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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매일신문] [20세기로의 추억] ①신작로 :: 2007/02/15 10:29
찰나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생활의 편리함 때문에,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그것을 내버리거나 장농속에 처박아둘 뿐 입니다. 잊혀지거나 사라지고 있는 그런 것들을 찾고 모으고 기록하기 위해 20세기로 여행을 떠납니다. <편집자> '신작로(新作路·일제시대부터 사용된 말로 넓게 새로 낸 길을 뜻함)'를 아는가. 먼지 풀풀 날리는 자갈길을 따라 버스가 지나가고, 그 뒤를 아이들이 달려가고... 영화에서나 봄직한 장면이다. 그런 길이 아직도 있을까. 온통 덮어 씌우고 밀어버리는 것을 능사로 아는 시대에 비포장 길이 남아 있을까. 하루종일 차 10대가 채 지나가지 않는 산골짝에도 널직한 도로를 닦는게 우리의 현주소가 아니던가. 낙후되고 뒤처졌다는 경북 북부지방부터 뒤져봤다. 문경에서 시작해 영주, 상주, 안동, 예천... 그렇게 어렵지 않게 3곳을 찾아냈다. 문경새재, 하늘재, 안동 병산서원 진입로 등이다. 모두 다 잘알려진 관광지였다. 그렇게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보다는 비포장 도로를 찾는 여정속에서 '길'의 생명력을 봤다. 길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길은 생물인가?=점촌시에서 국도 3호선을 따라 꼬불꼬불 고갯길을 오르면 이화령(529m)이다. 전망대에 서니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저멀리 널직한 충청도(괴산군)땅이 아득하게 보인다. 잘 지어놓은 휴게실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나오니 그 넓은 주차장에는 달랑 취재팀이 타고 온 차량 한대 뿐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 흔하디 흔한 차 한대 지나가지 않는다. 휴게소 주인은 10년전만 해도 고갯길에 오가는 차량이 꼬리를 물었는데 이제는 데이트족의 차 밖에 볼 수 없다고 한숨지었다. 그러고보니 구름이 서서히 걷히면서 고갯길 아래로 1998년부터 고개를 뚫고 지나가는 새 국도와 2004년 완공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길게 쭉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1925년 일제에 의해 신작로가 뚫리면서 문경새재 옛길을 밀어냈던 이화령 도로가 이제는 터널에 밀려 예전의 한적한 길로 되돌아 간 것이다. 길 만큼 흥망성쇠가 뚜렷한 것도 없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시 쇠퇴하는 존재였다. 저수령(850m)고갯길의 운명도 비슷했다. 예천군 상리면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을 연결하는 길이다. 군데군데 눈덮인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 고갯마루로 올라가는데 차로 15분 가까이 걸렸다. 이 도로가 개설된 것은 1994년(지방도 927호)인데 그전만 해도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오솔길 밖에 없었다. 경사가 급하고 험해 지나다니는 길손들의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고 해 저수령(低首嶺)이라 불렸을 정도이니 오르내리는데 얼마나 힘들었을지 쉽게 짐작된다. 엄준철(83·상리면 용두리)할아버지는 "30년전만 해도 새벽 첫닭 울때 집에서 나와 산길 60리를 걸어 단양장을 보러 다녔다"며 "막걸리 한잔 걸치고 늦은밤 산길을 걸어오면 아낙들이 관솔불을 들고 마중나왔다"고 회고했다. 그렇지만 저수령 고갯길도 포장만 됐을뿐, 지나는 차량의 모습은 볼 수 없다. 가끔 보이는 등산객의 차가 전부다. 단양으로 가려면 2001년말 개통된 중앙고속도로를 타면 되는데 굳이 산길로 어렵게 운전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10년이 채 되지않아 효용가치를 잃는걸 보면 '길은 생물'임에 틀림없는 듯 하다. 오솔길은 신작로로 대체되고 신작로가 포장되면 곧바로 고속도로에게 밀려난다. 인간의 생노병사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남아있는 신작로=비포장 길이 그대로 있는 문경새재, 하늘재, 병산서원를 찾으니 관리자들은 저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흙길'이라고 자랑했다. 