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대구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77건
- <명물 거리> 3·1운동길 (1) | 2006/09/21
- 명풍수 두사충(杜師忠)과 대명동 - 죽어서까지 군대 보초 세웠나 | 2006/08/15
- 6·25 당시 대구 주요 군사시설들의 위치와 현재 | 2006/06/24
- 대구가 낳은 천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 2006/05/28
-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6)국채보상운동 불 지핀 서상돈 | 2006/04/06
- [매일신문] (대구이야기) 대구 친일거두 '박짝때기' | 2006/04/06
-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4)문화재 수탈 거물 오쿠라 | 2006/04/06
-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3)땅투기 원조는 백 년 전의 일인들 | 2006/04/06
-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2)반일 관찰사 이용익 | 2006/04/06
-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1)백년 전의 대구풍경 | 2006/04/06
<명물 거리> 3·1운동길 :: 2006/09/21 21:57
'3·1운동길'은 동산병원이 자리잡은 언덕 위로 난 200여m의 짧은 길이다. 이 곳을 찾으려면 대구 중구 동산동 동산맨션과 대구제일교회 옆으로 난 90계단을 찾는 것이 가장 쉽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동산병원 뒤편 언덕을 지나 서문시장으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이 그 옛날 3·1운동의 함성을 간직한 곳이다. 90개 계단은 옛날 리어카 등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계단 양 옆과 가운데에 경사로를 따로이 만들어 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곧바로 동산이 펼쳐진다. 잔디가 깔린 언덕 위에 오래된 주택 3개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1900년대 초 선교사들의 거주했던 고택들이다. 이 곳은 현재 동산병원에서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꿔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1999년 개원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선교사 사택 2곳에다 선교박물관과 의료박물관을 만들었고, 2001년에는 교육`역사박물관을 신설했으며, 2002년부터는 교육`역사박물관 2층에다 대구 3`1운동 역사관을 따로 두기도 했다. 의료박물관 옆으로는 종탑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담장허물기 운동의 메카인 대구. 그 첫 행사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담장을 허물었던 동산병원 정문 및 중문의 기둥과 담장을 옮겨다 놓고 여기에다 기독교 전파 초기의 종 하나를 기념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간혹 유치원생들의 놀이 공간과 신혼부부들의 웨딩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이달 14일 오전에 둘러본 '3·1운동길'은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3·1운동길'이라는 표지판 마저 없었다면 이 곳의 역사적 의미조차 알지 못한채 지나칠 판이었다. 이 곳은 1919년 당시, 대구의 독립만세 운동을 위해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대구고보(현 경북고) 학생들이 집결을 위해 지나갔던 자리였다. 이 동산의 솔밭길을 넘어 큰장으로 집결했고, 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경상감영을 지나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자리)까지 진출했다. 3월 8일 대구 기독교인들과 학생등 800여 명이 시위를 벌인 것을 기점으로 경북 곳곳으로 독립 만세의 함성이 퍼져나가 조국 독립을 위한 민중의 염원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이 곳이 '대구 3·1운동길'로 지정 받은 것은 지난 2003년. 역사적 의미조차 찾지 못한 채 80년이 넘게 버려져 있던 이 곳을 동산병원 전재규 명예교수를 비롯한 일부 향토 사학자들이 대구시에 건의해 명명받은 것이다. 또 이름을 되찾은 것과 때를 같이해 2003년과 2006년에는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인근 교회 등의 협조를 얻어 3·1독립운동 재현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며 대구 시민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겨우 이제 명색만을 되찾은 '대구 3·1운동길'. 이 곳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후대에 길이 알리기 위해서는 관계기관들의 협조가 절실하다. 이명수 동산병원 홍보팀장은 "현재 중구청에 지속적으로 건의해 안내 간판 등을 보강하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 운동기구 설치와 돌 마사지 구간 등을 갖춰줄 것을 부탁해 놓은 상태이며, 병원 측에서도 환자들의 산책로로서 활용하면서 그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 ||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작성일: 2006년 09월 20일 |
