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구 중구청, 도심활성화 추진
最古 토성'史蹟달성'복원
40년 가까이 대구·경북민들의 사랑을 받아 온 달성공원 동물원이 달성군 화원동산으로 이전된다. 대구 중구청이 마련한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준비를 위한 도심활성화 프로젝트'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년 동안 총 110억원(국비 57억원, 시비 53억원)의 예산을 들여 국내 최고(最古) 토성인 달성공원을 '사적 달성'으로 복원한다. 이에 따라 달성공원에 있는 동물원을 화원유원지 내 화원동산으로 이전한 뒤 매장문화재 발굴, 주요 유적에 대한 복원 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중구청은 또 공원 안에 있는 향토 역사박물관을 확충, 대구의 역사와 시대별 풍속 및 역사 자료를 전시하며 고증을 거쳐 고대∼근세에 걸친 시대별 주거 형태를 재현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4천㎡ 규모의 전통 민속놀이 동산을 조성한다. 중구청이 이처럼 동물원 이전을 통한 달성공원 복원에 나선 것은 달성서씨 세거지, 경상감영 등 대구의 역사를 간직한 달성공원이 동물원과 함께 있어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고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구청은 사적 달성이 복원되면 전통 깊은 영남행정의 중심지 대구 위상과 시민 자긍심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관광과 연계한 문화재 보전을 통해 도심 균형발전은 물론 지역 상권 활성화에도 한 몫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구청 관계자는 "사적 달성이 문화유산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외국 관광객 유치 및 도심 상권을 살리기 위해서는 동물원 이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이같은 계획을 수립했다"고 말했다. 달성공원 동물원은 1969년 달성공원 개장과 함께 들어서 현재 14개 동으로 구성돼 있으며, 포유류 26종 80마리, 조류 52종 346마리, 어류 1종 837마리가 있다. 하지만 개원 이후 사적지라는 특성으로 인해 건물 신축이 불가능해 보유 동물의 종류와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다른 지역에 대규모 동물원이 생기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부터 전국적인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
| "일제잔재 다시 보고 민족운동 바로 알자" | |
| 대구 식민지 흔적 지도에 표시 '신택리지' 내달 발간 | |
문화예술시민단체인 거리문화시민연대는 다음달 20일 대구 도심의 문화 역사 지도인 '대구신택리지'를 내놓는다. '신택리지'는 민간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의 전통 공간과 근대 건축물, 고택과 종택, 테마골목, 역사거리 등을 총 망라한 생활사지도. 지난 2001년부터 6년여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고 2천여 명의 인터뷰와 답사를 통해 완성한 대작이다. 특히 신택리지는 중구 달성공원에 남아있는 일본 신사의 밑받침돌과 대구 최초 수도시설인 수도산 대봉배수지, 1천여 채에 달하는 일제시대 가옥 등 알게 모르게 지나갔던 식민지 시기의 잔재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권상구(34) 거리문화시민연대 사무국장은 "현재 도심에 남아있는 거의 모든 일제의 흔적들을 지도에 표시했다."며 "잔재라는 이유로 무조건 없애기보다는 현재 경관을 보존하고 리모델링해서 새로운 문화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3·1운동의 역사적 현장을 현대에 되살리려는 민간 차원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지역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한백청년회는 벌써 올해로 8년째 3·1운동을 기념하는 '횃불행진'을 벌이고 있다. 또한 전재규 동산 교육역사박물관 명예관장(계명대 의대 명예교수)은 최근 계성학교에서 대구제일교회로 이어지는 3·1운동길과 중구 계산동 이상화 고택을 잇는 문화거리를 만들자는 제안서를 대구 중구청에 내기도 했다. 지역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계산동 일대와 3·1운동의 맥을 잇는 벨트를 구성, 문화적 중심지로 키우자는 것. 