틀린 듯 하지만 모두 맞는 말이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서울로 올라가던 옛길이라는 점에서, 하늘재는 도로를 낼 곳인데도 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병산서원은 문화재 보호라는 점에서 사연이 다 달랐다. 문경새재에 도로가 나지 않은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이다. 젊은 시절 문경초교 교사를 했던 박 전대통령은 70년대 후반 이곳에 왔다가 관문을 넘어가는 트럭을 보고는 차량출입금지 명령을 내렸다. 당시 새마을운동으로 한창 도로를 내던 시절이었지만 대통령의 한마디에 흙길은 보존될 수 있었다. 도립공원 측은 2003년부터 웰빙바람에 힘입어 '맨발로 황토길 걷기 코스'를 만들어 인기를 끌고 있다. 관리담당 권택우(45)씨는 "6.5km에 이르는 길을 유지관리하기 위해 매년 15t트럭 50대 분량의 마사토를 뿌리고 있다."며 "포장하면 관리하기 쉽겠지만 황토길은 새재의 가장 귀중한 자산"이라고 했다. 하늘재는 시원한 바람길이 열려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와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연결하는 이 고갯길은 하늘과 맞닿아있는 듯 해 명명됐다지만 실제로는 그리 높지 않다. 525m이다. 지난 2000년 문경시가 고갯길을 따라 도로를 놓았지만 고갯마루에서 충주 경계부터는 비포장이다. 그곳의 관리주체인 월악산국립공원 측이 도로개설을 아예 고려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원 관계자는 "오히려 공원안에 다른 곳의 포장을 벗겨내야 할 판에 무슨 포장이냐"며 반문했다. 그러나 문경시 산불감시인 홍일섭(70)씨는 "문경 사람들은 수안보로 직통하는 이 도로를 원하지만 국립공원 측의 태도가 워낙 완강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 중간에 서서 양쪽을 돌아보면 포장과 비포장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된다. 기계와 인간의 차원이라고나 할까. 충주 경계부터 오솔길이 1.2km정도 이어져 걷는 맛을 더해준다. 안동 병산서원 진입로도 지금까지 여러차례 포장될 위기에 처했다. 70년대부터 포장계획이 세워지고 예산까지 배정받기도 했지만 문화재관리위원회 등의 반대로 번번히 무산됐다. 이제는 1.2km의 비포장 진입로가 귀중한 문화재의 훼손을 막아주고 있다는 공감대가 일정부분 형성돼 있다. 안동 하회마을에 1년 10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지만 바로 옆에 있는 병산서원에는 10만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것도 서원의 누각과 주춧돌 등 한국의 건축미를 보러오는 애호가가 대부분이다. 포장될 위기에서 구한 것은 90년대 중반 선풍적인 인기를 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이다. "자갈길이기에 병산서원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라고 쓴 유홍준씨가 문화재청장으로 있는 한 포장 얘기는 아예 나오지 않을게 분명하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제자(題字)를 쓴 변미영씨는 1963년생으로 15회의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화가다. 대구한의대 초빙교수로 재직중이다. |
[대구매일신문/2007.02.12] 50년대 대구 모습 슬라이드 제공 아담씨 인터뷰 :: 2007/02/12 18:59

일제강점기 '무영당(茂英堂)' 백화점 경영자 이근무(李根茂)의 일기 :: 2007/02/12 00:04
* 출처 : 연세국학총서 36 <일제의 식민지배와 일상생활> - 2004년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 박정희 시대{대구매일신문}연재{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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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순종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 2007/02/11 23:48
오른쪽 가이즈까 향나무가 순종황제가 심은 나무로 추정됨
거리문화시민연대 권상구 대표로부터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대구에 오셨을 때 심은 나무가 있다는데 알고 있느냐?’는 전화가 왔었다. 모른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나는 조금은 당황했다.