"대구 사람들은 흔히 지역의 3·1운동이 서문시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정보지요. 옛 지도에서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는 연못이었습니다. 이는 아마 '큰장'(일명 서문 밖 시장)을 지금의 서문시장으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큰장은 현재 섬유회관 자리에서 달성공원 인근까지였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 자료를 고증하기 위해 서울에 드나든 것도 여러 차례. 그 옛날 선교사들이 주고 받은 편지까지 일일이 번역해가며 정확한 대구 3·1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나갔다. 그러던 중 대구의 기독교 역사학자 이재원 씨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여규진 선생을 만나면서 의문의 실마리가 풀렸다. "여 선생님이 증언하시기를 큰장 입구 강 씨의 소금집(현재 송월타월자리) 달구지 위에서 오후 3시에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만세의 함성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제가 종로초교(당시 희도학교)에서 찾아냈던 지도 2장에 기록된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이후 그는 2002년 5월 새롭게 밝혀진 역사적 사실을 집대성해 '동산병원과 대구3·1독립운동의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으며, 이듬해에는 대구시에 건의해 '대구3·1운동길'을 지정받았다. 또 대구 3·1운동 재연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대구 시민들에게 대구가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섰다. 그가 이렇게 3·1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집안 내력 때문이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그는 일제시대, 대동아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다니던 교회의 종까지 떼가 군수물자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일본에 대한 막연한 적대심을 키웠다고 했다. 그리고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던 장인어른은 자식 3명 모두를 학교에서 자진 퇴학시키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결국 옥고를 치르기도 했었다. 그는 "작은 골목길에 불과할수 있는 '3·1운동길'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아끼고 보존하고, 의미를 담느냐에 따라 그 역사적 가치가 달라질수 있다."며 "대구시와 시민들이 좀 더 많은 애정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 ||
한윤조기자 작성일: 2006년 09월 20일 |
명풍수 두사충(杜師忠)과 대명동 - 죽어서까지 군대 보초 세웠나 :: 2006/08/15 11:23
- 출처 :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 (김두규 저, 2005)

조선시대 명풍수로서 숱한 전설을 남긴 이 가운데 두사충(杜師忠)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중국에서 온 섭정국, 시문용, 이문통 등과 같은 풍수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지리에 밝아 명나라 군대의 '진지와 병영 위치 선정' 참모로 활동하다가 더러는 귀국하고, 더러는 조선에 눌러앉았다. 이들로 인해 조선 중기 이후 한반도 풍수, 특히 묘지 풍수 양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두사충은 생전에 경기 양평에 있는 한학사대가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조부묘를 감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그는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무덤을 정하는데 관여했기 때문에 그 전설이 아직까지도 전해오고 있으며, 그가 잡지 않은 자리까지도 '두사충이 소점한 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이 많다.
두사충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21대 후손이었다(두사충의 11대 후손인 고 두재규 선생이 증언했다). 그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처남으로, 복야(僕야 : 벼슬이름)로서 진린을 따라 조선에 왔다. 수군이었던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과 자주 만났는데 이때 두사충도 이순신 장군과 친교를 맺었다.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준 '봉정두복야(奉呈杜僕야)'라는 시가 아직까지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귀국했던 두사충은 정유재란(1597)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온다. 이때 그는 조선에 가지 않겠다는 부인을 혼자 중국에 남겨두고 두 아들만을 데리고 오는데, 그것으로 영영 부인과는 이별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진린 도독이 귀국하려 하자 두사충은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미 명나라가 망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가 대구에 정착해 '고국 명나라를 잊지 않고 섬긴다'는 뜻에서 '대명(大明)'이란 지명을 붙이고 살았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대명동'이다. '대명동'이란 지명은 경북 성주군 용암면에도 있는데 이 역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들어와 귀화한 풍수 시문용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붙인 지명이다. 시문용은 광해군 당시 실세 정인홍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가 궁궐터 소점에 관여한 풍수로 유명하다.
대구에서 살다가 죽은 두사충은 만촌동(대구 남부 시외버스 터미널 뒤)에 묻힌다. 그곳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잡아놓은 자리로 지금까지 그대로 전한다. 두사충의 후손들은 현재 전국에 약 100여 가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직계후손이 두사충 묘 입구에 있는 사당 '모명재(慕明齋)'를 지키며 살고 있다. 모명재 역시 고국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사충의 묘는 당시 중국 풍수들의 터 잡기 양식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서 현재 술사들이 선호하는 혈장(穴場 : 유골이 안치되는 일정한 곳으로서 혈을 이루며 특정한 형태를 갖춘다)을 찾기는 힘들다. 그 대신 주변 산들이 편안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곳을 감싸고 있다.
