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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2] 대구박물관 견학 (2/2) :: 2006/03/3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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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2] 대구박물관 견학 (1/2) :: 2006/03/30 16:05

일요일 오후에 대구박물관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달성고분군 37호분의 모형을 견학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볼 것이 많았습니다. 특히 각종 다양한 실물 유물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달성공원 향토역사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거의 다 '복제품' 이란 표시가 되어 있어서, 실물은 어디 있는지 궁금했는데 이곳에 있더군요. (예를 들어 37호분 출토 금동관) 그외 장대한 스케일의 모형도 훌륭했습니다.


대구박물관 안내판



기념품 판매대



박물관 중앙홀



상고시절 생활모습 모형.



대구 비산동/내당동 달성고분군 37호분에서 1923년 출토된 금동관 실물입니다. 자세히 이모저모를 관찰해보면 1300여년전 이 금동관을 만든 장인의 손매무새와 정성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얇은 동판을 가위로 자르고 구부리고 정교하게 이어붙여 만든 금동관의 자태는 세월을 넘어선 신비감까지 느껴졌습니다.



역시 37호분에서 출토된 횃불꽂이.



기대하던 37호분 모형입니다. 봉분 전체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약간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마치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보는듯해서 인사적이었습니다.










다음의 사진들은 각종 모형들입니다.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져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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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4] 이른봄의 달성공원 답사 (2/2) :: 2006/03/30 13:46




상화시비(尙火詩碑). 이 시비는 1948년 동향인 김소운의 발의 및 그가 재직했던 대륜고등학교 동문의 후원으로 달성공원에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상화시비 전면. 상화의 대표시 "나의 침실로"가 새겨져 있습니다. 아래의 시비 후면 사진을 보면, 이 시의 글자는 당시 11세이던 상화의 셋째 아들 "태희"가 쓴 것을 나와 있네요.


상화시비 후면. 비문의 상세는 아래와 같습니다.

상화 시비의 글은 문인 김소운(金素雲)씨의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詩人(시인) 李相和(이상화)는 西紀(서기) 1901年 辛丑(신축) 4月 5日 又甫(우보) 李時雨公(이시우공)의 第2子로 태어나  西紀(서기) 1943年 癸末(계말) 3月 2日 43歲(세)로 세상을 떠나니 大邱는 그 出生地(출생지)요, 終焉地(종언지)이다. 그의 詩歷(시력)은 「白潮(백조)」 同人(동인) 시대에 시작되었으니 香氣(향기)롭고 분방한 그 詩風(시풍)은 초기의 조선시단에 있어서 淸新(청신)한 一魅力(일매력)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나의 침실」을 비롯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逆天(역천) 」,「離別(이별) 」등이 있으니 碑面(비면)에 새긴 詩句(시구)는 「나의 침실 」中(중)의 一節(일절)이다. 흘러간 물의 자취를 굳이 찾을 것 아니로되 詩人의 조찰한 생애를 追念(추념)하는 뜻과 아울러 뒤에 남은 者(자)의 허술하고 아쉬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자는 생각으로 작은 돌을 새겨 여기 세우기로 한다. 戊子(무자) 正月(정월) 金素(금소) 雲識題簽葦昌(운식제첨위창) 吳世昌(오세창) 84歲書(세서) 詩句遺撚三子(시구유년삼자) 太熙(태희) 11歲書(세서) 背銘竹濃(배명죽농) 徐東均(서동균)"

해방 뒤인 1948년 백기만(白基萬), 김소운(金素雲)씨 등의 힘으로 세워졌다.


이 사진부터는 향토박물관 내부의 전시물들입니다. 조선시대에 성인 남자가 패용했던 호패들입니다.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이 사용하던 벼루와 칼입니다.



20세초 당시의 대구읍성 및 대구읍 전경을 재현한 모형입니다. 당시의 대구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대구성곽의 모습, 지금은 없어진 대구천, 계산성당, 경사감영, 성 안의 골목 등을 잘 볼 수 있습니다.





향토박물관 정문앞.

정면에 보이는 벽돌이 섞인 건물은 옛 원화여고입니다. 현재는 "달성빌딩" 이라고 부릅니다.