오래 동안 녹지부서에 근무를 하면서 전국 최고의 무더운 도시 대구의 오명(汚名)을 벗겼을 만큼 많은 나무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오래된 노거수를 보존하기 위하여 보호수 지정을 획기적으로 늘렸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속의 인물과 나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비록 보호수는 아니더라도 그 나무와 연관된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여 화가 이인성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를 찾아서 ‘이인성 나무’라고 하는 등 나무를 보호했었는데 그것도 평민이 아닌 황제(皇帝)가 대구의 달성공원에 나무를 심었다는 나무를 모르고 있다니 말이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순종 황제가 대구에 온 내용이 실린 책 <대구이야기, 같은 달구벌 얼찾는 모임 회원인 전 중구문화원 사무국장 손필헌 님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한국으로 건너와 1904년 대구에 정착한 일본 거류민의 한 사람인 카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1930년까지 26년 간 대구에 살면서 당시 상황과 체험담을 기록한 대구물어(大邱物語)를 번역한 책>을 보면서 자료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아이러니(irony)하게도 지존(至尊)인 황제의 순행(巡幸) 모습을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닌 모리배(謀利輩)인 일본 상인이 쓴 책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1909년 1월 7일 오후 3시 20분 착의 궁정열차로 대구에 도착하셨다. 하늘에 영광이요, 땅에는 축복이라 한·일 수많은 민중이 천지를 흔드는 환호 속에서 인금님이 탄 수레를 맞이하였다. 폐하의 차가 출발하자 군악대가 국가를 취주(吹奏) 하는데 그 장엄한 기운이 사방을 제압하고 맞이하는 관리나 시민 모두가 최고의 경례를 드리는 가운데 폐하는 덮개가 없는 수레에서 가볍게 인사하시며 숙소에 들지 않으시고 의병장을 앞세워 행렬도 엄숙한 도열 속으로 지나셨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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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는 남한 순행의 첫날을 대구에서 보내시고 이튿날 8일 오전 9시 10분 부산으로 출발하시는데 부산, 마산의 순찰을 마치시는 12일에는 대구에 다시 오셔서 하루를 묵게 되시니 대구로서는 이중의 광영(光榮)이었다.”
“황제 폐하의 귀경길인 12일 오전 11시 이등박문과 함께 마산으로부터 봉련(鳳輦=꼭대기에 금동(金銅)의 봉황을 달아 놓은 임금님이 타는 가마)이 다시 대구에 안착하였다. 황제의 위엄은 앞서보다 더 장엄하고 시내의 장식도 지난번보다 더 한층 화려했다. 당일 달성공원에 나오셔서 폐하 손수 식수와 이등박문의 기념식수가 있었다.”
이상은 순종황제가 대구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부산, 마산을 거쳐 대구로 다시 되돌아 온 장면에 관한 <대구물어>의 기록을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순종 황제는 조칙(詔勅)을 통해 ‘짐이 생각하건데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이에 시정개선의 대 결심을 하고·····지방 각지의 소요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서민의 고통은 계속 되고 있으니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일이다. 하물며 이 추위를 당한 백성의 곤궁함이 눈에 선한데 어찌 한 시라도 금의옥식(錦衣玉食) 혼자만 안주하랴·····’라고 순행 목적을 밝히셨다.
즉 황제라는 사람이 백성들의 고통을 모르는 채 하고 궁중에서 비단 옷과 맛있는 음식만 먹고 앉아 있을 수 없어 이 엄동에 지방시찰을 나섰으니 수행하는 사람들은 황제의 이런 뜻을 깊이 명심하라며 또한 이등박문을 순행을 동참시킨 이유로 국정을 도와줄 뿐 아니라,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태자(太子)를 잘 가르쳐 고마운 마음에 함께 하였다고 부연(敷衍)했다.
