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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진 대구읍성 성돌을 모읍니다. (1) | 2008/02/13
- [매일춘추] 대구읍성 재조명 | 2008/02/13
- 앞산에서 내려본 대구 모습 비고 - 1970년대와 2007년 (3) | 2007/10/15
- 대구 달성공원 북편 피난민촌 산뜻한 공원 변신 | 2007/06/19
- 대구의 사직단(社稷壇)은 평리동에 있었다. (2) | 2007/06/19
- [영남일보/2007.06.17] 원형설계도 잃은 '망경루' 복원 난감 | 200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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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예찬 (출처: now and then / http://blog.empas.com/ho2994) (1) | 2007/04/12
- [대구매일신문] [20세기의 추억] ⑩전북지역의 日帝 (5) | 2007/03/26
흩어진 대구읍성 성돌을 모읍니다. :: 2008/02/1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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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성 성돌 모아 모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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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離散의 恨
일제때 강제해체, 매립 등 뿔뿔이 흩어져
시민캠페인 전개…성곽로 재현 사용키로
"흩어진 대구읍성 성돌을 모읍니다." 대구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대구읍성 성돌모으기 시민캠페인이 전개된다.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 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캠페인은 14일부터 다음달 말까지 추진되며, 모은 성돌은 대구읍성 성곽로 재현에 사용될 계획이다. 동성로는 대구읍성의 옛 성곽로였으나 1906년에서 1907년 사이 식민지 개발을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신작로를 내면서 성곽으로서의 원형을 완전히 잃게 됐다. 추진위원회측은 "그 과정에서 성돌은 개천이나 습지에 매립되거나 근대건축물의 기초돌로 활용되는 등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대구읍성의 성돌은 계성학교와 동산의료원, 제일교회 등 근대건축물의 기초돌로 쓰였으며, 일부 가정에서도 정원석 및 담장석 등으로 활용되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이번 캠페인을 통해 흩어진 성돌을 기증받아 동성로 공공디자인개선사업의 하나인 '한일극장~대구백화점 본점간 대구읍성 성곽로 재현'에 사용할 것"이라며 구체적 활용방안을 밝혔다. 한편 중구와 추진위원회는 14일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이달 중 대구약령시 소공원에서 성돌기증식을 갖고 대대적인 시민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다. ◇ 대구읍성 최초의 대구읍성은 토성이다. 임진왜란 2년 전 왜구 침략에 대비해 만들어졌지만 불행히 임진왜란 때 파괴돼 없어졌다. 영영축성비에 따르면 이후 대구읍성은 1736년 경상도 관찰사 민응수의 건의로 둘레 2천650m, 높이 5.6m, 두께 8.7m 규모의 석성 형태로 세워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읍성에는 남문 영남제일관(남성로), 서문 달서문(서성로), 동문 진동문(동성로), 북문 공북문(북성로) 등 4대문이 있다. 군사목적으로 한차례 중수한 대구읍성은 1906년 관찰사 서리 박중양에 의해 철거된 뒤 당시자료와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상태다. |
[매일춘추] 대구읍성 재조명 :: 2008/02/13 10:04
| [매일춘추] 대구읍성 재조명 | |||
대구읍성은 조선 영조 13년(1737)에 축성되었으나, 1906,7년 철거된 이후 성터에 대한 내력이 당시의 자료와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고 있는 상태이다. 1888년 대구를 찾은 프랑스의 지리학자 샤를 바라의 기행문을 보면, 대구읍성은 한 폭의 그림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우며 중국의 북경성처럼 위용이 대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샤를 바라는 “둥근 길을 따라 쌓인 성벽이 북경성을 축소한 것과 같다.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고, 사방 성벽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성문의 정자에는 옛 역사를 나타내는 그림과 조각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곳에서 가을 햇볕아래 찬란한 색채를 빛내며 전원을 휘감아 흐르는 금호강의 낙조를 지켜보았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민들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고, 양반들이 사는 중심부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샤를 바라, 성귀수 역, 조선기행, 2001, 눈빛)라고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는 대구읍성을 중심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읍성의 규모는 성벽 600~700m, 둘레 2,680~2,700m, 여장을 포함한 높이 4.5~5.6m, 폭 8m 내외로 추정된다. 성곽의 사방에 진동문, 달서문, 남문(영남제일관), 공북문이 있었고, 성벽의 동서에 한 개씩의 돌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찰사 감영이 지금의 경상감영공원 자리에 있었고, 업무를 보던 선화당과 징청각, 유치장, 객사와 육방관사, 대구부사가 중부경찰서와 종로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점에서 대구읍성을 재조명하는 것은 바로 대구읍성이 문화 창조도시를 지향하는 대구의 전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적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구를 영남의 전통적 중심도시라고 말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흔적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대구읍성의 재현은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외래 방문객들에게 대구의 참모습을 소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에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최근 20~30여 년간 문화자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전개되었던 대구의 도시개발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앞으로 다시 지금과 같은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최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대구 도심 재창조'의 밑그림을 그리면서 대구읍성 등과 같은 전통문화자원의 재현이나 다각적인 활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서인원(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 |||
앞산에서 내려본 대구 모습 비고 - 1970년대와 2007년 :: 2007/10/15 21:35
앞산 케이블카 종점 전망대에서 1970년대 언젠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대구 남구, 달서구 방향 사진입니다.