이와 관련, 중구청은 3·1절인 1일 오전 기념행사를 마치는 대로 직원 200여 명과 함께 3·1운동길과 3·1운동 역사박물관을 찾아 지역의 3·1운동 역사를 듣고 독립만세를 부를 계획이다. 전 관장은 "시 차원에서 3·1운동길을 원형으로 복구하고 문화거리에 이상화, 현제명의 시비를 세우는 등 역사적 의의를 재정립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역의 근대 초기 자본가들을 재조명하려는 학계의 움직임도 일고 있다. 대구·경북에서 활동했던 대부호들의 자본 축적 과정과 성격, 민족성, 특징 등을 정리한 연구 결과가 곧 나올 예정인 것.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일수(45) 전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올 상반기에 지역에서 가장 부유했던 대부호들에 대한 연구 결과를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정재학, 서상돈, 서병조, 이일우 등 구한말부터 을사늑약 시기까지 활동했던 근대 자본가 10여 명을 3년여에 걸쳐 연구했다는 것. 1905~1910년은 우현서루, 교남학교 등 근대 학교가 지어지고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이자 대구상의의 전신인 대구민의소가 태어나는 등 대구가 전국 계몽운동의 중심이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대구시사 등 행정당국 차원의 연구 외에 민간 연구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며 "피상적으로 이해했거나 조작됐던 당시 역사와 인물들을 재평가함으로써 지역사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라고 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
◆사회 인프라 일제가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기반 시설들은 거의 사라지고 중구 대봉동 수도산의 대봉 1호배수지와 반야월역 등 일부가 남아있다. ▷대봉배수지=대구에서 처음으로 수돗물을 공급한 곳으로 1918년 3월 중구 수도산 기슭에 세워졌다. 당시 공사비로 48만 5천 원이 들었다. 이 일대에는 배수지 1·2호기, 염소투입실, 배수지 집합정 등 건물 4곳이 남아있다. 수돗물은 당시 대구 인구 4만 명에게 1인당 801ℓ를 공급할 수 있는 양이었지만 한국인 부자와 일본인에 한정 공급된 것으로 전해진다. 염소투입실은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근대 건축물이다. ▷달성공원=조선시대 토성이었던 이곳은 1907년 일본인들에 의해 신사와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일본 정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게 됐다. 중앙 원형광장의 형태와 배치는 일본 도쿄의 우에노 공원과 거의 비슷하다. 특히 달성공원 동·서편에 심어져 있는 6만여 그루의 왜향나무(카이즈카)는 대표적인 일본 조경수로 근대 식민지 개척시대를 상징한다. ▷경북대병원 본관=대구에 남은 일제시대 건물 중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크다. 이 건물은 1933년 경북대 병원의 전신인 경북도립병원이 공립 대구의학전문학교로 바뀌어 개교하면서 현재 위치에 자리 잡았다. 한국 근대 의학교육의 역사를 보여주며 건축사적, 교육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산업은행 대구지점(중구 포정동)=1931년 지어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건물이었다. 조선식산은행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기구였으며 조선총독부 산하 최대의 정책금융기관이지만 건물만큼은 원형이 잘 보존돼 있고 건축사적 가치도 높다. ◆일본식 가옥, 학교 중구 삼덕동 일대는 일제시대 식민통치 행정기관들의 관사와 사택이 밀집되어 있었다. 2, 3층 규모의 근대건물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관사는 개인 주거용으로 많이 활용돼 아직 1천여 채나 남아있다. 전통양식과는 다른 2층 목조가옥이나 다락, 창고가 있는 복층구조의 관사들은 속칭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도 불린다. '적의 재산'이라는 뜻. 