뒷이야기를 보면 황제가 가는 길을 갑자기 넓히고 그 것도 모자라 험한 곳은 천으로 둘러쳐 대구의 옥양목(玉洋木)이 동 났다고 한다. 순종황제의 대구방문은 시민들의 사기를 높였고, 도로축조 등으로 개발이 앞당겨 졌던 것은 사실이나 하필 다른 곳을 놔두고 왜 대구를 선택하였느냐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없으나 이는 아마 두 해전인 1907년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 시사하듯 대구를 더 이상 방치한다면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지 아니할까 하는 우려를 미리 차단하기 위하여 일본이 황제를 앞세워 민심을 무마하려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기념식수를 했다는 기록은 찾았으나 무슨 나무인지,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특히 대구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은 모두 해방이후 창건 되었고, 비교적 오래되었다는 조선·동아도 1920년대에 발간되었으니 1909년도 기록을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대구물어>의 저자 아사오에 의하면 황제의 대구순행을 일본의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한적한 도시 대구가 일본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하나 그 일본 신문 역시 입수하기 쉽지 않는 일이다. 고심을 거듭하든 끝에 다방면에 박식한 ‘얼 찾는··· 모임’의 회원이자 공교롭게도 현재 달성공원 관리계장인 이대영님께 당시신문이나 정부기록을 열람하거나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좀 알아봐 달라고 했다.
불과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전화가 왔다. 나무가 현존(現存)하고 있으며, 가이즈까향나무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서울대학교 임학과 출신이면서 대구시 여러 부서에 고위직으로 계시다가 퇴직한 후 주로 오래된 노거수를 찾아다니시는 정시식님께 연락을 하고 함께 확인작업을 시작했다.
2006년 8월 19일 오전 휴일인데도 이 계장이 일부러 나와 기다렸다. 일러 준 곳을 보니 크기가 비슷한 두 그루의 가이즈까가 나란히 서 있는 폼이 계획적으로 심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우선 뿌리둘레를 측정해 보니 한 때 신사(神社)가 있었던 곳에서 보아 좌측편의 나무는 285cm, 오른편은 276cm 였다. 당시 이등박문은 66세 순종황제는 33세였으니 만약 나이에 맞춰 심었다면 더 굵은 수령 163년이 이등박문, 작은 것 수령130년이 순종황제가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럴 겨우 일국의 황제인 순종은 좌측에 이등박문은 우측에 심어야 하는 데 그 반대인 만큼 이 기념식수에서도 황제의 권위를 훼손시키려는 나쁜 음모가 숨어 있지 아니할까 의심이 든다. 칙서에서는 이등박문이 황제를 수행했다고 표현했지만 <대구물어>의 저자는 이등박문이 황제보다 오히려 더 당당해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한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그 당당했던 이등박문은 그해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射殺)되고, 순종 황제 역시 이듬해 8월 일본의 병합으로 자리를 잃고 500여 년을 지켜온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고 만다. 대구의 본향인 달성 역시 신사(神社)가 들어서는 등 더렵혀진다. 시민의 휴식처로 변한 공원의 중심지에 떡 버티고 있는 가이즈까향나무 역시 영광과 오욕(汚辱)을 함께 가진 역사의 부스럼 같은 존재이기는 하나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심은 나무만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만큼 기리 보존했으면 한다.
[대구광역시청] 달성공원내 향토역사관 전시시설 새 단장 :: 2007/02/11 23:42
| [대구광역시청] 달성공원내 향토역사관 전시시설 새 단장 | |
[연합뉴스 보도자료 2006-10-18 16:5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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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는 지난 10월 9일부터 13일까지, 1997년 개관한 향토역사관의 전시패널을 개체하는 등 시설물 보수공사를 완료하였다.
이번 공사는 대구향토역사관의 노후된 시설을 개체하여 관람객에게 깨끗한 환경의 전시 콘텐츠를 제공함은 물론, 지금으로부터 2만년∼1만년전의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의 거주가 확인되는 등 그간의 대구역사에 대한 연구 성과를 새로 반영하여 관람객에게 보다 정확하게 대구역사를 홍보, 교육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대구 관련 유리원판 사진과 그간 지속적으로 수집한 대구 사진엽서 중 지금은 사라진 대구읍성의 모습, 중앙로에서 바라본 옛 대구역, 일제강점기 대구 시가지 등과 같은 대구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한 사진자료들을 패널에 게시해 관람객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지난 1997년 개관한 대구향토역사관은 달성공원 내 종합문화관에 위치해 있으며, 2개의 전시실 총 200여 평(648㎡)에 선사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대구의 역사에 대해 시대별로 전시하고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문화유적 분포도, 낙동강 조운 등의 축소모형이 설치되 있으며 관련 영상물을 방영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관람료는 무료이다. 전시실 내 음식물 반입이나 플래시 및 삼각대를 이용한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기타 자세한 사상은 문화예술회관 홈페이지(artcenter.daegu.go.kr)를 참조하면 된다.