가운데의 산은 두류산이며, 호수는 성당못입니다. 사진에서와 같이 달서구와 남구는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았거나 시가지 조성 초기 단계라 황량한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도로도 아직 비포장입니다.
[ 출처 :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 풍경(도시)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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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4일에 위 사진과 거의 동일한 지점인 앞산 케이블카 전망대에서 제가 직접 Nikon D70s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했던 사진입니다. 우연히 위 사진과 프레임이 비슷하더군요. 1970년대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뭐라 말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사진을 클릭하셔서 큰 원본 사이즈로 보시기 바랍니다)

대구 달성공원 북편 피난민촌 산뜻한 공원 변신 :: 2007/06/19 22:47
* 출처 : 경북일보 2007.06.09


대구의 사직단(社稷壇)은 평리동에 있었다. :: 2007/06/19 22:34
* 출처 : 대구광역시 서구청 홍보지 [서구광장] 2007년 6월호
--- 아래 그림을 클릭해서 크게 해서 보세요 ---

[영남일보/2007.06.17] 원형설계도 잃은 '망경루' 복원 난감 :: 2007/06/19 22:14

달성공원 동물원 화원유원지로 이사 :: 2007/05/1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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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청, 도심활성화 추진
最古 토성'史蹟달성'복원
40년 가까이 대구·경북민들의 사랑을 받아 온 달성공원 동물원이 달성군 화원동산으로 이전된다. 대구 중구청이 마련한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준비를 위한 도심활성화 프로젝트'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년 동안 총 110억원(국비 57억원, 시비 53억원)의 예산을 들여 국내 최고(最古) 토성인 달성공원을 '사적 달성'으로 복원한다. 이에 따라 달성공원에 있는 동물원을 화원유원지 내 화원동산으로 이전한 뒤 매장문화재 발굴, 주요 유적에 대한 복원 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중구청은 또 공원 안에 있는 향토 역사박물관을 확충, 대구의 역사와 시대별 풍속 및 역사 자료를 전시하며 고증을 거쳐 고대∼근세에 걸친 시대별 주거 형태를 재현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4천㎡ 규모의 전통 민속놀이 동산을 조성한다. 중구청이 이처럼 동물원 이전을 통한 달성공원 복원에 나선 것은 달성서씨 세거지, 경상감영 등 대구의 역사를 간직한 달성공원이 동물원과 함께 있어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고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구청은 사적 달성이 복원되면 전통 깊은 영남행정의 중심지 대구 위상과 시민 자긍심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관광과 연계한 문화재 보전을 통해 도심 균형발전은 물론 지역 상권 활성화에도 한 몫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구청 관계자는 "사적 달성이 문화유산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외국 관광객 유치 및 도심 상권을 살리기 위해서는 동물원 이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이같은 계획을 수립했다"고 말했다. 달성공원 동물원은 1969년 달성공원 개장과 함께 들어서 현재 14개 동으로 구성돼 있으며, 포유류 26종 80마리, 조류 52종 346마리, 어류 1종 837마리가 있다. 하지만 개원 이후 사적지라는 특성으로 인해 건물 신축이 불가능해 보유 동물의 종류와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다른 지역에 대규모 동물원이 생기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부터 전국적인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
달성공원, 서신로, 미싱골목 :: 2007/05/07 22:41
(출처: http://blog.empas.com/ho2994/read.html?a=19566001)

대구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자료들을 볼 수 있는 개인블로그, 홈페이지들이 인터넷에 많이 있습니다. 개인이 소장한 사진들도 있고 어렵사리 외국에 나가서 발견한 자료나 혹은 인터넷이나 책자를 통해 찾은 사진 등을 다운로드를 받거나 스캐닝 하여 올린 자료들이 바로 그것 입니다.