특이한 점은 두사충 무덤 주변에 국가정보원 지부와 2군사령부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손 두재규씨는 "살아있을 때도 군대 속에서 살았는데 죽어서까지 군사들을 보초 세울 정도로 땅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풍수에서는 '사람은 자기 세계관에 맞는 땅을 찾아 들어간다'고 말한다. 두사충의 세계관과 당시의 풍수 양식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6·25 당시 대구 주요 군사시설들의 위치와 현재 :: 2006/06/24 14:14
대구가 낳은 천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 2006/05/28 00:29
| | ![]() | ||
| |||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6)국채보상운동 불 지핀 서상돈 :: 2006/04/06 23:25
| 정영진의 대구이야기-(6)국채보상운동 불 지핀 서상돈 | |
| 민초들의 애국심 결집 | |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고, 한 끼 밥은 굶을망정 담배만은 피워야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 금연이요, 단연(斷煙)이다. 일본 외채 1천300만 환을 갚기 위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 석 달만 담배를 끊어 모으자고 대동광문회의 서상돈이 주도했을 때, 대한제국의 골초들은 어쩌자고 순순히 따라주었을까. 그러잖아도 이 무렵 ‘스타’, ‘리리’, ‘야마사쿠라‘, ‘아사히‘ 따위의 상표를 단, 향기 그윽하고 피우기 쉬운, 일본산 궐련들이 쏟아져 나와, 새로운 흡연재미에 푹 빠져있던 조선의 골초들이었다. 수입 궐련에 대한 인기가 치솟자, 대구의 두 연초 거상이던 마쓰모토(松本)상점과 나카오(中尾)상점이 무허가로 사제 궐련을 만들어 팔아 큰 재미를 보고 있었다고 당시의 일본신문은 전하고 있다. 잎담배를 담아 물던 장죽이나 곰방대를 멀리하고 궐련흡연에 한창 열을 내던 골초들이다. 대구에서만 당시 일화로 7만 원쯤 모아질 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가 언제 우리에게 밥 먹여주었어?” “망우초(忘憂草)마저 안 피우곤 이런 말세를 어떻게 살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불가사의하다. 전국의 날품팔이 노동자, 기생, 백정, 인력거꾼들이 헌금에 더 열성적이었다는 기록은 더욱 놀랍다. 그들의 가난과 박탈당한 인권이야말로 ‘나라가 못 구해준’ 대표적인 사례였는데도 말이다. 또 남성우위사상에 짓눌려만 살던 대구, 서울, 부산, 진남포, 진주의 부인들이 패물을 모아 보상금조로 내 논 것 역시 ‘눈 먼 자식의 효자’치곤 너무도 섬뜩한 우국충정의 단성이라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기적 같은 애국심의 발휘는 운동의 주도자 서상돈의 덕성과 친화력, 솔선수범하는 계몽정신이 불을 지핀 결과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851년생으로, 증조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던 그는 세 번이나 엄혹한 교난을 겪고도 자수성가, 1886년에는 경상도 시찰관(視察官)이란 벼슬까지 제수 받은, 대구유수의 갑부였다. 천주교대구교구 개설 후에는 성직자 돕기와 선교, 빈민구호에도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서시찰(徐視察)이란 존칭으로 곧잘 불리던 그는 남보다 싼 소작료를 받아 인기였다. 소작권은 공평하게 나눠주었으나 다만 천주교신자에게 우선함으로써 선교의 기회를 넓히려 애썼다. 신부가 예비신자에게 세례를 주기 직전, 교리를 얼마나 깨우쳤나 물어보는 ‘찰고’라는 수순이 있었다. 첫 질문은 대체로 입교(入敎)동기에 관한 것으로, 신부가 한 촌로에게 물었다. “신자는 어찌하여 성교(聖敎)를 믿나뇨?” 말이 떨어지자 마자 촌로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서시찰 어른 논 붙일라꼬 예!” 물론 정답은 아니었으나, 너무도 솔직한 답변에 신부는 웃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구에 있는 국채보상공원을 볼 때마다 아무리 훌륭한 제 2의 서상돈이 나와도, 제 3의 국채보상운동만은, 그리고 위정자들의 그 비슷한 ‘나라 말아먹기’만은 제발 없었으면 싶어진다. | |
| - 2006년 02월 06일 - |
[매일신문] (대구이야기) 대구 친일거두 '박짝때기' :: 2006/04/06 23:24
| (대구이야기) 대구 친일거두 '박짝때기' | ||||
친일청산 문제로 뒤늦게 시끌벅적한 시대상을 보면서 대구사람들은 더러 목격했거나, 귀동냥으로 들은 ‘박짝때기’의 일화들을 떠올릴지 모를 일이다. ‘박짝때기’란 대구 출신의 친일거두인 박중양(朴重陽)의 별명이다. 지팡이나 막대기의 경상도식 표현이 ‘짝때기’이다. 근대화의 물을 먹은 ‘개화장이’들이 한때 서양 신사들을 흉내낸답시고 ‘개화장(開化杖)’을 짚고 다니며 으스대던 풍조가 있었다. 벼슬이 높아진 박중양도 중년 이후 이 개화장을 애용하며 뽐내고 다녀, 사람들이 비꼬는 뜻에서 가져다 붙인 별명이 ‘박짝때기’였다. 뒤따르는 하인 한 사람을 대동하고, ‘朴’이란 큰 글자가 쓰인 전용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관가를 누비던 박짝때기였다. 그는 도지사나 고등법원장한테도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기미 기다까”(자네 왔는가)했나 하면, 밉게 보인 순사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 특출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1874년생인 박중양은 원래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태어났으나 1904년 대구군수로 부임하자, 대구의 풍물에 반해 원적(原籍)을 아예 대구로 삼고, 80평생을 대구에서 살다간 사람이다. 중인 출신으로 26세 때인 1900년, 한말의 관비유학생으로 동경에 유학, 청산(靑山)학원과 동경부기학교를 졸업한 신지식청년이었던 그는 임관 얼마 뒤 이등박문을 만나게 되면서 친일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다. 대담하게도 스스로 ‘이등’을 찾아가, “조선엔 희망이 없어 미국유학이나 하고 싶으니 도와 달라” 했더니, “당신 같은 기백 있는 조선청년은 처음이다”며 주선해준 자리가 대구군수 감투였다는 것이다. 