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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물 거리> 3·1운동길 :: 2006/09/21 21:57

<명물 거리> 3·1운동길
대구 3·1운동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대구에 '3·1운동길'이 있다는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듯하다. 동산병원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이나 길을 오가며 외로이 서 있는 표지판을 쳐다봤을까.

'3·1운동길'은 동산병원이 자리잡은 언덕 위로 난 200여m의 짧은 길이다. 이 곳을 찾으려면 대구 중구 동산동 동산맨션과 대구제일교회 옆으로 난 90계단을 찾는 것이 가장 쉽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동산병원 뒤편 언덕을 지나 서문시장으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이 그 옛날 3·1운동의 함성을 간직한 곳이다. 90개 계단은 옛날 리어카 등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계단 양 옆과 가운데에 경사로를 따로이 만들어 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곧바로 동산이 펼쳐진다. 잔디가 깔린 언덕 위에 오래된 주택 3개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1900년대 초 선교사들의 거주했던 고택들이다. 이 곳은 현재 동산병원에서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꿔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1999년 개원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선교사 사택 2곳에다 선교박물관과 의료박물관을 만들었고, 2001년에는 교육`역사박물관을 신설했으며, 2002년부터는 교육`역사박물관 2층에다 대구 3`1운동 역사관을 따로 두기도 했다.

의료박물관 옆으로는 종탑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담장허물기 운동의 메카인 대구. 그 첫 행사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담장을 허물었던 동산병원 정문 및 중문의 기둥과 담장을 옮겨다 놓고 여기에다 기독교 전파 초기의 종 하나를 기념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간혹 유치원생들의 놀이 공간과 신혼부부들의 웨딩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이달 14일 오전에 둘러본 '3·1운동길'은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3·1운동길'이라는 표지판 마저 없었다면 이 곳의 역사적 의미조차 알지 못한채 지나칠 판이었다.

이 곳은 1919년 당시, 대구의 독립만세 운동을 위해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대구고보(현 경북고) 학생들이 집결을 위해 지나갔던 자리였다. 이 동산의 솔밭길을 넘어 큰장으로 집결했고, 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경상감영을 지나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자리)까지 진출했다. 3월 8일 대구 기독교인들과 학생등 800여 명이 시위를 벌인 것을 기점으로 경북 곳곳으로 독립 만세의 함성이 퍼져나가 조국 독립을 위한 민중의 염원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이 곳이 '대구 3·1운동길'로 지정 받은 것은 지난 2003년. 역사적 의미조차 찾지 못한 채 80년이 넘게 버려져 있던 이 곳을 동산병원 전재규 명예교수를 비롯한 일부 향토 사학자들이 대구시에 건의해 명명받은 것이다.

또 이름을 되찾은 것과 때를 같이해 2003년과 2006년에는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인근 교회 등의 협조를 얻어 3·1독립운동 재현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며 대구 시민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겨우 이제 명색만을 되찾은 '대구 3·1운동길'. 이 곳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후대에 길이 알리기 위해서는 관계기관들의 협조가 절실하다. 이명수 동산병원 홍보팀장은 "현재 중구청에 지속적으로 건의해 안내 간판 등을 보강하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 운동기구 설치와 돌 마사지 구간 등을 갖춰줄 것을 부탁해 놓은 상태이며, 병원 측에서도 환자들의 산책로로서 활용하면서 그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작성일: 2006년 09월 20일



<명물 거리> 역사 되살린 전재규 교수
사람들 머리 속에서 잊어져 갔던 '대구 3·1운동'의 역사를 되살린 주인공이 있다. 전재규(70) 동산병원 마취통증의학과 명예교수. 평생을 의학에 전념한 그가 처음 3·1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99년부터다. 당시 동산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이해 '의료원 100년사 편찬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대구지역 3·1운동의 발상지가 바로 동산병원 언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대구 사람들은 흔히 지역의 3·1운동이 서문시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정보지요. 옛 지도에서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는 연못이었습니다. 이는 아마 '큰장'(일명 서문 밖 시장)을 지금의 서문시장으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큰장은 현재 섬유회관 자리에서 달성공원 인근까지였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 자료를 고증하기 위해 서울에 드나든 것도 여러 차례. 그 옛날 선교사들이 주고 받은 편지까지 일일이 번역해가며 정확한 대구 3·1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나갔다. 그러던 중 대구의 기독교 역사학자 이재원 씨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여규진 선생을 만나면서 의문의 실마리가 풀렸다.

"여 선생님이 증언하시기를 큰장 입구 강 씨의 소금집(현재 송월타월자리) 달구지 위에서 오후 3시에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만세의 함성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제가 종로초교(당시 희도학교)에서 찾아냈던 지도 2장에 기록된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이후 그는 2002년 5월 새롭게 밝혀진 역사적 사실을 집대성해 '동산병원과 대구3·1독립운동의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으며, 이듬해에는 대구시에 건의해 '대구3·1운동길'을 지정받았다. 또 대구 3·1운동 재연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대구 시민들에게 대구가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섰다.

그가 이렇게 3·1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집안 내력 때문이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그는 일제시대, 대동아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다니던 교회의 종까지 떼가 군수물자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일본에 대한 막연한 적대심을 키웠다고 했다. 그리고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던 장인어른은 자식 3명 모두를 학교에서 자진 퇴학시키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결국 옥고를 치르기도 했었다.

그는 "작은 골목길에 불과할수 있는 '3·1운동길'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아끼고 보존하고, 의미를 담느냐에 따라 그 역사적 가치가 달라질수 있다."며 "대구시와 시민들이 좀 더 많은 애정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한윤조기자
작성일: 2006년 0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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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풍수 두사충(杜師忠)과 대명동 - 죽어서까지 군대 보초 세웠나 :: 2006/08/15 11:23

- 출처 :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 (김두규 저, 2005)

전설적인 명풍수 두사충의 무덤(오른쪽)과 무덤 입구에 있는 모명재.

조선시대 명풍수로서 숱한 전설을 남긴 이 가운데 두사충(杜師忠)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중국에서 온 섭정국, 시문용, 이문통 등과 같은 풍수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지리에 밝아 명나라 군대의 '진지와 병영 위치 선정' 참모로 활동하다가 더러는 귀국하고, 더러는 조선에 눌러앉았다. 이들로 인해 조선 중기 이후 한반도 풍수, 특히 묘지 풍수 양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두사충은 생전에 경기 양평에 있는 한학사대가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조부묘를 감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그는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무덤을 정하는데 관여했기 때문에 그 전설이 아직까지도 전해오고 있으며, 그가 잡지 않은 자리까지도 '두사충이 소점한 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이 많다.

두사충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21대 후손이었다(두사충의 11대 후손인 고 두재규 선생이 증언했다). 그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처남으로, 복야(僕야 : 벼슬이름)로서 진린을 따라 조선에 왔다. 수군이었던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과 자주 만났는데 이때 두사충도 이순신 장군과 친교를 맺었다.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준 '봉정두복야(奉呈杜僕야)'라는 시가 아직까지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귀국했던 두사충은 정유재란(1597)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온다. 이때 그는 조선에 가지 않겠다는 부인을 혼자 중국에 남겨두고 두 아들만을 데리고 오는데, 그것으로 영영 부인과는 이별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진린 도독이 귀국하려 하자 두사충은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미 명나라가 망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가 대구에 정착해 '고국 명나라를 잊지 않고 섬긴다'는 뜻에서 '대명(大明)'이란 지명을 붙이고 살았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대명동'이다. '대명동'이란 지명은 경북 성주군 용암면에도 있는데 이 역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들어와 귀화한 풍수 시문용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붙인 지명이다. 시문용은 광해군 당시 실세 정인홍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가 궁궐터 소점에 관여한 풍수로 유명하다.

대구에서 살다가 죽은 두사충은 만촌동(대구 남부 시외버스 터미널 뒤)에 묻힌다. 그곳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잡아놓은 자리로 지금까지 그대로 전한다. 두사충의 후손들은 현재 전국에 약 100여 가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직계후손이 두사충 묘 입구에 있는 사당 '모명재(慕明齋)'를 지키며 살고 있다. 모명재 역시 고국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사충의 묘는 당시 중국 풍수들의 터 잡기 양식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서 현재 술사들이 선호하는 혈장(穴場 : 유골이 안치되는 일정한 곳으로서 혈을 이루며 특정한 형태를 갖춘다)을 찾기는 힘들다. 그 대신 주변 산들이 편안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곳을 감싸고 있다.