중구 남산1동 대구향교 인근의 육군관사와 삼덕동 일대 옛 공무원 관사 20여채, 부자상인 사택 등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1943년 지어진 대구삼립정공립보통학교(현 삼덕초교) 교장 관사는 약간의 수리를 거쳐 현재 YMCA 미술관인 빛살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상인들의 건물도 적지 않다. 1935년 지어진 중구 북성로 2가 삼국상회(현 대원석유)와 1934년 건립된 태평로 2가 마루보시 운수회사 건물(현 태성키친) 등이 대표적.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각급 학교들도 산재해 있다.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는 중구 대봉동 옛 공무원연금공단 후생관 자리에는 1923년 지어진 대구상고 본관과 강당이 남아있다. 경북대 사대부중 본관과 강당도 1923년 대구사범학교로 개교 당시 지어진 건축물이다. 1972년 2월 화재로 벽돌 구조부만 남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원형대로 복구됐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
옆에서 보면 별거 아닌것 같은데 막상 다리위에 서니 강 건너까지 아득히 멀어 보인다. 빨리 건너고 싶지만 혹시라도 떨어질까봐 조심스럽다. 중심 잡기에 바쁘다. 바람이 세게 불면 다리도 함께 흔들린다. 강 가운데에 다다르면 옆으로, 아래위로 심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낀다. 구름다리와 비슷하다. 외나무다리와 섶다리는 잠시 쓰는 다리다.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만들어졌다가 물이 불어나는 이듬해 여름에는 휩쓸려 떠내려간다. 여름철에는 그냥 바지를 둥둥 걷고 건너면 되니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환경친화적인 시설이라고 할까. 강을 낀 마을에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장소다. ◆추억의 외나무 다리=아직도 이런 곳이 있을까. 실제 사용되는 외나무다리와 섭다리는 전국에 몇군데 남아있지 않았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水島)리. 마치 물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인다고 해 무섬마을이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만나 마을 앞을 휘감아 삼면이 모두 물이다. 콘크리트 다리가 서 있지만 200m 아래에 외나무 다리가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어릴때 외나무 다리를 건너다니던 추억 때문에 2년전에 놓았지요. 예전과는 다른 모양이지만 그런대로 멋이 있어요." 김한세(69)무섬전통마을보존회 회장은 "1980년대 콘크리트 다리가 생기기 전만 해도 집집마다 다릿발 2개, 상판 1개씩을 할당했다. 마을 주위로 3개의 외나무다리가 있었는데 각각 농로, 통학로, 장길로 쓸 정도로 용도가 달랐다."고 했다. 다리는 길이 3m에 너비 20cm의 통나무 50여개로 만들어져 있는데 건널 때면 아슬아슬한 느낌이 든다. "예전에 비하면 고속도로 같지요." 김선광 이장(67)은 "그때는 지게짝대기 2개를 묶어 상판으로 썼기 때문에 너비가 10cm도 채 되지 않아 다른 동네사람들은 건너다 물에 빠지기 일쑤였다."고 했다. 요즘은 마을사람들이 물 건너 논에 일하러 가거나 이웃마을 사람들이 버스를 타기위해 건너 다니고 있다. 예천군 보문면 신월1리에도 외나무다리가 있다. 면사무소에서 나지막한 산을 넘어 꼬불꼬불 길을 가다보면 자그마한 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에 내성천이 흐르는데 강 너머에 논도 있고 축사도 있다. 주민들이 도끼로 나무를 쪼개고 끌로 구멍을 파 만든 다리다. 볼품은 그리 없지만 손으로 만든 탓에 정감이 있다. 다리 너비가 10cm도 채 되지 않아 긴 짝대기를 짚어가면서 중심을 잡고 건너야 한다. 주민 이창진(70)씨는 "매년 11월말에 다리를 놓았다가 이듬해 3월말쯤 다리를 걷어낸다."면서 "예전에는 나무를 한짐 지고 건너다 바람이 불면 물에 풍덩 빠지곤 했다."고 회고했다. 강물이 휘돌아가는 것으로 유명한 예천군 개포면 대은2리 회룡포 앞에도 임시 다리가 있다. 일명 '뽕뽕다리'다. 건축용 철판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10여년전 군청에서 놓은 다리인데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는 휩쓸려 내려가고 가을에 또다시 놓기를 반복한다. 주민 이문길(62)씨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회룡포의 경치가 훼손될까봐 콘크리트 다리를 놓지 않았다."