이 길이다. 국민학교 다닐 때 나는 늘 이골목길을 지나 다녔다. 비좁았던 이 골목길은 내 기억에도 늘 좁고,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웠던 길이었다. 점포 밖 길가에 까지 기계나 공구들을 잔뜩 내놓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데 불편을 끼치긴 했지만 다들 당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불평 한마디 없이 다녔던 길이다. 먹고 사는 일에는 너도나도 이해 해주고 참아주던 당시 인심이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길바닥은 그땐 늘 더러운 구정물이 흥건히 괴어 있었다. 비가 많이 오기라도 하면 여기저기 아스팔트가 패인 구덩이에 괴인 흙탕물이 튀어 신발이나 바지가랑이를 더럽히곤 했다. 그 때는 그 길에 온통 사람과 삼륜차, 짐 자전거, 리어카 등이 뒤엉켜 혼잡하기도 했거니와 철공소 같은 곳에서는 쇠를 깎아내는 소리, 모터 돌아가는 소리 등 골목길이 온통 소음으로 뒤덮이기도 했다. 사진에서 왼쪽 붉은색 건물(서울미싱)은 목욕탕이 있었다. 일년에 몇번 안하는 목욕을 이곳에서 하고 이발소가 이층에 있어서 이발에 면도까지 했다. 비산동집은 국민학교부터 고교시절까지 살았으므로 고교때 수염이 거뭇거뭇 났던 난 이 목욕탕 건물에 딸린 이발소에서 면도사 아가씨의 능숙한 면도솜씨에 늘 감탄하며 이곳을 이용했다.
헌책예찬 (출처: now and then / http://blog.empas.com/ho2994) :: 2007/04/12 15:33
요즘 세상에는 오래된 물건이 가치를 발휘하는 시대가 되었다. 말하자면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다. 지금 당장 우리집을 뒤져봐야 사실 변변한 골동품 하나 나올 건덕지는 없다. 이런 경우 조상 탓을 해야할른지는 몰라도 '진품 명품'이란 TV 프로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왜 내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저런 골동품 하나 없는지.. 꼭히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지만 최근 헌 책을 몇 권을 손에 넣었다. 실은 인터넷을 통해 구매를 한 것이다. 요즘은 컴퓨터를 만지다 보면 참으로 편리해진 세상이 된게 실감이 난다. 인터넷을 뒤지니 없는 게 없다. 고물도 인터넷으로 파는 시대니 말이다. 헌책방 사이트를 몇날 며칠 뒤지고 뒤진 끝에 헌 잡지를 한 10권 정도 샀는데 알고보니 헌 잡지라는 것이 물건이 거의없는 사실상 품귀상태였다. 예전에는 집 구석구석에 마다 부모 몰래 보다 버린 주간지들이 발에 차일만큼 많아 내다버리기까지 했던 선데이서울, 주간경향 같은 주간지는 물론이고 여성동아나 주부생활, 여원 같은 여성지까지 서울시내에서 알아줄만한 헌 책방 모두에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골동품의 가치척도는 '희귀성에 있다고 했던가. 귀할수록 값어치가 올라가는 이치로 따진다면 이런 잡지류를 입수한 일은 참으로 잘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련의 행위를 주시하는 마누라의 시선이 상당히 따갑게 뒤통수에 꽂힘을 감지한다. 누렇게 쩔어빠지고 쥐가 갉아먹은 곳이 군데군데 있는 퀘퀘묵은 주간지 나부랭이를 권당 무려 4000원씩이나(월간지는 10000원)주고 사다 모은 작태가 이쁘게 보일리 없었을것이다. 오래 묵은 책을 단지 '값이 오르겠지'하는 기대감으로 사 모은다면 인간이 얼마나 추해지고 삶이 피곤할까. 사실 나의 경우는 묵은 책의 행간을 읽는 취미를 붙이다보니 그 재미가 훨씬 더 쏠쏠하기 때문인것이 더 큰 이유다 .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50~60여년전으로 돌아간듯한 느낌으로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삶이나 사건 속에 들어가 보는 간접적인 체험의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컨데 명동 중앙우체국 건물울 신축하는 앞길을 지나면서 내가 책에 실린 사진에서 보았던 일제강점기에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걸어다니던 옛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들이 밟던 지나던 골목길이나 신작로를 내 발로 직접 걸어다녀보거나 예컨데 옛 사람들이 걸터앉은 시청 혹은 신세계앞 한국은행 앞 계단이나 난간을 나 역시도 꼭 그 모습대로 걸터앉아 옛날사람들의 체온을 느껴보는 것이다. 오래되어 빛 바랜 사진에서 본 장소와 지금의 그 곳을 비교해보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줄은 몰랐던 것이다.