특이한 점은 두사충 무덤 주변에 국가정보원 지부와 2군사령부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손 두재규씨는 "살아있을 때도 군대 속에서 살았는데 죽어서까지 군사들을 보초 세울 정도로 땅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풍수에서는 '사람은 자기 세계관에 맞는 땅을 찾아 들어간다'고 말한다. 두사충의 세계관과 당시의 풍수 양식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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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대구 주요 군사시설들의 위치와 현재 :: 2006/06/24 14:14

한국전쟁.
그것으로 인해 대구는 본의아니게 군사도시로 급부상하게 된다.
남한에 남은 도시는 고작 대구와 부산 정도. 임시수도는 부산으로 가고, 대구에는 육군본부, 공군본부, 2군사령부 등 주요군부대가 들어왔다. 육본은 1950년 7월14일 대전에서 대구 중앙초등학교 근처로 옮겨와 그해 9월30일까지 머물렀다. 잠시 부산시 문현동으로 피란갔다가 그해 9월23일 현재 한국은행 대구지점으로 옮겨와 55년 2월27일 서울 삼각지로 올라간다. 2군사령부의 경우 54년 10월31일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태동했다가 상경한 육본 자리로 옮겨와 있다가 68년 12월3일 만촌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참고로 6·25 당시 주요 군사시설들의 위치를 알아보자.

공군본부는 서부초등, 육군 헌병대는 대구경북지방병무청에 자릴 잡았고, 산업은행 2층은 잠시 병무청으로 사용됐다. 수창초등학교에는 헌병학교, 경북대사대부속초등에는 27육군병원, 대구상고(현 상원고)에는 미5공군 사령부, 경북여고에는 육군포병학교, 달성초등학교에는 육군대학, 고성동 KBS방송국(현재 대구전신전화국)에는 전시연합대학교, 계성고와 대건고에는 육군병원, 삼덕·남산초등학교에는 신병 교육대, 경북대병원에는 제1육군병원, 희도초등학교(현재 희도맨션)에는 육본 통신감실, 영남중·고에는 포병사령부, 북성로 초입 대우유료주차장(일제 때 미나카이 백화점)에는 미군 헌병대가 주둔해 있었다.

1953년 종전이 됐지만 서울의 군사시설이 워낙 심하게 파손돼 상경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자연 50년대 대구는 거의 군인들 세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장사도 군인들을 상대로 해야 수입이 짭짤했다. 군용담요, 군복, 야전점퍼, 군화 등은 민간인들에게 쉽게 전해졌고 특히 미군들이 즐기던 맥주, 양주, 바셀린, 초콜릿, 추잉껌 등은 교동시장(일명 양키시장)으로 쏟아져나왔다. 밤만 되면 대구의 주요 요정에는 육·공군 장교들이 들끓었다. 춤을 좋아하는 부류들은 댄스홀로 몰려갔다. 특히 동촌 빨간 마후라들도 땅거미가 밀려오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향촌동은 물론 봉산동 공군홀로 놀러갔다.

공군홀은 1952년쯤 봉산동 64의1번지 320여평 넓이의 일제 때 사찰(천리교)을 매입해 공군들을 위한 댄스홀로 개조했다. 한옥 스타일이었고 넓은 주자창도 구비돼 있었다. 그 앞길을 따라 향교쪽으로 올라가다 보편 왼편에 일본군 80연대 장교관사가 현재 건들바위 무속박물관 옆까지 자리잡고 있었다. 공군구락부는 50년대까지 명맥을 잇다가 나중에 경북씨름협회한테 넘겨졌다가 30여년전 분할 신축됐다. 현재 43년 역사를 가진 대화약국이 입점해 있다.

당시 공군홀에서 연주생활을 했던 의학박사 김경수씨에 따르면 벽면 한쪽이 거울로 치장돼 있었고 천장에는 조잡한 조명등이 달려있었다고 한다. 무대는 정면에 없었다. 출입문을 열고 홀로 들어가면 왼편 모서리에 무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무대 높이는 30∼40㎝. 공군홀이 오픈할 즈음 군인들 사이에 춤바람이 불고 있었다. 박정희도 그때 지르박을 배웠다. 공군홀은 낮시간 사설 댄스교습소로 전락했다. 공군홀 지배인은 영업 시작전에 춤꾼들을 위해 백색 파우더를 나무로 된 플로어에 뿌려두었다. 미끌미끌해진 바닥 덕분에 더 신나게 춤을 출 수 있었다. 물론 홀을 나온 장교들의 군화는 들어올 때와 달리 가루가 묻어 백구두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공군홀에는 작곡가 김희갑은 물론, 조미미가 불러 히트를 친 '서산갯마을'과 이용복의 '그 얼굴에 햇살을' 등을 작곡한 김학송, 대구 KBS(당시는 KG홀) 악단장이었던 예천 출신의 색소포니스트 김상렬, 대구 지역의 기타1세대 장태화, 영남대 음대교수 심상균, 서방주택 권영균 회장 등이 지나갔다. 전속 악단들은 글랜 밀러 악단의 연주풍을 선호했다. 트로트, 블루스, 지르박, 탱고, 왈츠를 45분간 선보이고 15분 쉬고 다음 타임에 임했다. 가수들은 무대에 별로 오르지 않았다. 오후 7시 오픈해 4시간쯤 영업을 하고 악단은 보통 3타임 정도 연주를 했다. 언제나 마지막은 약속이나 한것처럼 왈츠곡으로 장식했다. 가끔 최연소 참모총장이 됐던 정일권도 춤을 추었다.

군인들이 모이는 곳엔 그들의 의협심 때문에 사건사고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동촌 K2 파일럿들은 민간인들한테 폼을 잡고 싶었다. 심지어 전투조종복에 빨간 마후라, 검정 미제 군용선글라스 라이방을 쓰고 퇴근하자마자 공군홀로 와 진을 치길 좋아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일부러 겁주기 위해 총알이 없는 권총까지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우려하던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당시 '봉산동의 김두한'으로 통하던 협객 한 명이 바로 그 맞은편에 살고 있었다.

그가 바로 대구시유도고단자회 회장이자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이경근 아버지인 유도 9단 이석도(75)였다. 경북 도경 무술경관이었던 그도 남한테 지길 싫어했다. 그날 술취한 김모 공군헌병 대위가 공군홀에 나타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석도한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김 대위도 한 주먹하는 인물이어서 다들 그에게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석도가 그에게 눈길을 준 것이다. 김 대위는 그걸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이석도에게 먼저 모욕을 준다. 이석도는 순식간에 김 대위를 플로어에 내동댕이쳐버렸다. 김 대위의 그 다음 대응이 가관이었다. 맥주병을 던지고 권총까지 빼내는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김 대위는 분을 참지 못하고 사흘이 멀다하고 이석도 집 근처에 나타나 이석도도 본의아니게 맘 고생을 했다.

이석도는 1953~59년 이승만 대통령 생일에 경무대에서 열렸던 무제한급 전국무술개인선수권대회에서 무려 7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의 집안은 유도 집안으로도 이미 언론에 여러번 대서특필됐다. 용근은 6단, 현근은 4단 등 동근은 4단, 경근은 6단, 승근은 4단 등 도합 33단이었다.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그는 지금도 그 시절 공군홀 맞은편에 살고 있다.
(도움말 신해철 전 대구일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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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 낳은 천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 2006/05/28 00:29



[1] [2] [3]