그가 “이등의 양자였다”는 소문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양자는 아니고 은사였지”함으로써, ‘이등’과의 밀접했던 관계를 간접으로 시인한 바 있었다. ‘은사’에 대한 보답에서인지 박중양은 친일을 초지일관의 신념으로 삼고, 권세와 영화가 보장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대구성을 철거한 것도 그 일례였다. 이등박문의 비호로 오히려 평안남도 관찰사로 영전하게 되자, 일인들은 금시계를 증정하며 그의 ‘영단’을 두고두고 기렸다. 그의 후반생 은거지가 되었던 대구시 침산동의 침산(砧山·일명 박짝때기산·현 침산공원) 한 덩어리 전체도, 이때의 땅 투기로 거부가 된 일인들이 주선해 준 '사은품'의 성격이 짙다는 소문이었다. 이후 그는 두 번째 경북관찰사를 거쳐 충남도장관, 황해도지사, 충북도지사 등을 역임하고 1927년에는 총독부 중추원참의, 1943년에는 마침내 훈일등(勳一等)으로 서훈되며, 조선인으론 최고의 영직인 중추원 부의장에까지 오른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활동할 당시 75세였던 그는 최고위직을 지낸 최고령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특위가 와해되면서 풀려나게 되자,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대구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한술 더 떠 83세의 고령임에도 일본 여자인 48세의 제2부인과 은거해 살던 1957년 10월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의 젊은 시절에 관해 명예훼손 발언을 하는 바람에 검찰에 불려가야만 했다. “노망한 탓이니 한 번만 용서해 주소”하며 빈 끝에 무사할 수 있었으나, 일세의 친일거물 박중양으로서는 인생 말년의 이 퇴락한 시절이야말로 수즉다욕(壽則多辱)이자, 도타운 햇살(重陽)은커녕, 짙은 그늘(重陰)의 세월이었음이 분명했다. 정영진 | ||||
| - 2006년 01월 23일 - ------------------------------------------------------------------------------------------------------------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박중양
친일 흠모론에 이른 야마모토
경기도 양주 출신(경북 달성 출생이라는 기록도 많으나, 그가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관계로 착오가 있었던 것같다)이었던 그는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서울에 있던 일본인과 긴밀하게 교제하였고, 그들의 권유와 "일본인과의 교제 이래 국가 관념이 생기고 정치 방면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 1897년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박중양은 일본에서 약 7년간 생활하였다. 기독교 목사였던 혼다(本多庸一)의 식객으로 생활하다가, 그가 경영하던 아오야마(靑山英和)학원 중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00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는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연구 실습하였다. 이어 1903년에는 도쿄부기학교에서 은행업무를 익혔다. 이때 그는 야마모토(山本信)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본 생활을 통하여 그는 많은 일본인 관료들과도 사귀었다. 특히 후지야먀(富山)현의 지사였다가 '병합' 후에 경기도장관이 되는 히카키(檜垣直右), 그 서기관이었다가 충북도장관이 되는 스즈키(鈴木隆) 등과도 교류하였는데, 같은 시기에 충남도장관이 되었던 박중양은 이를 "이웃 도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신(神)의 작희(作戱)라 할까, 꿈 밖의 꿈"이라고 감탄하였다.
박중양은 러일전쟁 때 귀국하여 고등통역관 대우로 참전하였는데, 인천, 진남포, 용암포, 안동현 등지에 종군하게 된다. 종군 생활을 마친 그는 농상공부 주사가 되었으나, 대구에서 거처하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대구는 그에게 낯선 지방이었지만 경성 정계의 동향을 관망하는 데 편리하고, 만일의 경우 도쿄로 가기도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의병의 공격을 피하고 일본으로 도망가기 쉬운 철도 연변에 모여 살았던 것과 같은 발상이었다. 박중양은 대구에서 1년을 지냈다. 일본인과의 교제, 일본 생활, 종군 생활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을 철저하게 신뢰하게 되었다. 즉,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우수성을 높게샀으며, 그들의 친절에 감탄하였고, 일본인 기녀에 대해 좋은 추억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국정 개선을 위해 생명을 돌보지 않고 자원하는 일본인의 의협심을 가슴에 담게 되었다. 일본을 이렇도록 흠모한 박중양은 이와 반대로 조선인들은 야만스럽고, 도벽이 있고, 또한 파괴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귀국 후 그는 이토의 힘으로 대구군수 겸 경북 관찰사 서리가 되었다. 수행원으로 갔을 때 이토에게 잘보였던 것과 일본인 거류민단의 소개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토는 박중양을 철두철미하게 신용하고 옹호하였으며 또한 애지중지하였다. 이런 탓인지 이토의 양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구군수로서의 박중양은 역시 대구에 있던 일본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일본인들이 가장 원하고 있었던 것은 대구성벽을 없애는 문제였다. 훗날 일본인의 회고에서도 이 문제를 "대구 분요(紛擾:분란)의 병원(病源)"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의 대구는 성을 경계로 하여 상권(商圈)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성내의 상권은 조선인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상권을 장악하려고 노심초사하던 일본인 상인들은 당연히 성벽을 허물어 상권의 구역을 없애려고 하였던 것이다.