며 "좀 불편하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오토바이도 다닐 수 있는 큰 길이다."고 했다. 이곳을 건너다니지 않으면 4km가 넘는 산길로 돌아가야 한다. 이들 3곳의 다리는 내성천이 빚어낸 풍경이다. ◆요즘은 관광용으로=강원도에는 오지마을이 많다. 산 사이로 강줄기가 굽이치면서 제대로 된 길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섶다리가 유독 많았다. 섶다리('섶'은 땔감을 의미하는 우리말)는 Y자 모양의 나무를 거꾸로 뒤집어 다릿발을 세우고 그위에 낙엽송으로 만든 서까래에 소나무 가지와 흙을 다져 만든 나무다리다. 가장 유명한 것이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의 섶다리다. 상류 200m 위쪽에 콘크리트 다리가 있지만 판운2리 주민들이 특산물인 메주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었다. 신영준(56)이장은 "매년 10월말쯤 마을청년 20여명이 나무를 다듬고 구멍을 파고 흙을 얹어 다리를 완성한다."며 "3일동안 함께 모여 일하고 술 마시면서 화합을 다진다."고 했다. 다리를 건너면 푹신한 흙의 감촉과 아래위로 흔들리는 율동에 기분이 좋아진다. 주천면 주천리앞 강가에도 지난해까지 섶다리 2개가 있어 쌍섭다리로 불렸지만 지난 여름 장마때 떠내려가고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작가 이효석의 고향인 평창군 봉평면에 가도 나란히 서 있는 섶다리와 나무다리를 볼 수 있다. 콘크리트 다리 바로 옆에 있는데다 튼튼하게 만들어져 그다지 큰 매력은 없다. 매년 9월에 열리는 '메밀꽃 필 무렵:효석 문화제'에서 자연체험장으로 사용된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과거의 잔재인가?=해방된지 60년이 넘었지만 대구 중·남구 골목길을 둘러보면 모두 셀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일본식 가옥이 남아있다.(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빌딩은 다음 기회에 다룰 예정이다.) 외형은 확 바뀌었지만 구조는 예전 그대로 갖고 있는 집이 대부분이다. 대구골목 탐사 전문가인 권상구(33)거리문화연대 사무국장이 추정하는 가옥·상점 숫자는 1천여채. 권 국장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집은 그리 많지 않지만 일본인이 살았던 집은 셀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말했다. 요즘 아파트만 해도 건축한지 고작 20년만 넘으면 뜯어내고 새로 짓자는 목소리로 시끄러운데 그 집들은 '일본식'이라는 부담을 걸머진채 그 몇배의 세월을 견뎌왔다. 대체 집의 생명력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이 집들을 보고 '치욕'이라고 단언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집은 생활터전이다. 그 곳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고 꿈을 키웠다. 중년들에게는 추억이 어린 곳이다. 정제영(51)영남자연생태보존회 총무는 "어릴때 교동에서 자랐는데 일본식 가옥에 사는 친구 집에 가면 집이 넓고 마당이 있어 뛰어놀기에 좋았다. 특히 방과 다락이 많아 숨바꼭질을 하는데 최고의 장소였다."고 회고했다.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그냥 두고 보는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권상구 국장은 "이는 일제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타임캡슐이다. 이를 백안시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보존할 것과 없애는 것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필요한 때다."고 했다. ◆없어진 곳이 많아...=일본식 가옥은 실제 한국의 기후와 풍토에 전혀 맞지 않는 구조다. 이호열(51)부산대 산업건축학과 교수는 "일본식 가옥은 고온다습한 일본 기후에 맞춘 집이어서 추운 한국의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해방후 한국인들이 적산가옥(敵産家屋)을 불하받은 후 맨먼저 한 것은 높은 천장을 낮추고 다다미 대신 온돌을 까는 일이었다"고 했다. 일본식 가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부분 '난방비'걱정을 했다. 대부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살아왔지만 기회가 되면 떠날 생각이라고 했다. 