대구가 낳은 천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이에 대한 기록은 여러차례 발표되었지만 많은 호기심으로 항상 새로워지는 느낌은
그만큼 재능과 예술이 넓고 깊으며 많은 일화와 전설적인 이야기가 우리들의 잎에서 회자하기 때문이다.
팔능거사(八能居士)로써 문(文)에 능했는가하면 해박한 시(時)를 남겼고 글씨(書)를 잘 썼는가하면
그림(畵) 또한 감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게다가 거문고로 풍류를 즐겼고 바둑, 장기 또한 프로급을 넘어 당시의 대원군도 두 손을 들었다.
의술(醫術)에 대한 조예도 깊어 멀리 중국, 일본에서 조선의 명의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서민층에서 즐기는 화투, 투전, 골패 또한 당할 자가 없었다.
백년에 한 번 태어날 수 있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천재 서병오. 그의 발자취 뒤안길에는 많은 일화가
있기 때문에 여기 몇 구절 적어본다.
대원군(1820 ~ 1898)과의 만남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민비의 세력에 밀려나 운현궁의 울적한 생활에서
자신의 재능 상대자를 찾던 중 기재 서동(奇才徐童)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초청하였다.
이때 석재의 나이 17세였다. 대원군을 위시한 당시 명대신들의 경탄을 받으면서 대원군 이하응은
"나의 호는 석파(石破)인데 너의 호는 석재(石齋)로 하여라" 하고서 화첩을 하사 받았다.
또다른 호칭은 석재(惜哉, 惜才)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어쩄든 대원군은 석재와 동거 동침을 하면서
시, 서, 화로 연일하였고 특히 장기, 바둑을 많이 즐겼다.
대원군이 바둑을 연삼패(三敗)를 하니 크게 노하여 "이놈아! 한번쯤은 패해주어야지. 이놈을 골방에 가두어라." 하고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장기에는 하수였던 석재는 어느날 대원군에게 집을 떠나온지 몇 달이 되어 부모님을 뵈러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그길로 동대문 밖 절방을 얻어 머물면서 장기책을 구하여 열심히 연구하여 결국
대원군을 이기니 "석재(惜哉)로다 서동아"를 몇 번 거듭 부르며 양반집 출신이면 능히 관직에 앉혀도
손색이 없다고 하며 "아깝도다 석재(惜才) 야".하였다.
중국과 일본여행 석재는 제자인 긍석 김진만(肯石 金鎭萬)과 동행하여 37세와 47세에 두차례 중국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제백석(濟白石), 오창석(吳昌碩), 손문(孫文), 포화(浦華)등 중국 제일의 예술가,
정치인 등을 만났다. 그때마다 화국지개(華國之才)란 극찬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낙임정(駱任庭)
영국총통을 만나 나눈 국화에 대한 시가 그 당시 합방 이후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어 동아일보에 대서특필이 되었다.
'초나라 굴원(屈原)은 반찬으로 한 뒤에 이름이 멀리서 전해지고/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은 나물로 하여 그 향기는 끊이지 않는구나/
백.적.국화꽃 색 종류도 많지만 그 중에서 황색꽃이 제일이다'
라는 시는 우리 황인종이 제일이라고 국화꽃에 비유하여 읊은 국화그림에 병제한 시의 그림은
낙임정이 귀국하여 대영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동생 서상위(徐相緯)의 소개로 일본의 정계 거물이자 고문인 두삼만의 초총을 받게 되었는데
두삼만 또한 호방한 성격으로 글씨를 잘 썼으며 주색을 좋아하는 호걸로써 석재와는 일백 상통인 만큼
같이 동침 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사경을 헤메는 두삼만의 손자를 석재의 의술인 부자(附子)를 써서 구해주니 소동파(蘇東坡) 서첩 한권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 서첩은 석재 사망 이후 엄청난 가격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 명문 귀족들의 소개로 석재의 질녀(주병화 씨의 처)가 무시험으로 입학하였는데 정문에서
"조선에서 온 누구이다"고 하니 총장이 정문까지 마중나와주었으며 졸업때까지 맣은 배려를 받았다고
한다. (계속)

[2].석재의 스승
석재는 태어나면서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천재성으로 예술의 길을 걸었지만 그의 천재성에 맞는
또 다른 천재 선배들이 석재를 이끌었다. 석재 또한 이 분들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만년에 팔능(八能)이란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석재의 집안은 대대로 동화사의 대주지사였던 만큼 석재는 산사에서 큰 불편 없이 공부를 하였다.
석재의 부친 서상민(徐相敏)은 매일 종이 한권을 하인을 통하여 보냈고, 그 인편에 전 날 썼던 서화를
가져 오게 하여 일족인 팔하 서석지(八下 徐錫止)에게 서평을 받게 하였다.
주로 왕희지. 조맹부, 김생의 글씨와 개자원화보(介子園畵譜)를 익혔고, 뒤에 추사의 영향을 받은
대원군의 서법에 관심을 가졌다.
37세에 중국을 다녀온 이후는 안진경체를 익혔고, 차츰 구양순, 동기창, 소동파 등의 서법을 익혔다.
사군자는 중국에서 만난 포작영(浦作英)법을 따랐다.
그 가운데 추사체는 만년에 이르도록 떨구지 않았다.
학문의 길은 당시 영남의 대유학자요 문장가인 방산 허훈에게 사사받고 문학적인 기초와 학문의 방법을
물어 유학자로써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스승의 이름자를 별명으로 하명 받아 그의 작품중에
서훈(徐薰)이란 인각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후 경남 산청의 면우 곽종석(郭鍾錫)에게도 사사받았으며,
가장 정신적인 지주로 존경한 분은 석곡 이규준(石谷 李圭晙)이다.
석곡은 영일 석동 사람으로 중국의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와 상통하였다.
석재의 만년 회술에 공자 이후에 석곡이 유일하게 탄생하였다고 극찬하면서 7세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밥상을 마주하지 않았다고 할 만큼 존경하였다. 석재는 이렇게 많은 석학과 예술가들을
접하면서 학자와 예술가로서 급변하는 당시의 정세에도 흔들림없이 후일 팔능거사로서의 길을
걸어 갔던 것이다.
석재는 만년 팔능이란 별명을 얻어 전국적으로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석재의 제자 필자가 지난 1987년 그 문하생 긍석 김진만(肯石 金鎭萬), 운강 배효원(雲岡 裵孝源),
죽농 서동균(竹農 徐東均)등 23명의 서화를 가지고 영남교류전이란 전시회를 열어 연보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제자들을 열거하여 보면의술은 달성의 문경수(文敬洙), 청도의 이원세(李元世),
영일의 황보준(皇甫浚)등의 제자가 있다.
이원세는 무의당한약방으로 한때 대대 구 능인고등학교 앞에서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석재의 바둑제자로는 성주의 배상연(裵相淵), 경주양동의 이석홍(李錫泓), 합천의 김효석(金孝錫),
대구의 이근상(李根祥), 전남광주의 이노인등이 있다. 또한 바둑계에서는 국내 유일의 국수로 알려진
진주 노사초(盧史楚)와는 쌍벽을 이루었다고한다. 당시 국내 바둑계에는 유단제도가 없었으며,
최고수를 통칭 국수(國手)라 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현재와 같이 유단제가 있어 최고 유단자 6단이 석재와 여러차례 바둑 경선을 하였다.
대판매일조선판에서는 석재를 5단으로 필적하였다고 대서득필하였다. 뒷날 경북지사 일본이 아베가
석재의 바둑솜씨를 듣고 인력거를 보내 초청하여 대국을 가졌다. 석재는 두 판 이기고, 한 판을 져주니
여기에 힘을 얻은 아베는 결국 밤을 세워 바둑을 두었다.
석재는 새벽녘에 과로로 인한 뇌일혈로 오른 팔이 마비되면서 얼마 뒤 별세하였다.
석재는 바둑과 필연 아닌 악연을 갖게 되었다.
전라도 부안에 거주하는 대부호 아들 김성수(金性洙)가 석재를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는데
인촌(仁村)이라는 호를 지어 주면서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朝朝喚起自家魂 不是某 是血  細看字字行行意 舌弊唇焦出苦言

매일 아침 자기의 정신을 환기시키니 이것은 활자 끄으름이 아니라 피먖힌 흔적이구나.
글자 한 자마다 줄줄이 그뜻을 자세히 보지 혀를 헤치고 입술이 마르도록 고언을 말했도다.

'인촌 회고록'에 나오는 이 시를 보면 그 당시 동아일보가 일제히 필거하도록 격려한 시구로서
석재의 항일 정신의 일면을 볼 수 있다.