<사진설명> 대구읍성 및 중앙로에서 본 대구역 모습 사진 |
[푸른 대구 이야기] 광문사(廣文社) :: 2007/02/11 23:41
| [푸른 대구 이야기] 광문사(廣文社) | |
전자가 대구시민의 우월성을 널리 알린 일이라면 후자는 전통의 도시 대구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수치스러운 일로 희비가 교차되는 한해가 된다. 다만 지금까지 보존이 되었다면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손색이 없을 읍성(邑城)의 철거는 한 친일분자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으로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온 국민이 동참하고 “우리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정신이 발휘된 국권회복운동” “ 전 국민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된 최초의 국민운동 그 중심에 대구가 서 있다.” “대구 사람들의 진취적 개방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고 평가를 받는 국채보상운동만큼은 잊지 말았으면 한다. ◇ “나랏빚 근검절약으로 갚자” 사실 대구가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신라 신문왕 때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구토(舊土)를 포함한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하여 대구를 천도(遷都) 후보지로 선택했던 것이 그 것이다. 결국실패하고 말았지만, 대구라는 곳을 신라의 집권층이 깊숙이 논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오래 동안을 오늘 날 읍(邑).면(面)에 해당하는 현(縣)으로 있다가 15세기 초에 군(郡)으로,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고,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경상도의 행정과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감영(監營)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전국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조선 8도 중의 1개 도(道)일 뿐 여느 도의 감영 소재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근세에 와서 대구가 전 국민들에게 다시 널리 알려진 것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고부터이다. 최근 일어났던 IMF사태에서 보았듯이 선조들은 이미 100년 전에 외채의 해악(害惡)을 알았다는 사실 이외 나라의 빚을 조세가 아니라, 국민의 성금으로 갚자는 국민운동을 벌였으며, 사상 초유로 남녀노소, 어른과 아이 등, 성별과 연령, 신분의 귀천을 초월해 민족 전체가 참여한 구국운동(救國運動)이었다. 그 후에 일어난 3. 1운동은 국채보상운동이 그 모태(母胎)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기념사업회가 100주년 기념사업을 별도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른 바 “대구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만큼은 많은 시민이 이해해 대구 사람임이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는 많은 이벤트를 펼쳤으면 한다. ◇ 문화유산 점점 사라져 아쉬워 지난 시정부에서 대구 정신을 무엇에서 찾아야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었던 같다. 그 결과가 2004년도에 펴낸 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책임연구원 최정환)의 ‘대구향토사연구’인 것 같다. 보고서에는 고대 대구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면서 대구 시민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분석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가칭 ‘대구역사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제기해 뿌리 깊은 도시의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그러나 일부 사실을 두고는 수구적이라느니 보수적이라느니 하여 편향적인 시각으로 본 것 같아 유감스럽다. 자치시대의 시정 발전의 요체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라고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시민들의 결속력과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내년(來年)보다 더 좋은 해는 없을 것이다. 대구시가 도심의 한복판에 이미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조성했고, 기념사업회에서는 기념관 건립, 국제학술회의, 전국금연대회, 기념음악회를 개최할 계획이며, 국가보훈처에서는 내년 2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김광제, 서상돈’을 지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대구정신”의 산실(産室)이라고 할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을 모의했던 광문사 건물이 불과 몇 년 전에 사라지고 다른 건물이 들어 선 것이다. 선조들이 물려 준 귀중한 문화유산 중 사라진 것이 어디 광문사 하나뿐이랴 만 100주년 기념행사를 불과 코앞에 두고 그 것도 기념관을 새로 짓겠다는 등 계획을 하면서 있는 것도 보존하지 못한 것은 250만 시민의 수치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주역의 한 사람인 서상돈(1851~1913)님의 생가도 미리 복원하지 못하고 재건축을 위해 헐어버린 상태로 100주년을 맞아 아쉬움이 더 크다. 글·사진 이정웅(수필가) |