중구 일대는 일제시대 대구 도시계획에 따라 개발된 곳이어서 일본식 가옥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 1930, 40년대 삼덕동 일대는 수백채의 일본식 가옥이 들어섰다. 공무원 관사도 많았고 부자 상인도 많이 살았다. 경북대병원 뒤편의 집들이 대부분 100평 안팎의 큰 대지를 갖고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8M안팎의 좁은 도로는 192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집은 삼덕초교 정문앞에 있는 '빛살미술관'이다. 일제시대 삼덕초교 교장 관사였던 이 집은 한때 흉가(?)로 불렸는데 지난 2000년 대구YMCA가 임대해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ㄱ자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방이 배치돼 있는데 큰 방에는 일식집에서나 볼 수 있는 다다미가 깔려 있는게 재미있다. 물론 개보수하면서 새로 장만한 것이다. 요즘 미술관 주위에 쓰레기가 곳곳에 쌓여있고 나무도 다듬지 않아 다소 얼씨년스럽다. 가장 잘 보존돼 있는 곳은 미술관 인근의 고 장석수(1921~1976)화백 집이다. 한국추상화의 1세대 작가인 장 화백이 작품활동을 하던 곳인데 현재는 그의 차남인 상기(59·미술교사)씨 가족이 살고 있다. 마루 복도와 높은 천장, 나무창살 등 이 건축당시 그대로이고 장 화백의 작품도 여러점 걸려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문화재로 지정돼도 손색이 없을 듯 했다. 미술관 뒤편에도 일본식 가옥이 한채 있지만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기와가 부서져 방수용 천으로 지붕을 덮어놓고 있는데 없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5,6년전만 해도 이 일대에 수십채의 일본식 가옥이 있었지만 원룸이 대거 들어서면서 상당수 없어졌다. 삼덕소방서 건너 관음사(觀音寺)의 요사채도 191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건물다. 오래전 앞쪽에 방을 덧붙여 예전 형태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관음사 뒤편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구지검장과 대구법원장 관사가 있었는데 6년전 빌라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경북대병원 뒤편 동인동에도 200평 크기의 일본식 가옥이 있다. 이곳에는 두집이 살고 있는데 검은색 나무 현관문과 천장 등 예전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다. 집주인이 재일교포인 탓에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듯 했다. 일신학원 도로 건너편에는 얼마전만 해도 경북대 총장 관사가 있었는데 2년여전 철거됐다. 넒은 마당, 연못과 큰 나무가 인상적인 집이었는데 이제는 옆의 일본식 가옥들과 함께 커다란 공터로 변했다. 현재는 경북대병원 직원들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고 경북대 기숙사가 들어설 계획이다. 육군장교관사가 있던 남산동·봉산동, 주상병용건물이 있는 수창동과 남산동, 공평동 등에서도 낡고 초라한 모습으로 철거를 기다리고 있다. 중구 일대에 불고있는 재개발 바람 때문에 얼마후면 상당수가 없어질 것 같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일요일인 지난 14일 경북 고령군 고령종합시장에서는 부모 손을 잡은 아이들의 함성이 갑자기 터졌다. 대구에서 왔다는 초교생들이 실제 대장간을 구경하기는 난생 처음이라고 했다. 이들은 낫, 호미 부터 작두, 엿장수 가위까지 쭉 늘어놓은 수십종의 농기구를 만져본 후 화덕에서 꺼낸 벌건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 이상철(64)씨의 모습을 보고 마냥 신기해했다. "디지털 세상에 이런 원시적인(?) 작업을..."이라고 할 아이들도 있겠지만 대장간은 예전부터 가장 인기있는 장소였다. 아이들에게 풀무질(연소 속도를 내게 하는 송풍기)하고, 매질(두드려 쇠를 자르는 과정)하고, 담금질(열처리 과정)하는 장면은 큰 구경거리였다. 더욱이 그 앞에 서있다가 떨어지는 쇳밥을 슬쩍 가져가 엿과 바꿔먹을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고 한다. ▲10년후에도 대장간이 있을까?=이제는 거의 사라져가는 풍경이다. 경북지역에는 대장간이라고 할 만한 곳은 6곳 정도에 불과하다. 영주 대장간의 석노기(53)씨는 "농업이 기계화되고 금속제품이나 중국제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대장간은 '희소성' 때문에 유지될 뿐이지 경쟁력은 없다"고 했다. 