[3] 석재의 집안은 대구 진골목에서 오랜 세거를 이루는 집단 문벌이었지만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지는 못했다.그래서 그의 부모를 위시한 문중에서는 학자, 또는 정치가의 꿈을 키워 보았으나
천부적인 예술가의 길을 막지는 못했다.
일반 범인들은 어느 한편의 뛰어남도 어려운 법인데 석재는 팔능(八能)이란 별명을 얻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니 그 뒤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운집하였고 항상 그의 뒤안길에는 일화가 줄을 이었다.
석재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한 예술가로서의 친가 만석, 양가 만석 이만석의 재산을 탕진하면서
예술적 자존과 방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다 갔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 평양에 본부를 둔 권번(卷番)조합은 기생을 선출, 양성한 제도가 있었는데 풍류를
좋아하는 석재는 이곳 출신의 기생(지재, 이향, 연옥, 진옥, 비취, 염농산, 경란, 람전, 계난, 금심, 옥란,
금계, 근영 둥)과 숱한 염문을 뿌렸다. 뿐만 아니라 평양, 개성, 금강산을 비롯하여 진주, 동래, 경주,
밀양 등을 왕래하면서 무수한 기생들과 사랑과 시기를 받았다.
석재가 머물다 떠난 뒤에는 항상 염문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번은 평양 제일가는 기생 금계(錦溪)가 대구로 석재를 찾아왔다. 주안상이 차려지고 주흥이 돌면서
거문고, 가야금으로 시구(時句)가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 춤을 추는 금계의 치마폭을 움켜 잡은 석재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니 같이 동석했던 대구 갑부 이종면(李宗勉)은 그 자리에서 비단전에 연락하여
치마 한 벌을 지어오게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예술가로서, 장부로서 영남인의 기량을 발휘한 석재는 권번조합 고문을 맡아 진주에서 한 달간
머물면서 여러 기생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진작 진주 제일의 명기인 향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존심 강한 향전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석재의 뒤를 따라 대구로 와서 "나의 부족함이 무엇이냐"고
따지면서 석재에게 사모의 정을 토로하였다. 석재는 계획했던 방법인 만큼 결국 말년까지 향전과 함께
살았다. 혹자는 석재를 한 시대를 멋지게 살다간 임백호(林白湖)에 비견하여 풍류객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이래 몇 안되는 삼절인(三絶人)으로 석재를 세칭하는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는 도교적(道敎的)인 풍과 당.송(唐宋)의 품격을 갖추었으며 시대 저항적인 시편으로 일제의
집요한 회유와 협박에도 흔들림없이 자신의 길을 갔다.
서(書) 또한 대구의 원근에 있는 사찰, 서원등에 많은 편액을 남겼으며 그곳에서 사회를 열어
연축(聯軸)을 많이 남겼고 만년에는 생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작품전을 열어 동양 삼국을 놀라게 하였다.
화(畵)는 그의 유품중에서 초년의 작품이 가끔 소장가와 화랑에 보이며, 중년기의 작품은 희소하다.
석재는 중국을 두 번, 그리고 일본도 다녀왔다. 이런 견문이 결국 많은 작품을 남기게된 영양소가 되었다고 하겠다. 외국 방문 때마다 최고의 예술가, 정치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나라 잃은 정세속에서도
국위를 떨치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존앙(尊仰)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의 길은 고집했기 때문 일 것이다.
결국 이 길로 만년에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해 버린 석재는 허탈과 무위(無爲)의 자신을 원망하면서
필자에 없는 사업인 국농소(國農所)허가를 내어 개간 간척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엄청난 재산 손실은
보게 되었다. 그때 나이 60여세, 석재는 몹시 슬펐다.
석재는 한 평생 후회없이 이 세상을 크게, 높게 살아왔지만 어느 한편 완성을 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며 후일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만득(晩得)의 외아들 복규(復圭)와 같이 한집안에서 자란
신대식(申大植, 의사)을 불러 의교(義交)를 부탁하고 후사(後嗣)를 걱정하였다고 하니
만년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하늘이 낳은 천재 서병오. 영남이 배출한 기재만능(奇才萬能)의 예술가.작고한 지 어언 62년이 지난 지금
그의 무덤도 없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소장가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흔한 도록 한권, 논문 한편 나오지 않았으니 후일의 상유지목(桑楡之木)을 바랄뿐이다.
일제 강점기의 한 시대를 살다간 예술가 석재에 대한 단편적인 여재의 글을 마친다.
풍성한 가을에 추수한 농부가 빈 들판을 바라보는 허탈감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김항회. 대구화랑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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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6)국채보상운동 불 지핀 서상돈 :: 2006/04/06 23:25

정영진의 대구이야기-(6)국채보상운동 불 지핀 서상돈
민초들의 애국심 결집
“석 달만 담배를 끊은 돈으로 나라 빚을 갚자”며,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꼭 90년 뒤인 1997년 11월 IMF 환란 때 다시 한번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외채를 덜기 위해 시작된 민초들의 자발적인 ‘금 모으기 운동’이 ‘제 2의 국채보상운동’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못난 위정자들 탓에 선량한 국민들이 남부끄러운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만은 공통된다. 또 ‘운동’의 산술적 성과 여부는 별개로 치더라도, 민초들이 뿜어낸 애국의 기개만은 둘 다 내외에 과시한 바 있었다.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고, 한 끼 밥은 굶을망정 담배만은 피워야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 금연이요, 단연(斷煙)이다. 일본 외채 1천300만 환을 갚기 위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 석 달만 담배를 끊어 모으자고 대동광문회의 서상돈이 주도했을 때, 대한제국의 골초들은 어쩌자고 순순히 따라주었을까. 그러잖아도 이 무렵 ‘스타’, ‘리리’, ‘야마사쿠라‘, ‘아사히‘ 따위의 상표를 단, 향기 그윽하고 피우기 쉬운, 일본산 궐련들이 쏟아져 나와, 새로운 흡연재미에 푹 빠져있던 조선의 골초들이었다.

수입 궐련에 대한 인기가 치솟자, 대구의 두 연초 거상이던 마쓰모토(松本)상점과 나카오(中尾)상점이 무허가로 사제 궐련을 만들어 팔아 큰 재미를 보고 있었다고 당시의 일본신문은 전하고 있다. 잎담배를 담아 물던 장죽이나 곰방대를 멀리하고 궐련흡연에 한창 열을 내던 골초들이다. 대구에서만 당시 일화로 7만 원쯤 모아질 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가 언제 우리에게 밥 먹여주었어?” “망우초(忘憂草)마저 안 피우곤 이런 말세를 어떻게 살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불가사의하다.

전국의 날품팔이 노동자, 기생, 백정, 인력거꾼들이 헌금에 더 열성적이었다는 기록은 더욱 놀랍다. 그들의 가난과 박탈당한 인권이야말로 ‘나라가 못 구해준’ 대표적인 사례였는데도 말이다. 또 남성우위사상에 짓눌려만 살던 대구, 서울, 부산, 진남포, 진주의 부인들이 패물을 모아 보상금조로 내 논 것 역시 ‘눈 먼 자식의 효자’치곤 너무도 섬뜩한 우국충정의 단성이라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기적 같은 애국심의 발휘는 운동의 주도자 서상돈의 덕성과 친화력, 솔선수범하는 계몽정신이 불을 지핀 결과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851년생으로, 증조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던 그는 세 번이나 엄혹한 교난을 겪고도 자수성가, 1886년에는 경상도 시찰관(視察官)이란 벼슬까지 제수 받은, 대구유수의 갑부였다. 천주교대구교구 개설 후에는 성직자 돕기와 선교, 빈민구호에도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서시찰(徐視察)이란 존칭으로 곧잘 불리던 그는 남보다 싼 소작료를 받아 인기였다. 소작권은 공평하게 나눠주었으나 다만 천주교신자에게 우선함으로써 선교의 기회를 넓히려 애썼다.  

신부가 예비신자에게 세례를 주기 직전, 교리를 얼마나 깨우쳤나 물어보는 ‘찰고’라는 수순이 있었다. 첫 질문은 대체로 입교(入敎)동기에 관한 것으로, 신부가 한 촌로에게 물었다.  

“신자는 어찌하여 성교(聖敎)를 믿나뇨?”

말이 떨어지자 마자 촌로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서시찰 어른 논 붙일라꼬 예!”

물론 정답은 아니었으나, 너무도 솔직한 답변에 신부는 웃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구에 있는 국채보상공원을 볼 때마다 아무리 훌륭한 제 2의 서상돈이 나와도, 제 3의 국채보상운동만은, 그리고 위정자들의 그 비슷한 ‘나라 말아먹기’만은 제발 없었으면 싶어진다.

- 2006년 02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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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대구이야기) 대구 친일거두 '박짝때기' :: 2006/04/06 23:24

(대구이야기) 대구 친일거두 '박짝때기'
친일청산 문제로 뒤늦게 시끌벅적한 시대상을 보면서 대구사람들은 더러 목격했거나, 귀동냥으로 들은 ‘박짝때기’의 일화들을 떠올릴지 모를 일이다. ‘박짝때기’란 대구 출신의 친일거두인 박중양(朴重陽)의 별명이다.