달성공원 정문 네거리 부근에 있는 오래되고 허물어져 가는 건물. 아마도 일제시대 때부터 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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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4] 이른봄의 달성공원 답사 (1/2) :: 2006/03/30 13:33

거창하게 답사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고, 점심을 먹고 운동도 할겸 달성공원을 한바퀴 돌아 보았습니다. 특히 대구 가 낳은 대표적 시인중 한 분인 "상화 이상화" 시인의 시비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었습니다.



달성공원 정문입니다. 평일은 이렇게 비교적 한산하지만,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는 놀러온 사람들, 장사꾼들로 시장판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붐비게 됩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상입니다.




토성위에 우뚝 솟아 있는 관풍루(觀風樓)입니다. 관풍루의 연혁은 다음과 같습니다.

1601년(宣祖 34, 선조)에 慶尙監營(경상감영) 大邱設置時(대구설치시) 宣化堂(선화당)  正南方(정남방)에 正門(정문)인 布政門(포정문)을 세우고 그 門樓(문루)를 觀風樓(관풍루)라 하였다. 樓(루)위에 북, 種(종), 저(笛), 피리(管), 나팔(喇叭)등의 풍악기구를 設置(설치)해 놓고 밤 10시에 閉門(폐문), 새벽 5시에 開門(개문)하는 풍악을 시행하여 이 풍악을 듣고 東西南北(동서남북) 四城門(사성문)을 開閉(개폐)하는 절차를 엄숙히 거행하였다 하여 一名(일명) 閉門樓(폐문루)라고도 하였다. 觀風樓(광풍루)라 함은 監事(감사)가 樓(루)위에서 세상을 살핀다 하여 이름 지어졌다 한다. 監營(감영)으로 들어가는 절차는 觀風樓(광풍루)하나만 거치는 것이 아니라 外門(외문)격인 홍살
문이 따로 있어 2개의 문을 거쳐야만 했으나 홍살문(紅門, 홍문)에 기록이 없다. (광풍루)는 4개의 기둥 사이에 3개의 대문이 달려 있었다 한다.  達成公園(달성공원) 북쪽 언덕에 있는 바  이는 1906년 당시 觀使(관찰사)였던  朴重陽(박중양)이 大丘邑城(대구읍성)을 철거할 때 몸체만 그대로 옮긴 것으로 정면 4칸, 측면2칸에 2층 맞배지붕이다.




관풍루에 왠 어울리지 않는 캐비넷이...





토성 위에서 북구쪽을 본 모습. 아래의 도로는 달서천을 복개한 도로입니다. 멀리 대단위 아파트군은 북구 칠성동, 침산동의 아파트 단지입니다.



멀리 보이는 고층 아파트는 북구 칠성동 옛 대한방직 공장 부지에 세워진 대우 푸르지오 1차 주상복합 아파트입니다. 2005년 늦가을에 입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고층아파트는 침산동 오봉오거리 모퉁이에 위치하는 침산태왕리더스 아파트입니다.



토성의 북편 아래 비산동 동네. 토성 아래에 나무 뒤로 보이는 길다란 경사진 공터는 원래 6.25 후 피난민들이 살면서 생겨난 무허가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2005년 연말부터 보상 및 철거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시민공원 시설물이 들어설 예정이라 합니다.



토성길. 비가 올 때는 토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토성 출입을 삼가해달라고 합니다.


토성에서 원대동 쪽으로 본 모습입니다. 중앙에 보이는 넓은 도로는 달서천 복개도로로서, 수십년 전에는 속칭 "305번지" 라고 불리우던 사창가가 이 도로 위에 빽빽히 밀집해 있었다고 합니다.



토성길. 달성 토성은 북동쪽이 다른곳보다 높습니다. 토성이 높아지면서 길에도 오르막과 계단이 나타나지요.



토성 계단.


토성 안팎 경사면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귀하고 오래된 나무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여름에는 잎이 우거져서 바깥쪽이 거의 안보일 정도입니다.



토성에서 바라본 비산동.






수목이 우거진 토성길.



물개사. 물개는 헤엄을 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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