박중양은 일본인의 요구를 충실히 좇아 일진회 회원을 동원하여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는 도로로 만들었다. 오늘날 대구의 동성로, 남성로, 북성로, 서성로가 바로 그 길이다. 일본인 상인이 상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박중양을 일본 거류민들은 극구 칭찬하였다. 일본인들은 그를 '야마모토 군수'라고 불렀으며, 그 이전의 관찰사들이 대개 '한국식 대관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직 한 사람, 일본 유학생으로부터 일어난 활동적인 걸물아'라고 칭찬하였다.(대구부 편, {대구민단사}, 78∼81면) 박중양의 이런 처단은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지 않고 단독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부에서는 박중양을 징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박중양의 배후였던 이토의 구원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박중양은 오히려 평남 관찰사로 영전하였다(1907). 그리고 다시 1908년에는 경북 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에도 일본인의 편에서 행정을 실시하였다. 1908년 12월에 '일한민간친회'(日韓民懇親會)가 열였을 때 "소생이 일신을 바쳐 이 땅을 위해 진력하고자 함에는 일본인 제군의 지도편달에 달려있습니다.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일본인의 지도·계발을 요구하기도 하였다.(河井朝雄, {大邱物語}, 314∼315면)
그는 여러 총독 가운데서도 특히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을 좋아했다. 데라우치가 조선인을 본위로 정치를 행하여 조선 말기의 암흑시대를 명랑하게 만들었고, 특히 관개사업을 추진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고 평가하였다. 이런 총독 아래에서 도장관, 참의를 지냈던 것을 그는 아마도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3·1 운동의 무모성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직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리고 3·1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진압을 지휘하였다. 다름 아니라 자제단(自制團)을 통해서였다. 4월 6일 대구에서 '자제단 발기인회'가 조직될 때 그는 단장이 되었다.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소요(3·1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곧바로 경찰관헌에 보고한다는 서약까지도 했다. 이 이후 경북도 참여관 신석린이 주동이 되어 안동, 성주, 군위, 김천 등지에 자제단이 조직되었다.
중국 침략를 감행한 일제는 그 침략적 야심을 착착 진행시켜 나가면서 마침내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치달았다. 이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장기전에 대처할 대내외 중요 정책을 입안·심의하기 위해 전시 최고 심의기관을 설치한다는 구상을 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8월 27일 칙령 관제로 시국대책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조선총독의 감독에 속하고 그 자문에 응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시국대책에 관한 중요 사항을 조사·심의"한다는 기구였다. 여기에서 논의되고 결의된 것은 조선총독에게 건의되었다. 제2의 중추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구성을 보더라도 정무총감이 회장이 되고 총독부의 현직 고등관들이 대거 참여하였던 점에서 중추원보다도 오히려 더 막강한 기구였다. 97명의 위원 가운데 조선인은 고작 11명뿐이었다. 박중양을 비롯하여 김연수, 박영철, 박흥식, 윤덕영, 최린, 현준호, 한상룡 등 이들은 일제말의 대표적인 친일파들이었다.
이 위원회는 총독의 자문사항 18항목을 심의하기 위하여 편의상 3개 분과회로 나뉘어졌는데, 박중양은 문화·사회관계 및 일반사항을 다루는 제1분과에 소속되어, ① 내선일체의 강화·철저, ② 조선·만주·북지(北支)간의 사회적 연계 촉진, ③ 재지(在支) 조선인의 보호·지도, ④ 반도 민중의 체위 향상과 생활 쇄신, ⑤ 농·산·어촌 진흥운동의 확충·강화, ⑥ 사회시설의 확충, ⑦ 노무의 조정 및 실업의 방지·구제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때 박중양은 특히 내선일체와 농촌진흥 문제에 관심을 보여 발언하기도 하였다. 이런 활동과 더불어 1941년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이런 지위에 있으면서 박중양은 당시의 각종 친일조직에 참여하였다. 1941년 10월에 결성된 임전보국단의 고문, 1943년 1월 국민조선총력연맹(1940년 10월 설립)의 '참여'를 맡았으며,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하여 경남지방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일본이 싱가폴을 점령하자 '노구'(老軀)를 이끌고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싱가폴까지 가기도 하였다.(이때의 모든 경비는 김갑순이 부담하였다) 이런 친일 활동의 결과, 그는 1945년 귀족원 칙임의원이 되었다. 최상급의 친일파 7명에 끼게 된 것이다.