지팡이나 막대기의 경상도식 표현이 ‘짝때기’이다. 근대화의 물을 먹은 ‘개화장이’들이 한때 서양 신사들을 흉내낸답시고 ‘개화장(開化杖)’을 짚고 다니며 으스대던 풍조가 있었다. 벼슬이 높아진 박중양도 중년 이후 이 개화장을 애용하며 뽐내고 다녀, 사람들이 비꼬는 뜻에서 가져다 붙인 별명이 ‘박짝때기’였다. 뒤따르는 하인 한 사람을 대동하고, ‘朴’이란 큰 글자가 쓰인 전용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관가를 누비던 박짝때기였다. 그는 도지사나 고등법원장한테도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기미 기다까”(자네 왔는가)했나 하면, 밉게 보인 순사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 특출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1874년생인 박중양은 원래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태어났으나 1904년 대구군수로 부임하자, 대구의 풍물에 반해 원적(原籍)을 아예 대구로 삼고, 80평생을 대구에서 살다간 사람이다. 중인 출신으로 26세 때인 1900년, 한말의 관비유학생으로 동경에 유학, 청산(靑山)학원과 동경부기학교를 졸업한 신지식청년이었던 그는 임관 얼마 뒤 이등박문을 만나게 되면서 친일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다. 대담하게도 스스로 ‘이등’을 찾아가, “조선엔 희망이 없어 미국유학이나 하고 싶으니 도와 달라” 했더니, “당신 같은 기백 있는 조선청년은 처음이다”며 주선해준 자리가 대구군수 감투였다는 것이다.

그가 “이등의 양자였다”는 소문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양자는 아니고 은사였지”함으로써, ‘이등’과의 밀접했던 관계를 간접으로 시인한 바 있었다. ‘은사’에 대한 보답에서인지 박중양은 친일을 초지일관의 신념으로 삼고, 권세와 영화가 보장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대구성을 철거한 것도 그 일례였다. 이등박문의 비호로 오히려 평안남도 관찰사로 영전하게 되자, 일인들은 금시계를 증정하며 그의 ‘영단’을 두고두고 기렸다. 그의 후반생 은거지가 되었던 대구시 침산동의 침산(砧山·일명 박짝때기산·현 침산공원) 한 덩어리 전체도, 이때의 땅 투기로 거부가 된 일인들이 주선해 준 '사은품'의 성격이 짙다는 소문이었다.

이후 그는 두 번째 경북관찰사를 거쳐 충남도장관, 황해도지사, 충북도지사 등을 역임하고 1927년에는 총독부 중추원참의, 1943년에는 마침내 훈일등(勳一等)으로 서훈되며, 조선인으론 최고의 영직인 중추원 부의장에까지 오른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 75세였던 그는 최고위직을 지낸 최고령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특위가 와해되면서 풀려나게 되자,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대구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한술 더 떠 83세의 고령임에도 일본 여자인 48세의 제2부인과 은거해 살던 1957년 10월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의 젊은 시절에 관해 명예훼손 발언을 하는 바람에 검찰에 불려가야만 했다. “노망한 탓이니 한 번만 용서해 주소”하며 빈 끝에 무사할 수 있었으나, 일세의 친일거물 박중양으로서는 인생 말년의 이 퇴락한 시절이야말로 수즉다욕(壽則多辱)이자, 도타운 햇살(重陽)은커녕, 짙은 그늘(重陰)의 세월이었음이 분명했다.

정영진

- 2006년 01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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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박중양

'이 땅의 황국신민들' - 이토오 히로부미의 '양아들'

친일 흠모론에 이른 야마모토

▲친일거두 박중양이 서울로 압송되고 있는 모습.
일제가 조선 식민통치 25주년을 기념하여 편찬한 {조선공훈자명감}(朝鮮功勳者名鑑)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이토 이하 총독부의 대관으로부터 역량·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知事)급에서는 박중양이다." 이렇듯 박중양은 일본인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뢰도 받았던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박중양이 친일파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다.

경기도 양주 출신(경북 달성 출생이라는 기록도 많으나, 그가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관계로 착오가 있었던 것같다)이었던 그는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서울에 있던 일본인과 긴밀하게 교제하였고, 그들의 권유와 "일본인과의 교제 이래 국가 관념이 생기고 정치 방면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 1897년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박중양은 일본에서 약 7년간 생활하였다. 기독교 목사였던 혼다(本多庸一)의 식객으로 생활하다가, 그가 경영하던 아오야마(靑山英和)학원 중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00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는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연구 실습하였다. 이어 1903년에는 도쿄부기학교에서 은행업무를 익혔다. 이때 그는 야마모토(山本信)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본 생활을 통하여 그는 많은 일본인 관료들과도 사귀었다. 특히 후지야먀(富山)현의 지사였다가 '병합' 후에 경기도장관이 되는 히카키(檜垣直右), 그 서기관이었다가 충북도장관이 되는 스즈키(鈴木隆) 등과도 교류하였는데, 같은 시기에 충남도장관이 되었던 박중양은 이를 "이웃 도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신(神)의 작희(作戱)라 할까, 꿈 밖의 꿈"이라고 감탄하였다.

박중양은 러일전쟁 때 귀국하여 고등통역관 대우로 참전하였는데, 인천, 진남포, 용암포, 안동현 등지에 종군하게 된다. 종군 생활을 마친 그는 농상공부 주사가 되었으나, 대구에서 거처하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대구는 그에게 낯선 지방이었지만 경성 정계의 동향을 관망하는 데 편리하고, 만일의 경우 도쿄로 가기도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의병의 공격을 피하고 일본으로 도망가기 쉬운 철도 연변에 모여 살았던 것과 같은 발상이었다. 박중양은 대구에서 1년을 지냈다. 일본인과의 교제, 일본 생활, 종군 생활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을 철저하게 신뢰하게 되었다. 즉,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우수성을 높게샀으며, 그들의 친절에 감탄하였고, 일본인 기녀에 대해 좋은 추억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국정 개선을 위해 생명을 돌보지 않고 자원하는 일본인의 의협심을 가슴에 담게 되었다. 일본을 이렇도록 흠모한 박중양은 이와 반대로 조선인들은 야만스럽고, 도벽이 있고, 또한 파괴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말의 탐학한 관찰사

당시 대구에서는 경부선 개통 이후 이곳에 몰려든 일본인과 경북 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관찰사의 일을 방해했고,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연유로 박중양이 대구에 있던 1년 사이에도 장승원, 이용익, 이근호, 신태휴 등으로 관찰사가 빈번하게 바뀌었다. 이때 박중양은 이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때로는 일본인의 편에서, 또 때로는 중간적인 입장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런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게 되어 그는 군부 기사가 되기에 이르는데, 의친왕이 일본에 갈 때 수행원(통역)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이토의 힘으로 대구군수 겸 경북 관찰사 서리가 되었다. 수행원으로 갔을 때 이토에게 잘보였던 것과 일본인 거류민단의 소개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토는 박중양을 철두철미하게 신용하고 옹호하였으며 또한 애지중지하였다. 이런 탓인지 이토의 양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구군수로서의 박중양은 역시 대구에 있던 일본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일본인들이 가장 원하고 있었던 것은 대구성벽을 없애는 문제였다. 훗날 일본인의 회고에서도 이 문제를 "대구 분요(紛擾:분란)의 병원(病源)"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의 대구는 성을 경계로 하여 상권(商圈)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성내의 상권은 조선인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상권을 장악하려고 노심초사하던 일본인 상인들은 당연히 성벽을 허물어 상권의 구역을 없애려고 하였던 것이다.

