자리에 건립되었다. 대구시 중구청에서 발행한 <달구벌의 맥. 1990>은 “1905년, 일본 수비대장 야마다 중위 등은 달성공원에 표목을 세워 황조요배전(皇祖遙拜殿) 건립터를 정한 후 1906년 11월 봉헌식을 했다. 이때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 1,500명이 신사건립을 위해 2천 5백여원을 기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달구벌의 맥>에서는 “대구시민들은 일제 총칼에 못 이겨 억지 참배를 했지만,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도리이(島居 ; 신사앞에 세워둔 돌문)를 부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해방 된 이후, 대구신사는 단군을 모시는 한 집단이 운용하게 된다. 일본 신을 모신 그 곳에 단군 신을 모시는 모순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대구신사는 우여곡절 끝에 1966년에 완전 철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이 물러간 ‘대구신사’, 단군신을 모시다
적고 있다. “대구시는 66년 8월 13일 새벽 기습적으로 달성공원 안의 구 신사 건물을 헐었다. 이날 정오 이른바 천진전 안의 단군성조를 모신 제단 및 제물 등 일체의 도구가 철거되었으며, 본전을 둘러싼 건물들이 밧줄로 묶여 당긴 그레이더의 힘으로 무너졌다. (중략) 이날 철거에 앞서 대구시는 단군숭봉회측과 약 3시간 회담하여 합의철거를 모색했으나 숭보회 측이 숭봉회 건물과 부속 건물을 달성공원 안에 지어 달라, 담장을 쌓아 달라는 주장을 꺾지 않아 결국 교섭은 결렬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대구시에 의한 철거를 단행한 것이다.” 달성공원, ‘등롱’(등의 받침)으로 추정되는 흔적 남아있어
이양 받은 대구시가 1966년부터 일대를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성공원 향토역사관 2층 배드민턴장에는 신사 흔적으로 추정되는 작은 돌조각이 남아 있다. 지난 2일, 달성공원을 찾았다. 달성공원 향토역사관 학예연구사 변성호씨는 “신사 주변의 조형물 중 등의 믿밭침(등롱)으로 추정된다”라며 "‘海野武南’(해야무남)을 일어로 바꾸면 ‘우미노다께오’다. 신사 건립자금은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 1500명이 2천 5백여원을 거두었으므로 아마 ‘우미노다께오’는 기부자 중 한명일 것 같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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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로 쪽에서 달성공원 정문을 바라본 모습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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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 향토박물관 동편 야외 2층입니다. 족구장 등의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면 연두색 빗자루 근처에 장기알 모양의 돌이 보이는데, 저것이 일제시대 신사의 흔적인 석제등롱(石製燈籠; 돌로 만든 등받침)입니다.

100여년에 가까운 세월과 배일(排日)문화 속에서도 용케 살아 남았습니다. 현재 알려진 단 하나의 달성공원 신사 흔적이라고 하네요.

좀 더 가까이에서 본 모습. 지름은 약 80cm 정도, 높이는 약 20cm 정도인것 같습니다. 꽤 무거워 보입니다.

"海野武男(우미노 타케오)" 라는 일인의 이름의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 서두의 신문기사에는 "海野武男" 글자만 언급되어 있는데, 반대편에 "岡山縣人" 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더군요. 이 "岡山縣人" 이라는 말은 "海野武男" 가 일본의 지방중 하나인 오카야마현(岡山縣) 출신이라는 뜻인듯 합니다.

두 글자들 사이 부분입니다. "原", "竹", "事" 따위의 작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등롱의 윗면입니다. 가운데 부분은 거칠게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몇군데 조금씩 시멘트가 묻어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 돌이 원래 어디에 어떤 형태로 놓여있었는지, 언제 누구에 의해 이 자리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뭏든 "구석으로 쫓겨났다"는 표현이 적당해 보입니다.

"타케오" 글자의 클로즈업. 마모 상태는 아직 양호해 보입니다.

아픈 과거의 흔적이긴 하지만, 기왕 지금까지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단 하나의 증거이니 모쪼록 무관심 속에 속절없이 파괴되지 말고 한쪽 구석에서나마 옛 수난 역사의 상징물로서 살아남아 주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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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옥(pressangel)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