그는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에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改新)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라고까지 했으며,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고 하여, 한말보다 일제시대가 훨씬 좋았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완용을 매국노라 매도하여 말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용이하되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당면한 지도자가 선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할 수 없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는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이전(利戰)은 될지언정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할 방도는 아니다.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다.(박중양, {술회})
최근 대구매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매일정보}라는 신문에 박중양에 관한 이야기가 3회나 실렸다([김용진의 대구이야기], 1991. 9. 27, 10. 4, 10. 11). 그 기사에서는 '뛰어난 일본어 실력', '총독부에서도 아깝게 본 인격과 식견' 등으로 박중양을 묘사하면서, 조선학생들을 구금한 일본인 헌병대장을 혼내고 학생들을 석방시킨 이야기, 실업청년들을 일본인에게 부탁하여 취직시킨 이야기 등을 소개하였다. 그러자 독립유공자협회, 독립유공자유족회, 광복회 등에 소속된 몇명의 회원들이 공동으로 이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 활동하였던 거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두 단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일화이다. |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4)문화재 수탈 거물 오쿠라 :: 2006/04/06 17:37
| 정영진의 대구이야기-(4)문화재 수탈 거물 오쿠라 | |
| 일제 패망하자 유물 숨겨놓고 귀국 | |
지하실에 들어간 전기수리공에 의해 처음 발견된 유물들 가운데는 신라시대의 귀면와(鬼面瓦), 연화문와(蓮花紋瓦) 등 각종 토기와, 고려시대의 청동경(靑銅鏡)과 자기류, 송·명대의 채색호(彩色壺)와 옥잔 등 보물급 문화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발견 당시 유물들은 60여 개의 오동나무 상자에 담겨, 6평쯤 되는 으쓱한 지하실 바닥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보물급 유물 외에도, 근대 일본의 국보급 서화('동해도 53차’) 20여 점과, 고려자기 및 일본의 근대 고급자기 수백 점도 함께 발견되어 고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지하실이 포함된 주택의 원소유주가 일제 강점기 대구의 거부이자 유명한 고미술 수집가였던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였음이 밝혀져, 이들 유물 역시 그가 수집, 소장하다가 일제 패망으로 귀국하면서 은닉해 둔 것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1870년 8월, 일본의 지바(千葉)현에서 태어난 오쿠라는 가냘프면서도 지적으로 생긴 용모답게 동경제대 법대를 졸업, 35세 때인 1905년 봄 이주 1세대의 일원으로 대구에 정착한 사람이다. 그는 이주해오기 3년 전, ‘콜브란’이란 미국인으로부터 민간 전기사업이 장차 조선의 유망사업이 될 것이란 귀띔을 받고, 이 사업에 관한 각종 자료를 잔뜩 갖고 대구에 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구성 철거에 따른 땅 투기로 전기사업을 위한 종자돈을 듬뿍 마련한 오쿠라는 처음 50㎾의 소규모 발전사업에서 시작, 30여 년 만에 조선 전기계의 왕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대구는 물론, 서울, 회령, 함흥, 광주, 울산, 제주, 여수, 순천, 고성, 안동, 경주 등 전국에 자매전기회사를 거느린 ‘대흥전기회사’의 사주가 된 것이다. 이들 회사들이 해방 후 모두 ‘남선전기’ 회사로 통합되었다가 나중 ‘한국전력’의 모태가 되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전기사업에서 번 돈으로 금융업에도 진출한 그는 대구상공은행두취(頭取:은행장)와 대구증권회사 사장도 겸했다. 또 대구상공회의소 회두(會頭:회장)와 경북도평의원, 대구부(府:시)의원도 수 차례 겸직, 대구의 대표적인 거부이자, 영향력이 큰 인물로 손꼽혔다. 그의 취미는 골동품 수집, 그 중에서도 신라문화유물에는 일가견을 지닌 독보적인 수집가였다. 국보급 신라금관과 금불상은 물론 각종 진귀한 토기류가 그의 수집대상이었다. 이 밖에도 값 비싼 고려청자, 이조백자, 청동유물, 서화류 등이 대량으로 그의 손에 들어갔다. 