일제 때 허물어진 '대구읍성' 복원 제안 :: 2007/02/11 23:39
| 일제 때 허물어진 '대구읍성' 복원 제안 |
| [CBS 단독인터뷰] 문화기획가 김정학 씨 "'주식회사 대구' CEO 대신 CCO 있어야" |
문화기획가 김정학 씨는 CBS와의 대담에서 일제 때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대구의 상징으로 재현하자고 제안했다. 침체된 대구문화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대구의 역사와 전통을 현대적 방식으로 되살리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오래전부터 형성돼 왔다. 그런 점에서 문화기획가 김정학 씨가 대구토종문화개발 10대 프로젝트라는 주목할 만한 제안을 내놓았다. 김정학 씨는 10대 문화프로젝트로 △뮤지컬 약전골목 △대구24시 풍경과 소리 △뮤지컬 아! 1950년 △대구문화지도 △야외공연장 △대구읍성복원 △홈커밍 문화특강 △세계축제 색채전 △대구현장문학모음집 △대구역사 기획전시 등을 제안했다. ‘뮤지컬 약전골목’은 전형적인 향토뮤지컬로서 전국에서 유일한 약전골목인 대구약전골목을 배경으로 다양한 소재를 뮤지컬로 표현할 수 있다. 한약방을 소개하고 대장금과 같은 캐릭터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활용을 통해 대구를 대표하는 문화아이콘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대구24시 풍경과 소리’는 잠들지 않는 대구의 모습을 소개한다. 새벽을 여는 대구사람들의 소리 등 우리가 잘 접하지 못했던 낯선 소리들을 담아 대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방송과 신문사 등의 도움을 얻어 CD/DVD로 제작·배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뮤지컬 아! 1950년’은 한국전쟁 중 대구로 모여들었던 피난예술가들의 삶을 소재로 하는 뮤지컬이다. 전쟁이라는 절망 속에서 대구가 가졌던 희망의 메시지를 표현함으로써 대구의 기(氣)를 살리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대구의 명품과 명소, 명승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우리가 항상 휴대하며 사용할 수 있는 ‘문화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지역을 알아갈 수 있도록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지도를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다양한 내용으로 제작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고 인터넷 콘텐츠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중국 계림의 장이모영화학교와 같이 대구에서도 금호강과 수성못, 팔공산 지역에 독특한 '야외상설공연장'을 개설하고 주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참여형 문화공연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대구에 수변극장과 임간극장을 세계적인 명소로 개발할 수 있다. 아쉽게 해체된 '대구읍성'을 복원하는 일은 대구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복원하는 일이다. 특히 수원성 복원을 참고한다면 기술적인 면은 쉽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형복원이 어렵다면 예전의 대구 성문(사대문)을 한 장소에 재현해 안동 등 옛 한옥마을의 고건축물을 그대로 옮겨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조성된 대구읍성은 테마파크로 동남권 최고의 볼거리가 될 것이다. '홈커밍 문화특강'이라는 대구출신의 저명인사특강을 개설하고, 이를 지역대학의 공동학점과목으로 지정함으로써 지역대학생들과 시민들이 함께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이를 지역포털사이트에 VOD로 제공함으로써 지역의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구를 대표할 수 있는 '세계컬러페스티벌'을 기획하여 개최해야 한다. 주제색(色)을 정하고 미술·음악·공연 등 전 장르가 다함께 참여할 수 있는 대구의 대표 축제를 만들어야 한다. 대구와 관련된 문학작품을 한글본과 영역본 합본으로 '대구현장문학모음집'으로 묶어 발간하고 관련기관과 해외동포, 공공도서관에 기증함으로써 대구의 문학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사람들의 손에서 읽힐 수 있도록 살아있는 문학으로 만들어야 한다. '대구역사 기획전시'는 대구의 전환기적 역사물을 국립대구박물관 특별실 상설운용 등을 통해 전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대구에서 최초로 일어난 일들을 소개하고, 10월폭동과 지하철참사, 인혁당사건, 국채보상운동, 2·28운동 등 대구 역사를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고대사에 대한 고찰만큼 근대사에 대한 고찰이 중요하다. 그러한 근대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까운 대구의 역사를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김정학 씨는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구의 언론, 예술, 공공기관, 민간기관이 역량을 함께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특히 '주식회사 대구'의 CEO를 대신할 수 있는 CCO(Chief Creative Officer)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 대구CBS 보도제작국 |
민족저항 상징 `대구 읍성' 복원해야... :: 2007/02/11 23:38
대구대학교 건축공학과 예명해 교수는 7일 대구시 도심 활성화정책 워크숍에 앞서 `대구 읍성의 재인식과 활용방안'이라는 주제의 발제자료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자료에 따르면 대구 도심에 위치해 성벽과 4개의 성문으로 구성된 조선시대 대구의 상징물이었던 대구 읍성이 철거된 것은 1906년과 1907년 사이.