박중양은 일본인의 요구를 충실히 좇아 일진회 회원을 동원하여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는 도로로 만들었다. 오늘날 대구의 동성로, 남성로, 북성로, 서성로가 바로 그 길이다. 일본인 상인이 상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박중양을 일본 거류민들은 극구 칭찬하였다. 일본인들은 그를 '야마모토 군수'라고 불렀으며, 그 이전의 관찰사들이 대개 '한국식 대관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직 한 사람, 일본 유학생으로부터 일어난 활동적인 걸물아'라고 칭찬하였다.(대구부 편, {대구민단사}, 78∼81면) 박중양의 이런 처단은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지 않고 단독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부에서는 박중양을 징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박중양의 배후였던 이토의 구원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박중양은 오히려 평남 관찰사로 영전하였다(1907). 그리고 다시 1908년에는 경북 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에도 일본인의 편에서 행정을 실시하였다. 1908년 12월에 '일한민간친회'(日韓民懇親會)가 열였을 때 "소생이 일신을 바쳐 이 땅을 위해 진력하고자 함에는 일본인 제군의 지도편달에 달려있습니다.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일본인의 지도·계발을 요구하기도 하였다.(河井朝雄, {大邱物語}, 314∼315면)

이때의 이런 탐학과 친일활동을 당시의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군수 노릇 할 때에는 성첩(城堞) 헐어 매식(賣食)하고, 관찰사로 있는 후에는 객사(客舍)까지 훼철(毁撤)터니, 황상폐하 남순(南巡)시에 일기불현(日旗不懸)하였다고 수창(壽昌)학교 폐지코자 학대(學大)에게 보고하니, 탐학하고 돈 잘 먹기 박중양이 날개로다. ({대한매일신보}, 1909. 2. 12, 春不春) 중양가절(重陽佳節) 말 말아라. 통곡(痛哭)일세 통곡일세. 누백년(屢百年)을 존숭(尊崇)하던 대구객사(大邱客舍) 어데 갔노.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 중양가절(重陽賈節) 말 말아라. 전무후무(前無後無) 비기수단(肥己手段) 대구성곽(大邱城郭) 구공해(舊公해)를 일시간(壹時間)에 팔아먹네.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대한매일신보}, 1909. 1. 16, [重陽打令] 大邱童謠) 또한 평안남도 관찰사 이진호*(그도 유명한 친일파였다)가 탐학을 행하자 그를 '제2의 박중양'이라고 비난하면서, 남쪽 대구의 박중양의 혹독한 수완에 놀라워하며, 무고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슬퍼하였는데, 평남의 이진호는 심술과 수완이 모두 박중양과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박중양의 횡포로 인민이 고통은 말도 못할 지경인데, 박중양이 둘이나 되니 인민이 어떻게 살아갈지 민정(民情)을 슬퍼한다는 것이었다.({대한매일신보}, 1909. 1. 31, 논설 [第二朴重陽])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

'병합'이 되자 그의 친일행각은 날로 빛을 발하였다. 물론 그는 당시에 "폭풍과 홍수를 방어할 지력이 없고, 대세를 저항할 실력이 없다.……요로에 있으면서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취할 길"이라는 근사한 이유를 내세우면서 계속하여 총독부의 고급 관료 자리를 옮겨다녔다. 1910년 충남도장관을 거쳐, 1915년 중추원 참의, 1921년 황해도 지사, 1923년 충북 지사, 1927년 퇴관하여 다시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었다.

그는 여러 총독 가운데서도 특히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을 좋아했다. 데라우치가 조선인을 본위로 정치를 행하여 조선 말기의 암흑시대를 명랑하게 만들었고, 특히 관개사업을 추진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고 평가하였다. 이런 총독 아래에서 도장관, 참의를 지냈던 것을 그는 아마도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3·1 운동의 무모성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직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리고 3·1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진압을 지휘하였다. 다름 아니라 자제단(自制團)을 통해서였다. 4월 6일 대구에서 '자제단 발기인회'가 조직될 때 그는 단장이 되었다.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소요(3·1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곧바로 경찰관헌에 보고한다는 서약까지도 했다. 이 이후 경북도 참여관 신석린이 주동이 되어 안동, 성주, 군위, 김천 등지에 자제단이 조직되었다.

중국 침략를 감행한 일제는 그 침략적 야심을 착착 진행시켜 나가면서 마침내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치달았다. 이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장기전에 대처할 대내외 중요 정책을 입안·심의하기 위해 전시 최고 심의기관을 설치한다는 구상을 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8월 27일 칙령 관제로 시국대책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조선총독의 감독에 속하고 그 자문에 응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시국대책에 관한 중요 사항을 조사·심의"한다는 기구였다. 여기에서 논의되고 결의된 것은 조선총독에게 건의되었다. 제2의 중추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구성을 보더라도 정무총감이 회장이 되고 총독부의 현직 고등관들이 대거 참여하였던 점에서 중추원보다도 오히려 더 막강한 기구였다. 97명의 위원 가운데 조선인은 고작 11명뿐이었다. 박중양을 비롯하여 김연수, 박영철, 박흥식, 윤덕영, 최린, 현준호, 한상룡 등 이들은 일제말의 대표적인 친일파들이었다.

이 위원회는 총독의 자문사항 18항목을 심의하기 위하여 편의상 3개 분과회로 나뉘어졌는데, 박중양은 문화·사회관계 및 일반사항을 다루는 제1분과에 소속되어, ① 내선일체의 강화·철저, ② 조선·만주·북지(北支)간의 사회적 연계 촉진, ③ 재지(在支) 조선인의 보호·지도, ④ 반도 민중의 체위 향상과 생활 쇄신, ⑤ 농·산·어촌 진흥운동의 확충·강화, ⑥ 사회시설의 확충, ⑦ 노무의 조정 및 실업의 방지·구제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때 박중양은 특히 내선일체와 농촌진흥 문제에 관심을 보여 발언하기도 하였다. 이런 활동과 더불어 1941년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이런 지위에 있으면서 박중양은 당시의 각종 친일조직에 참여하였다. 1941년 10월에 결성된 임전보국단의 고문, 1943년 1월 국민조선총력연맹(1940년 10월 설립)의 '참여'를 맡았으며,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하여 경남지방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일본이 싱가폴을 점령하자 '노구'(老軀)를 이끌고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싱가폴까지 가기도 하였다.(이때의 모든 경비는 김갑순이 부담하였다) 이런 친일 활동의 결과, 그는 1945년 귀족원 칙임의원이 되었다. 최상급의 친일파 7명에 끼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다"라는 망언

해방 이후 그는 반민특위에 의해 반민 피의자로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9년 1월이었다. 그런데 수감된 지 8∼9일 만에 폐렴이 발생하여 서울대학병원에서 몇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물론 다른 반민족행위자와 마찬가지로 흐지부지 처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에게서 친일행위에 대한 반성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반민법에 의해 잡혔던 것도 "시대 변혁의 희생이라, 역사는 윤환(輪環)하고 인사는 변천한다. 고금왕래(古今往來)로 크게 본다면 일소(一笑)에 불과한 희비극(喜悲劇)이다"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는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에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改新)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라고까지 했으며,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고 하여, 한말보다 일제시대가 훨씬 좋았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완용을 매국노라 매도하여 말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용이하되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당면한 지도자가 선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할 수 없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는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이전(利戰)은 될지언정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할 방도는 아니다.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다.(박중양, {술회})

최근 대구매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매일정보}라는 신문에 박중양에 관한 이야기가 3회나 실렸다([김용진의 대구이야기], 1991. 9. 27, 10. 4, 10. 11). 그 기사에서는 '뛰어난 일본어 실력', '총독부에서도 아깝게 본 인격과 식견' 등으로 박중양을 묘사하면서, 조선학생들을 구금한 일본인 헌병대장을 혼내고 학생들을 석방시킨 이야기, 실업청년들을 일본인에게 부탁하여 취직시킨 이야기 등을 소개하였다. 그러자 독립유공자협회, 독립유공자유족회, 광복회 등에 소속된 몇명의 회원들이 공동으로 이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 활동하였던 거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두 단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일화이다.

■ 김도형(계명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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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4)문화재 수탈 거물 오쿠라 :: 2006/04/06 17:37