전쟁말기에 이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밀반출되어 안전한 곳에 은닉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오늘날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는 바로 그 ‘오쿠라 컬렉션’의 모체이기도 하다. 20여 년 만에 발견된 대구 옛집의 유물도 결국 더 귀중한 탈출봇짐에 밀려 뒷날을 기약하고 숨겨둔, 그의 ‘2류급 애장품’에 불과했던 셈이다. 골동품 수집에는 재력과 안목 외에, 열정이 따라야만 가능하다. 열정이 지나치면 ‘탐욕’일 수밖에 없는데, 오쿠라의 경우는 ‘열정’이란 미명 아래 조선고미술에 대한 편집광적 수탈욕구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 정평이다. 골동품에 대한 가치인식이 희박하던 시절에 그저 줍다시피, 혹은 칼과 돈으로 한껏 수탈해 갔음에도 오쿠라는 못다 가지고 간 유물들이 애석해, 여러 번 염탐꾼을 대구에 보냈다간 실망만 크게 하고 숨졌다는 후문이다. | |
| - 2006년 01월 17일 - |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3)땅투기 원조는 백 년 전의 일인들 :: 2006/04/06 17:36
|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3)땅투기 원조는 백 년 전의 일인들 |
1906년 10월 하순. 성벽 근처에 살던 대구성내 사람들은 성벽이 무너지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새벽잠에서 깼다. 집 밖을 뛰쳐나온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인들의 지휘감독 아래 60여 명의 조선인 인부들이 10여 조로 나눠져 사방에서 일제히 성벽을 부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 12(1736)년 6월에 축성된 대구성은 높이 18척(약 5.4m) 총길이 2,124보(약2,200m)의 석성이었다. 그동안 관리부실로 군데군데 허물어진 곳도 있었으나 ‘대구사람’이란 호칭 대신 ‘성내사람’이라 불리길 더 좋아할 정도로 대구성은 은근한 자부심의 원천으로 대구토박이들의 사랑을 받아 왔었다. 주로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축조된 평지의 성곽이었던 만큼, 임금의 윤허 없는 인위적인 파손행위는 안보 차원의 중벌로 다스려져 온 것이 전통이었다. 따라서 사전 예고도 없는 가운데, 다름 아닌 ‘굴러온 돌’격인 일인들에 의해, 새벽에 벌어진 기습철거행위는 조선왕조의 사직 한 귀퉁이를 무너뜨리는 상징처럼 비쳐져 성내사람들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뒷날 무용담 삼아 늘어놓은 일인들의 ‘회고기’ 등을 통해 대구성벽철거사건의 속내가 들어난다. 당시 대구군수이자 경상북도관찰사서리였던 박중양(朴重陽)과 대구의 일인들이 한통속이 되어 몇 년간 은밀하게 추진해 오던 땅 투기 작전의 ‘완결편’으로 감행된 것이 이 사건의 숨은 진상이었다. 이 무렵 대구성내의 땅값은 당시 일화(日貨)로 평당 23원꼴이었다. 반면 성 밖은 불과 6원, 좀 비싸야 10원 꼴이었다. 수입성냥 한 갑이 4원10전, 삿포로 맥주 한 병이 12원50전 하던 시절이다. 따라서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 땅값이 폭등하리란 사실을 이재(理財)에 잽싼 일인들이 모를 리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값싼 성 밖의 임야며 전답에 눈독을 들여 매물이 나오는 대로 싹쓸이를 해오고 있었다. 그 다음의 일은 하루 빨리 성벽을 허무는 공작이었다. 도로개설의 장애물인 성벽부터 걷어내어야 대구가 클 수 있다는 명분론을 앞세워 관리들을 부추겼다. 그러나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절차상 관찰사가 올린 상소에 임금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평균재임기간이 반년에 불과했던 구한말의 경북관찰사들은 이 말썽스러운 중대사안에 누구도 선뜻 총대를 메려하지 않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박중양이었다. 적극적인 조기철거론자였던 그는 이때 마침 관찰사서리직을 잠시 겸하게 된 틈을 이용해 일인들의 모의에 동조했다. 부산에서 은밀히 인부들을 불러들여 벼락치기로 성벽을 허물고 나면 최고 관리책임자 자격인 박중양이 온갖 행정적 뒷감당을 한다는 다짐 아래 자행된 기습철거였던 것이다. 성이 헐리고 길이 나자 성 밖의 땅값은 평당 60원, 성안은 230원으로, 불과 반년 만에 열 배나 폭등했다고 일인들은 흥겹게 회고했다. 일제하 오꾸라 다께노스케(小倉武之助) 남선전기 사장과 같은 일인재력가가 유독 대구에 많았던 것도 이때에 한몫 보아 종자돈이 푸짐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헐값에 전답을 날린 조선인들이 땅을 치며 통음(痛飮)하는 한 편에선 거부가 된 일인들의 건배소리가 날로 높았다. 고종을 깔보고 ‘선 철거 후 보고’를 했던 친일원조 박중양은 그 뒤 투옥될 뻔했으나 이등박문에 매달려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
| - 2006년 01월 10일 - |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2)반일 관찰사 이용익 :: 2006/04/06 17:36