일본의 본격적인 한반도 강점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예 교수는 "1905년을 전후해 대구역과 경북지역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일본인이 대구에 들어오면서 한국인이 장악한 성내 상권을 노리던 일본인들에겐 읍성이 커다란 장애물이었다"면서 "특히 일본인들은 성벽 자체를 민족적 저항의 상징물로 봤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인들은 성곽을 해체해 한국의 전통적 질서를 허물고 그들의 식민지 정책을 쉽게 하려고 성곽 철거계획을 세우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다른 지방도시의 읍성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조상들이 정성을 기울여 축조한 읍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파괴됐다가 다시 증.개축됐으나 결국 일본 거류민들의 요구에 따라 철거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예 교수는 "일본 강점기와 한국전쟁, 1960년대 개발위주의 도시화과정 등을 거치면서 역사적 환경이 크게 훼손되고 변질됐다"면서 "대구 읍성을 부분적으로라도 복원한다면 역사적 문화유산도 되살리고 천년고도 경주처럼 대구를 더욱 대구다운 도시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구지역 헌책방 지도 :: 2007/01/1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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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역 네거리 지하도
*영광도서
문화 창달, 보급, 유지를 위해 헌책방을 운영하신다고 함
016-604-0336
오전11시~오후 7시
매주 일요일 휴일
*영광서점
357-1940
오전 10시 ~21시
초중고 참고서
휴일 없음
*현대서점
*성원서점
대구시청 주변
*동양서점
423-9527
오전10시~ 오후 8시
휴일 없음
*평화서적 (대구시청 주변)
422-3324
아침 9시 반~저녁 9시 반
휴일없음
*신라서적
425-6987 , 016-879-6573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고서적, 문집, 족보
휴일 없음
*대륙서점
423-1836
9시 30분~오후 7시 30분
휴일 없음
*제일서점
425-9470
오전9시~ 저녁8시
소설책
휴일 없음
*우리헌책방
255-9315
9시 반~ 오후 9시
첫째, 셋째 일요일 휴일
남문시장 주변 반월당역 1번출구
*코스모스 헌책방
053-253-8311 , 7388
09:30~21시
연중무휴
전문분야별 모든 책
인터넷 헌책방도 운영 cosmosbook.co.kr
*월계서점
252-7727
일요일마다 휴일
*대도서점
257-8802
10~오후 7시
수험도서, 교과서, 소설, 공무원책
경북대 후문
*합동북
942-8122
오전10시~오후 9시
명절 때만 휴일
선별한 책 50만권 보유
인터넷 헌책방도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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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매일신문 /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47)정겨운 옛 골목 :: 2006/11/21 12:14
|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47)정겨운 옛 골목 | |