정영진의 대구이야기-(4)문화재 수탈 거물 오쿠라
일제 패망하자 유물 숨겨놓고 귀국
42년 전인 1964년 6월 17일, 대구에서 때 아닌 ‘보물소동’이 벌어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날 대구시 중구 문화동 38번지에 있던 육군 8053부대(방첩대)의 지하실에서 신라시대 각종 토기를 비롯, 삼국시대 및 송·명대의 희귀 문화유물 149점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전국의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지하실에 들어간 전기수리공에 의해 처음 발견된 유물들 가운데는 신라시대의 귀면와(鬼面瓦), 연화문와(蓮花紋瓦) 등 각종 토기와, 고려시대의 청동경(靑銅鏡)과 자기류, 송·명대의 채색호(彩色壺)와 옥잔 등 보물급 문화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발견 당시 유물들은 60여 개의 오동나무 상자에 담겨, 6평쯤 되는 으쓱한 지하실 바닥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보물급 유물 외에도, 근대 일본의 국보급 서화('동해도 53차’) 20여 점과, 고려자기 및 일본의 근대 고급자기 수백 점도 함께 발견되어 고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지하실이 포함된 주택의 원소유주가 일제 강점기 대구의 거부이자 유명한 고미술 수집가였던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였음이 밝혀져, 이들 유물 역시 그가 수집, 소장하다가 일제 패망으로 귀국하면서 은닉해 둔 것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1870년 8월, 일본의 지바(千葉)현에서 태어난 오쿠라는 가냘프면서도 지적으로 생긴 용모답게 동경제대 법대를 졸업, 35세 때인 1905년 봄 이주 1세대의 일원으로 대구에 정착한 사람이다. 그는 이주해오기 3년 전, ‘콜브란’이란 미국인으로부터 민간 전기사업이 장차 조선의 유망사업이 될 것이란 귀띔을 받고, 이 사업에 관한 각종 자료를 잔뜩 갖고 대구에 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구성 철거에 따른 땅 투기로 전기사업을 위한 종자돈을 듬뿍 마련한 오쿠라는 처음 50㎾의 소규모 발전사업에서 시작, 30여 년 만에 조선 전기계의 왕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대구는 물론, 서울, 회령, 함흥, 광주, 울산, 제주, 여수, 순천, 고성, 안동, 경주 등 전국에 자매전기회사를 거느린 ‘대흥전기회사’의 사주가 된 것이다. 이들 회사들이 해방 후 모두 ‘남선전기’ 회사로 통합되었다가 나중 ‘한국전력’의 모태가 되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전기사업에서 번 돈으로 금융업에도 진출한 그는 대구상공은행두취(頭取:은행장)와 대구증권회사 사장도 겸했다. 또 대구상공회의소 회두(會頭:회장)와 경북도평의원, 대구부(府:시)의원도 수 차례 겸직, 대구의 대표적인 거부이자, 영향력이 큰 인물로 손꼽혔다.

그의 취미는 골동품 수집, 그 중에서도 신라문화유물에는 일가견을 지닌 독보적인 수집가였다. 국보급 신라금관과 금불상은 물론 각종 진귀한 토기류가 그의 수집대상이었다. 이 밖에도 값 비싼 고려청자, 이조백자, 청동유물, 서화류 등이 대량으로 그의 손에 들어갔다. 전쟁말기에 이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밀반출되어 안전한 곳에 은닉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오늘날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는 바로 그 ‘오쿠라 컬렉션’의 모체이기도 하다. 20여 년 만에 발견된 대구 옛집의 유물도 결국 더 귀중한 탈출봇짐에 밀려 뒷날을 기약하고 숨겨둔, 그의 ‘2류급 애장품’에 불과했던 셈이다.

골동품 수집에는 재력과 안목 외에, 열정이 따라야만 가능하다. 열정이 지나치면 ‘탐욕’일 수밖에 없는데, 오쿠라의 경우는 ‘열정’이란 미명 아래 조선고미술에 대한 편집광적 수탈욕구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 정평이다. 골동품에 대한 가치인식이 희박하던 시절에 그저 줍다시피, 혹은 칼과 돈으로 한껏 수탈해 갔음에도 오쿠라는 못다 가지고 간 유물들이 애석해, 여러 번 염탐꾼을 대구에 보냈다간 실망만 크게 하고 숨졌다는 후문이다.

- 2006년 01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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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3)땅투기 원조는 백 년 전의 일인들 :: 2006/04/06 17:36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3)땅투기 원조는 백 년 전의 일인들
1906년 10월 하순. 성벽 근처에 살던 대구성내 사람들은 성벽이 무너지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새벽잠에서 깼다. 집 밖을 뛰쳐나온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인들의 지휘감독 아래 60여 명의 조선인 인부들이 10여 조로 나눠져 사방에서 일제히 성벽을 부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 12(1736)년 6월에 축성된 대구성은 높이 18척(약 5.4m) 총길이 2,124보(약2,200m)의 석성이었다. 그동안 관리부실로 군데군데 허물어진 곳도 있었으나 ‘대구사람’이란 호칭 대신 ‘성내사람’이라 불리길 더 좋아할 정도로 대구성은 은근한 자부심의 원천으로 대구토박이들의 사랑을 받아 왔었다.

주로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축조된 평지의 성곽이었던 만큼, 임금의 윤허 없는 인위적인 파손행위는 안보 차원의 중벌로 다스려져 온 것이 전통이었다. 따라서 사전 예고도 없는 가운데, 다름 아닌 ‘굴러온 돌’격인 일인들에 의해, 새벽에 벌어진 기습철거행위는 조선왕조의 사직 한 귀퉁이를 무너뜨리는 상징처럼 비쳐져 성내사람들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뒷날 무용담 삼아 늘어놓은 일인들의 ‘회고기’ 등을 통해 대구성벽철거사건의 속내가 들어난다. 당시 대구군수이자 경상북도관찰사서리였던 박중양(朴重陽)과 대구의 일인들이 한통속이 되어 몇 년간 은밀하게 추진해 오던 땅 투기 작전의 ‘완결편’으로 감행된 것이 이 사건의 숨은 진상이었다.

이 무렵 대구성내의 땅값은 당시 일화(日貨)로 평당 23원꼴이었다. 반면 성 밖은 불과 6원, 좀 비싸야 10원 꼴이었다. 수입성냥 한 갑이 4원10전, 삿포로 맥주 한 병이 12원50전 하던 시절이다. 따라서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 땅값이 폭등하리란 사실을 이재(理財)에 잽싼 일인들이 모를 리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값싼 성 밖의 임야며 전답에 눈독을 들여 매물이 나오는 대로 싹쓸이를 해오고 있었다.

그 다음의 일은 하루 빨리 성벽을 허무는 공작이었다. 도로개설의 장애물인 성벽부터 걷어내어야 대구가 클 수 있다는 명분론을 앞세워 관리들을 부추겼다. 그러나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절차상 관찰사가 올린 상소에 임금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평균재임기간이 반년에 불과했던 구한말의 경북관찰사들은 이 말썽스러운 중대사안에 누구도 선뜻 총대를 메려하지 않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박중양이었다.

적극적인 조기철거론자였던 그는 이때 마침 관찰사서리직을 잠시 겸하게 된 틈을 이용해 일인들의 모의에 동조했다. 부산에서 은밀히 인부들을 불러들여 벼락치기로 성벽을 허물고 나면 최고 관리책임자 자격인 박중양이 온갖 행정적 뒷감당을 한다는 다짐 아래 자행된 기습철거였던 것이다.  

성이 헐리고 길이 나자 성 밖의 땅값은 평당 60원, 성안은 230원으로, 불과 반년 만에 열 배나 폭등했다고 일인들은 흥겹게 회고했다. 일제하 오꾸라 다께노스케(小倉武之助) 남선전기 사장과 같은 일인재력가가 유독 대구에 많았던 것도 이때에 한몫 보아 종자돈이 푸짐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헐값에 전답을 날린 조선인들이 땅을 치며 통음(痛飮)하는 한 편에선 거부가 된 일인들의 건배소리가 날로 높았다. 고종을 깔보고 ‘선 철거 후 보고’를 했던 친일원조 박중양은 그 뒤 투옥될 뻔했으나 이등박문에 매달려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 2006년 01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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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2)반일 관찰사 이용익 :: 2006/04/06 17:36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2)반일 관찰사 이용익
日人에 ‘토지매매 금지령’ 시행
을사늑약이 있기 반년 전인 1905년 봄, 대구에 감영(監營)이 있는 경상북도의 관찰사(觀察使·현 도지사)는 이용익(李容翊)이었다. 1854년 함경도 명천(明川)에서 상민으로 태어난 이용익은 청년시절 보부상으로 출발, 금광개발로 밑천을 잡아, 중앙정계로 진출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임오군란 때 민비 측의 충직한 심부름꾼이 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린 그는 단천(端川)군수를 시작으로, 탁지부대신, 군부대신 등 최고 요직과, 서북철도국 총재, 헌병사령관 등 쟁쟁한 관직을 두루 거친 중앙정계의 거물이었다.

그러나 국가재정과 산업에 대한 갖가지 개혁조치로 고종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은 얻었으나 정적으로부터는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또 일본도 친로파(親露派)의 거두인 그를 1904년 2월 일본으로 강제압송, 억류하기도 했다. 1년 만에 풀려난 그를 고종이 눈치껏 앉힌 자리가 외직이자 한직인 경상북도 관찰사 직이었다.

이에 가장 놀란 측은 대구의 일인들이었다. 반일의 거물이 와서 예상치 않은 부담거리를 안겨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일인들은 그 자위책으로 먼저 친일성향인 장승원(張承遠) 현직 관찰사의 유임운동부터 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내놓고 이용익을 모함하며 배척공작에 나섰다.