[대구매일신문] [20세기의 추억] ⑩전북지역의 日帝 :: 2007/03/26 11:19
| 곳곳 탐욕·수탈 흔적…영화속 눈 익은 촬영지 | |
전북 지역은 자연환경과 생활조건에선 경상도 지역과는 좀 다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야, 낮은 구릉, 평화롭고 한가로운 농촌마을... 경북에서 지겹도록 산과 접하다 확 트인 평야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후련해진다. 전주→김제→익산→군산을 오가면서 지난 세기의 흔적들을 적잖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저 지나간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가슴 아픈 것들이 많았다. 오직 우리의 쌀을 뺏아가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시설과 건물들이었다. 그위에 일본인들은 성(城)과 같은 거대한 집을 지어놓고 호사를 누렸다. ▶곳곳에 널려있는 수탈의 흔적="10년전만 해도 군산은 한집 건너 일본집이었어요. 요즘 많이 헐렸지만 그래도 꽤 많지요." 김정삼(56.군산시 소룡동)씨는 "아직까지 일본 잔재가 남아있는 것은 도시 발전이 없기 때문"이라며 "요즘 군산은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영화의 촬영지로 인기를 끌 뿐"이라며 씁쓰레했다. 내항에서 걸어 10분 거리인 월명동, 신흥동에서 일본 가옥은 대충 헤아려도 100채가 넘을 듯 했다. 물론 원형 그대로는 남아있지 않고 개조·변형되긴 했지만 한눈에 오밀조밀한 일본식 가옥임을 알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보존상태가 완벽한 신흥동의 히로쓰 가옥이다. 예전 포목상인 히로쓰와 대한제분 사장이 살았던 집인데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 2채와 널다란 정원에 큼직한 석등이 놓여있다. 영화속에서 가끔 만날 수 있는 집인데 '장군의 아들' '타짜' 등을 찍었다. 타짜에서는 주인공인 조성우가 백윤식에게 노름을 배우러 갔다가 이 집의 자그마한 쪽문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군산은 일제가 만든 계획도시였다. 옥구군에 달린 조그마한 포구에 지나지 않던 군산이 1898년 강제 개항되면서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서 생산되던 곡물 집산지가 됐다. 내항 앞에는 예전 군산세관으로 쓰던 붉은 벽돌의 건물이 있는데 이곳의 이름은 장미(藏米)동이다. 동네이름으로 '감출 장'에 '쌀 미'라는 한자를 쓰는데서 보듯 예전 이 일대는 온통 쌀 천지였을 것이다. 현재에도 내항 부근에는 일본으로 실어가기 전에 쌀을 보관하던 낡고 큼직한 창고가 여럿 남아 있어 한때의 영화(?)를 보여준다. 옛 세관건물에서 50m쯤 내려오면 큼직한 은행건물이 보이는데 예전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다. 한때 카바레, 노래방으로 쓰이다 지금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건물이 됐다. 1차대전때 인질로 잡힌 독일인이 설계하고 1923년 중국인들이 공사를 했는데 여러 차례의 개조공사에도 불구하고 외양은 여전히 장엄했다. 쓰레기로 채워진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건물도 늙고 병든다고 하지만 이렇게 초라하게 변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교 뒤편에 가면 좀처럼 보기 힘든 건축물이 있다. 군산지역 대지주였던 시마타니가 1920년대에 지은 금고 용도의 건물이다. 3층의 콘크리트 건물로 입구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두꺼운 철제금고 문이 달려 있고 창문에는 단단한 쇠창살과 철판이 박혀있다. 시마타니가 현금, 서류는 물론이고 인근에서 마구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남을 믿지 못해, 도둑이 들까봐 다른 나라에서 빼앗은 귀중품을 별도 건물에 몇겹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보관했으니 인간의 집착과 탐욕이 과연 어느정도까지 이를 수 있을지 짐작케한다. 금고 옆에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발산리 석등(보물 234호), 고려시대 작품인 5층석탑(보물 276호), 돌석상 등 20여점의 유물이 있는데 이것도 시마타니의 수집품이다. 해방후 그가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해 보존될 수 있었다. 군산, 김제 등에 150만평이 넘는 토지를 갖고 있던 시마타니는 해방 후에도 농장을 지키려고 한국 귀화를 주장하다 좌절되자 귀국길에 올랐다고 한다.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에도 일본인들의 탐욕을 엿볼 수 있는 가옥이 한채 있다. 2층 건물로 1940년대에 지어진 큼직한 일본식 집이다. 예전 일본총리를 지낸 호소가와의 아버지 소유였는데 일본인 마름(토지관리인)이 살았던 곳이다. 500평 가까운 널찍한 대지에다 집 외관은 나무판자를 잇대놓아 마치 일본식 성곽을 보는 듯 했다. 주민 최기상(86)씨는 "이 동네엔 일본인 대지주 2명과 마름들이 살았는데 이 일대는 물론이고 익산, 김제 등에도 땅이 많았다."면서 "일본인 지주들은 한국인에게 그냥 빼앗다시피 헐값으로 땅을 사들여 대지주가 됐다."고 회고했다. 최씨의 아들인 석창(58)씨는 "일제 잔재를 과연 문화재로 보관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제가 남겨놓은 흔적을 들러보면서 아이들과 함께 한번쯤은 전북 지역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역사체험에 이만한 것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글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