낫 하나를 만들려면 화덕에 10번, 호미는 5번 정도 들어가고 나와야 할 정도로 작업 공정이 지루하고 길다고 했다. 수많은 공정을 거친 낫 하나에 도매가로 4, 5천원, 호미 하나에 1, 2천원일 정도로 싸다. 예전에는 면 단위마다 1, 2개씩 있었지만 이제는 몇개 시·군에 한개 꼴이다. 그중 절반은 공장형 대장간이고 나머지는 시장에 자리잡은 작은 대장간이다. 석노기씨 처럼 50대 대장장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60, 70대였다. 그들이 은퇴할 때쯤이면 이런 장면을 다시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의성대장간의 최상길(73)씨는 "장날에만 문을 열고 소일거리로 할 뿐"이라면서 "조금 더 하다 그만둘 생각인데 요즘 힘에 부칠 때가 많다"고 했다. 이들은 문화재나 장인에 지정해주길 바라고 있지만 행정당국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배우려는 사람도 없어=이들의 작업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사람의 손재주에 다시한번 감탄하게 된다. 벌겋게 단 쇠를 모루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리는데 처음에는 강하게, 다음에는 약하게 두드려 쉽게 형체를 만들어 냈다. 감각에만 의지해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농기구를 척척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기계보다 훨씬 정교하고 확실한 듯 했다. 쇠 모양을 만드는 망치질도 어렵지만 쇠의 강도를 내는 담금질(열처리)은 고난도의 기술이다. 상주 대장간의 홍영두(60)씨는 "50년 가까이 했는데도 쇠의 재질에 따라 달라지는 담금질은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부엌칼의 경우 벌겋게 달아있는 쇠의 칼날 부분을 1mm정도만 물에 살짝 살짝 담그면서 담금질을 하는데 웬만한 기술로는 이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고 한다. 기술을 배우기도 어렵지만 배우려는 사람도 거의 없다. 설령 가르쳐 달라고 찾아왔다가도 대부분 몇달을 못견딘다. 여름에는 화덕 때문에 찌는 듯 덥고 겨울에는 쇠의 차가운 느낌에 진저리를 친다고 한다. 현재 활동하는 대장장이들은 10대 초반에 풀무질을 하는 것으로 입문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밥만 제대로 먹을 수 있었어도 대장장이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로 힘들고 지난한 작업이다. 작업과정을 제대로 익히려면 10년 가까이 걸린다. 요즘에는 전동 해머, 프레스 등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배우는 시간이 좀 단축될 수 있다고 했다. 요즘에는 기와망치, 끌 같은 특수한 분야에 쓰이는 장비를 10개, 20개씩 한꺼번에 주문하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갑자기 장비가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혹 내가 잘못되면 다시는 만들수 없으니까..." 고령대장간의 이상철씨의 얘기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여름날 저멀리 아지랑이 피어나는 레일을 보면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고 겨울날 레일의 차가운 느낌에 살짝 몸서리를 쳐봤는지... 옆에선 철길을 걸으면 벌금을 문다고 모처럼의 감흥에 재를 뿌리지만 마냥 그 길을 따라 영원히 걷고 싶은 이 마음은 대체 뭘 하고픈 걸까. 터널은 또 어떤가. 깊고 어두운 심연에 몸을 내던지면 어떨까. 기차 안에서 터널을 만나면 그냥 어둠속에 묻힐 뿐이지만 터널 앞에 서면 그 벌린 아가리에 몸과 마음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 속에 들어가고 싶지만 웬지 모를 두려움에 쭈뻣거리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폐터널은?=터널은 산 아래를 뚫어 만든 지름길이다. 기차가 산 허리를 둘러가면 훨씬더 좋을 듯 하지만 빠름을 추구하는 교통의 속성상 터널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힘들게 뚫어놓았지만 철길이 바뀌면 터널은 용도폐기된다. 전국 곳곳에 버려진 폐터널이 많다. 한국철도시설공단에 따르면 철도의 복선화·이설 등으로 사용하지 않는 터널이 40여개나 된다고 한다. 영남지역에만 20개 가까이 있다. 