'...함경도의 한 필부가 고종의 충복임을 기화로 가렴주구를 일삼더니, 이제 관찰사로 좌천돼 온다. 그가 과연 반성을 하고 오겠는가…'라는 내용의 선동유인물을 돌리면서였다.

오직 나라와 고종을 위해 다시 일하겠다는 각오뿐이었던 이용익은 이런 분위기에는 아랑곳 않고 그다운 혁신시책을 펴나가기에 열중했다. 불법징세 엄단, 협잡배 추방, 도로와 관아의 개보수, 신교육장려 등 전임자들이 등한시하던 파격적인 시책들이었다. 특히 ‘청결법’을 들고 나와, 길거리 청소에 둔감했던 관속들과 주민들을 혼내주기도 했다. 대구의 거리는 이 즈음 나뒹구는 인분과 가축의 배설물로 온전하게 다니기 힘들 정도로 불결했다고 한다.

눈에 번쩍 뜨이는 이런 개혁시책을 가장 반긴 측은 의외로 일인들이었다. 잘하면 대구의 개발이 앞당겨져, 대구 땅에 운명을 건 자신들의 미래가치가 크게 향상될지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이 바람에 거꾸로 이용익을 감싸고 두둔하는 분위기마저 잠시 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용익은 역시 소문대로 반일의 거목이었다. 일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4월 초, 일인들에 국한한 ‘토지매매금지령’을 전격적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매매당사자는 물론 중개인들도 어기면 처벌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실제로 영을 어긴 조선인 중개인 20여 명을 옥에 가두기도 했다. 거류민 신분임에 불과한 일인들이 막강한 자본력을 배경으로 조선의 토지를 무한정 매입하는 현상을 방치하다간 민족경제에 큰 해악이 되리라 판단한 데서 취해진 조치였던 것이다.

벌컥 뒤집힌 일인사회는 곧바로 반격으로 나왔다. 4월 28일 감영의 선화당(宣化堂)으로 몰려간 일인들은 “악법반대!” “반일 감찰사는 물러가라!”며 격한 데모를 벌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일군 수비대장 히다까 사이지(日高才二) 대위의 노골적인 협박과, 중재를 빙자한 대구군수 박중양(朴重陽)의 친일 언행에 울화가 치밀 대로 치민 이용익은 이튿날로 관찰사 자리를 박차 버리고 말았다. 천려일실이라기엔, 그가 대구에서 모처럼 빼 든 ‘반일의 칼’은 허망하게도 너무 녹슬어 있었던 것이다. 부임 석 달 만에 대구를 하직한 이용익은 이듬해 1월 망명지 러시아에서 암살됨으로써, 쉰둘의 파란에 찬 생애를 끝내고 만다.

- 2006년 01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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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1)백년 전의 대구풍경 :: 2006/04/06 17:33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1)100년 전 대구 풍경
1906년 대구 성내 인구 약 4만명
을사늑약(乙巳勒約) 이듬해이자 사실상 일제치하 원년이 되던 1906(병오)년으로부터 백년이 되는 2006(병술)년인 오늘까지, 대구는 그간 어떻게 천지개벽을 했고, 무슨 경천동지할 사건들이 있었을까.

산천이 여남은 변하고, 조손(祖孫)이 세 차례나 대물림을 할 동안 산하를 주름잡던 대구의 인걸들은 다들 어떻게 부침하며 사라져 갔을까.  곁들여, 8·15, 10·1, 6·25, 3·15, 2·28, 4·19, 5·16, 10·17, 5·18, 6·10 등, 암호들의 나열과도 같은 격변을 겪느라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은 또 얼마나 짓밟히고 눈물지었을까.

굵직한 사건사고들 가운데는 대구에서 발화되어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 오른 것도 적지 않다. 또 잘했건, 못 했건, 30년간 이 나라를 주무른 박·전·노 세 통치자들의 향리(鄕里)였다는 점에서도 대구는 실로 한국현대사의 진원처럼 회자되기 일쑤였다.

이제 물질세상은 예전에 비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다. 곳곳에 아파트와 자동차, 휴대전화가 지천인 세상이다. 하지만 비록 너나없이 헐벗고 주리며 셋방에들 살았으나 마음만은 희망으로 부풀던 그때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짐은 웬일일까. 대구의 옛 이야기들을 새삼 들춰보고픈 까닭의 하나이기도 하다.

백 년 전 대구의 사회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대구에 거류하던 일인들이 자신들의 정보지 형식으로 발행하던 주간신문인 <朝鮮>지를 통해 어렴풋한 윤곽이 잡힌다. 일본 동경대학이 보관하고 있는 이 신문에 따르면 백 년 전인 1906년 초의 대구성내의 인구는 약 4만 명, 가구 수는 약 1만호였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광역이 아니라, 진동(鎭東), 달서(達西),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공북(拱北)문 등 사대문 안의 인구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동성, 서성, 남성, 북성로 안의 인구와 호수만을 대상으로 한 집계이다.

이들 상주인구 외에 관찰사(觀察使·도지사), 군수, 우체사(郵遞司), 전보사(電報司), 관리사정(官吏使丁·관속) 약간명과, 진영대(鎭營隊) 병사가 400명가량 주둔하고 있었다. 진영대는 형식상 관찰사의 지휘를 받는 방위군 성격의 군대였다. 그러나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조인되고, 7월 20일 ‘군사경찰훈령‘에 의해 한국(조선)의 치안을 일본군이 담당한다고 통고된 이후, 사실상 대구의 일본군 수비대(헌병대)의 지휘통솔 아래 놓여 있는 허수아비 군대였다.

대구에는 이들 성내사람들과 관속 및 병사들을 상대로 한 조선인들의 각종 장삿집들이 제법 번창하고 있었다. 숙박과 술집을 겸한 주막집이 200여 곳, 각종 박래(수입)품을 파는 잡화점이 123곳, 담뱃집이 50곳, 고깃집이 40곳, 포목점이 40곳이었다. 이 밖에 기생집이 50여 곳 있었나 하면, 매음 전문의 ‘갈보 집’ 역시 50군데 있었다고 앞의 신문은 특기하고 있다. 지체 높은 양반이나 부자들이 드나드는 기생집이 있듯, 보통사람들의 ‘객고’를 풀어주는 매음집도 같은 숫자로 있어야만 형평에 맞았는가 보다. 그러나 홀아비로 이주한 일인들의 필요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성된 전문적인 집창촌(集娼村)인 이른바 서문 밖 유곽(遊廓)이 생기기 3년 전이어서, 여염집 형태로 산재해 있었던 모양이다.

이 무렵 대구의 일인 숫자는 1천200명 안팎으로, 남녀의 비율은 6.5대 3.5 정도였다고 한다. 영주할 터전을 닦기 위해 남정네들이 먼저 건너 온 까닭에 유곽의 필요성이 시급했던 것 같다. 이보다 13년 전인 1893년 9월 두 사람의 의약 및 잡화상이 나귀를 타고 부산에서 청도 팔조령을 넘어 온 것이 일인이주의 시작이었다. 관부연락선이 생기고, 경부선이 트이면서 이주는 러시를 이뤄, 한 달에 최저 80명에서 최고 250여 명이 ‘장사가 잘 된다’는 대구로 몰려오는 형국이었다. 이들은 헌병대용달상, 석유상, 음식점, 의사, 과자상, 조각사, 교원, 잡화상, 주상(酒商), 연초상, 사진사, 이발사, 승려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대구생활‘이란 한 신문가십을 통해 이 무렵 대구사회상의 단면이 엿보여 흥미롭다.

* 많은 것은 지게의 수, 손님 끄는 매음부, 길가의 똥.

* 적은 것은 일인 처들의 공공심과 염치심.

* 높은 것은 매음부와 기생의 화대, 남문 밖의 교회당.

* 싼 것은 시장 부지료, 정거장의 지게 싹.

* 아름다운 것은 달성 산의 경치, 정거장의 야경.

* 불결한 것은 부녀자의 ‘서서 오줌 누는 짓’, 성내의 도로.

* 즐거운 것은 고향의 편지, 한어를 배웠을 때.

* 슬픈 것은 이 곳에 미인이 없는 것, 독수공방.

* 두려운 것은 매음집 주인과 경찰의 검문, 전염병.      

백년 뒤에 읽어봐도 조선인들의 실업, 가난, 저노임, 저임대료, 비위생, 비교양의 정경이 여실하게 집약돼 있어 뒷맛이 씁쓸하다.

- 2006년 01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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