영남 제일의 성읍(城邑)도시로 커온 대구는 정겨운 옛 골목이 유난히 많은데다 재미있는 이름을 지닌 골목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또 서울처럼 행세하는 대갓집들에 막혀버린 ‘막다른 골목’이 드물며, 골목과 골목이 사통팔달로 이어져, 성내 어디에도 다다를 수 있는 것이 대구골목의 특징이 되었다. 남성로의 별칭인 ‘약전골목’은 왕복 2차선도로여서 골목이라기보다 ‘약전거리’란 말이 제격이다. ‘긴 골목’의 대구식 표현인 ‘진골목’은 약전골목과 종로가 맞닿는 길의 우측에서 꺾어져 남일동 중앙시네마까지 이르는 길이다. 일제 때 이 곳엔 달성 서씨 부자들이, 해방 직후엔 이원만 코오롱 그룹 창업주가, 그리고 자유당시절엔 신도환 반공청년단장이 중소기업 사장들과 함께 산, 대구의 부유층 동네였다. 이 바람에 10.1사건이나 4.19와 같은 소요사태라도 나면 몰려온 시위대로 곤욕을 치른 곳이기도 했다. 서성로 1가에는 아예 ‘돈부자골목’도 있었다. 일제 때 현찰이 많기로 소문난 한 부자가 돈놀이를 하며 큰 집에 살고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비꼬아서 부른 것이 골목이름이 되었다. ‘회나무골목’은 금호호텔 건너편에서 현 희도아파트 서쪽 담까지로, 실연한 기생이 목 메어 죽은 오래된 회나무가 한 그루 있어,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 골목의 바로 곁골목은 골목 가에 오동나무 밭이 있다고 ‘오동나무골목’이라 불렸다. 남성로 제일예배당 입구에서 종로에 이르는 골목의 끝에는 말이 끄는 방앗간이 있었다고 ‘말방골목’이 되었다. 또 계산동 매일신문 뒷길은 잘 가꾼 뽕나무가 시선을 끌어 ‘뽕나무골목’이 되었고, 서문로 2가에서 수동으로 들어가는 네거리까지는 ‘등기점골목’이라 했다. 등겨를 전문으로 파는 점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호호텔에서 현 곽외과까지는 ‘샘밖골목’으로 불렸는데, 호텔 건너편 쪽에 있는 큰 샘의 바깥쪽 골목이라고 그렇게 불렸다. ‘샘밖골목’ 일대는 기생들이 많이 살아 ‘기생촌’으로도 이름났었다. 이 밖에 동성로 제일은행 건너편에서 중앙통까지를 ‘먹단골목’이라 했다. 골목어귀에 산 이름난 노기생의 집 뜰에 검은 목단이 심겨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또 ‘떡전골목’은 요즘의 북성로 돼지골목으로, 떡집들이 많아 그렇게 불렸고, 동아쇼핑센터에서 종로까지의 골목에는 개천가에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다고 ‘줄버들나무골목’으로 명명되었다. 큰 장 인근 귀암서원 옆에는 누룩점이 많아 ‘누룩전골목’이 되었으며, 동산파출소 오른쪽이자 실 가게 거리 왼쪽 끝은 말을 메어 두고 팔기도 하여 ‘말전골목’으로 불렸다. 그 앞쪽 소시장거리는 ‘소전거리’로 불렸고, 현 대구백화점 자리엔 쌀 전문점이 많아 ‘싸전거리’가 되었다. 동대구와 남구 대명동의 신흥주택지가 생긴 70년대 이후에는 차량소통이 불편한 도심의 골목들은 저절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시청 옆의 헌책방골목, 북성로의 공구골목과 그 이웃의 깡통골목, 교동의 양키골목, 향촌동의 대폿집골목 등이 한 시절 성가를 누렸으나 사양길로 들거나 쇠락한지 오래이다. 길이 넓어 찾아가기 쉽고 주차장이 잘 갖춰진 수성구 들안길의 화려한 ‘먹자골목’은 이미 골목이 아니라 ‘푸드 타운’이자, ‘먹거리마을’로 불릴 지경이다. 여우가 둔갑술을 피웠다 할 만큼 삽시간에 젊은이의 팻션거리로 탈바꿈한 삼덕동의 ‘야시골목’은 그 감칠맛 나는 작명이 대명동의 옛 ‘야시골’의 환생인가 싶어 향수를 자아내게 하지만, 유행은 부나비 같은 것, 얼마나 오래 갈지 두고 볼 일이다. |









문화기획가 김정학 씨는 CBS와의 대담에서 일제 때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대구의 상징으로 재현하자고 제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