상당수는 입구를 막아놓아 방치돼 있지만 도로나 공장, 창고 등으로 이용되는 곳도 꽤 있다. 대개 레일은 없어지고 예전 기차가 지나다닌 흔적만 남아 있다. 유일하게 레일이 남아있는 곳은 경북 문경시 마성면 고모산성 아래의 폐터널이다. 석현터널은 일제시대 문경에서 나오는 석탄을 실어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난 2000년 문경선 전체가 없어지면서 용도폐기됐다. 겨울철에는 뻥 뚫려있는 폐터널이 얼씨년스럽게 보이지만 봄이 되면 레일바이크(자전거)를 타려오는 관광객이 꽤 많다. 아마 가장 유명한(?) 폐터널은 경남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의 죽봉터널일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송광호가 범인으로 의심되는 박세일을 위협하는 장면이 나오는 곳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탓에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나 여느 폐터널과 별 다를바 없다. 그저 나지막한 구릉속에 자리잡은 평범한 터널이다. 바로 앞의 죽봉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어서 볼만한 것이 그리 없다. 폐터널의 길이는 486m, 높이는 6m. 1965년 개통돼 진주~사천간을 운행했지만 1980년 철도 자체가 없어졌다. ▲영화 촬영지로 각광=경남 밀양에 가면 훌륭한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시 중심가에 가까운 영남루에서 동창천을 따라 청도 방면으로 가는 길이다. 산 허리를 따라가면서 오른쪽에 뱀처럼 굽어흐르는 내성천의 경치가 볼만 하다. 철로가 지나던 자리는 좁다란 차도로 변했지만 터널은 그대로 남아있다. 주민들은 백송터널이라고 하는데 공식 명칭은 용평터널이다. 1905년 경부선 철로로 출발했지만 1940년 산 밑으로 터널이 새로 뚫리면서 용평터널의 가치도 끝난 듯 했다. 그러나 그후 인도로 이용됐다가 이제는 비록 차 한대 겨우 다닐 정도의 좁은 도로지만 훌륭한 관광코스가 됐다. 터널 길이는 300m로 꽤 길다. 만든지 100년도 넘었지만 어디 한군데 빈 틈이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터널 안으로 들어서면 발소리가 빈 공간을 그윽하게 메우고 전구 불빛이 몽환적이다. 이곳에서도 정우성 주연의 영화 '똥개'가 촬영됐다. 똥개 친구들과 동네 불량배간 패싸움 장면이 나오는 곳이다. ▲저장고, 창고로 활용?=폐터널은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임대를 해주고 있지만 실제 활용되는 경우는 몇군데에 불과하다. 청도군 화양읍 남성현 마을에서 산쪽으로 1km정도 올라가면 폐터널이 있다. 폐터널이 포도주 저장고 겸 레스토랑으로 활용되는 곳이다. 명칭은 성현터널인데 길이는 1천500m다. 1930년대 인근의 경부선이 마을 아래로 이설되면서 폐터널이 됐다. 터널입구에는 '대천성공(代天成功)'이라는 의미를 알수 없는 왜식 팻말(일본 천황의 무운장구를 비는 듯한 의미로 추측됨)이 눈길을 끈다. 와인터널의 안완수(33)씨는 "터널 내부는 년중 섭씨 12, 13도를 유지하고 있어 감 포도주를 저장하기에 좋은 환경"이라면서 "터널이 갖고 있는 낭만과 기능을 잘 활용했기 때문인지 손님들의 반응이 좋다"고 했다. 충주시 일대 인등산 자락에는 1980년 충북선 복선화 사업으로 노선이 바뀌면서 폐터널이 여럿 생겼다. 버섯을 재배하는 곳도 한때 있었지만 요즘은 없어졌다. 동량면 조동리 대모천 마을에는 폐터널을 이용한 김치 저장고가 있다. 폐터널의 항온 기능을 활용해 '묵은 김치'를 대거 저장하고 있었다. 산앤들 유통 대표 이하늘(44)씨는 "올 4, 5월 되면 본격적으로 김치를 시장에 내놓는데 냉장고에 보관하는 김치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라면서 "그것은 자연적인 맛과 인공적인 맛의 차이"라고 했다. 경주시 석장동 부엉마을 앞에 가면 두개의 터널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한곳에는 기차가 다니고 있고 다른 한곳은 폐터널이다. 일제시대에 놓여졌다가 1993년 경주 외곽철도가 개설되면서 폐터널이 됐다. 이곳은 개인 소유지인데 창고로 쓰이고 있다. 오영학(57)씨는 "얼마전 폐터널에 대해 안전점검을 했는데 100년 가까이 됐지만 아주 튼튼하다고 했다"면서 "일제시대에도 얼마나 꼼꼼하고 정밀하게 터널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당시 일본 기술자들은 시멘트와 섞는 모래와 자갈을 깨끗하게 씻어 콘크리트를 만들어 강도를 유지했다고 한다. 물론 모래와 자갈을 시냇물에서 일일이 씻고 고르는 일은 한국인 노역자들이 맡았겠지만...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