|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2)반일 관찰사 이용익 |
| 日人에 ‘토지매매 금지령’ 시행 |
을사늑약이 있기 반년 전인 1905년 봄, 대구에 감영(監營)이 있는 경상북도의 관찰사(觀察使·현 도지사)는 이용익(李容翊)이었다. 1854년 함경도 명천(明川)에서 상민으로 태어난 이용익은 청년시절 보부상으로 출발, 금광개발로 밑천을 잡아, 중앙정계로 진출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임오군란 때 민비 측의 충직한 심부름꾼이 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린 그는 단천(端川)군수를 시작으로, 탁지부대신, 군부대신 등 최고 요직과, 서북철도국 총재, 헌병사령관 등 쟁쟁한 관직을 두루 거친 중앙정계의 거물이었다. 그러나 국가재정과 산업에 대한 갖가지 개혁조치로 고종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은 얻었으나 정적으로부터는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또 일본도 친로파(親露派)의 거두인 그를 1904년 2월 일본으로 강제압송, 억류하기도 했다. 1년 만에 풀려난 그를 고종이 눈치껏 앉힌 자리가 외직이자 한직인 경상북도 관찰사 직이었다. 이에 가장 놀란 측은 대구의 일인들이었다. 반일의 거물이 와서 예상치 않은 부담거리를 안겨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일인들은 그 자위책으로 먼저 친일성향인 장승원(張承遠) 현직 관찰사의 유임운동부터 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내놓고 이용익을 모함하며 배척공작에 나섰다. '...함경도의 한 필부가 고종의 충복임을 기화로 가렴주구를 일삼더니, 이제 관찰사로 좌천돼 온다. 그가 과연 반성을 하고 오겠는가…'라는 내용의 선동유인물을 돌리면서였다. 오직 나라와 고종을 위해 다시 일하겠다는 각오뿐이었던 이용익은 이런 분위기에는 아랑곳 않고 그다운 혁신시책을 펴나가기에 열중했다. 불법징세 엄단, 협잡배 추방, 도로와 관아의 개보수, 신교육장려 등 전임자들이 등한시하던 파격적인 시책들이었다. 특히 ‘청결법’을 들고 나와, 길거리 청소에 둔감했던 관속들과 주민들을 혼내주기도 했다. 대구의 거리는 이 즈음 나뒹구는 인분과 가축의 배설물로 온전하게 다니기 힘들 정도로 불결했다고 한다. 눈에 번쩍 뜨이는 이런 개혁시책을 가장 반긴 측은 의외로 일인들이었다. 잘하면 대구의 개발이 앞당겨져, 대구 땅에 운명을 건 자신들의 미래가치가 크게 향상될지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이 바람에 거꾸로 이용익을 감싸고 두둔하는 분위기마저 잠시 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용익은 역시 소문대로 반일의 거목이었다. 일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4월 초, 일인들에 국한한 ‘토지매매금지령’을 전격적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매매당사자는 물론 중개인들도 어기면 처벌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실제로 영을 어긴 조선인 중개인 20여 명을 옥에 가두기도 했다. 거류민 신분임에 불과한 일인들이 막강한 자본력을 배경으로 조선의 토지를 무한정 매입하는 현상을 방치하다간 민족경제에 큰 해악이 되리라 판단한 데서 취해진 조치였던 것이다. 벌컥 뒤집힌 일인사회는 곧바로 반격으로 나왔다. 4월 28일 감영의 선화당(宣化堂)으로 몰려간 일인들은 “악법반대!” “반일 감찰사는 물러가라!”며 격한 데모를 벌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일군 수비대장 히다까 사이지(日高才二) 대위의 노골적인 협박과, 중재를 빙자한 대구군수 박중양(朴重陽)의 친일 언행에 울화가 치밀 대로 치민 이용익은 이튿날로 관찰사 자리를 박차 버리고 말았다. 천려일실이라기엔, 그가 대구에서 모처럼 빼 든 ‘반일의 칼’은 허망하게도 너무 녹슬어 있었던 것이다. 부임 석 달 만에 대구를 하직한 이용익은 이듬해 1월 망명지 러시아에서 암살됨으로써, 쉰둘의 파란에 찬 생애를 끝내고 만다. |
| - 2006년 01월 03일 - |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1)백년 전의 대구풍경 :: 2006/04/06 17:33
| 정영진의 대구 이야기-(1)100년 전 대구 풍경 |
| 1906년 대구 성내 인구 약 4만명 |
을사늑약(乙巳勒約) 이듬해이자 사실상 일제치하 원년이 되던 1906(병오)년으로부터 백년이 되는 2006(병술)년인 오늘까지, 대구는 그간 어떻게 천지개벽을 했고, 무슨 경천동지할 사건들이 있었을까. 산천이 여남은 변하고, 조손(祖孫)이 세 차례나 대물림을 할 동안 산하를 주름잡던 대구의 인걸들은 다들 어떻게 부침하며 사라져 갔을까. 곁들여, 8·15, 10·1, 6·25, 3·15, 2·28, 4·19, 5·16, 10·17, 5·18, 6·10 등, 암호들의 나열과도 같은 격변을 겪느라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은 또 얼마나 짓밟히고 눈물지었을까. 굵직한 사건사고들 가운데는 대구에서 발화되어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 오른 것도 적지 않다. 또 잘했건, 못 했건, 30년간 이 나라를 주무른 박·전·노 세 통치자들의 향리(鄕里)였다는 점에서도 대구는 실로 한국현대사의 진원처럼 회자되기 일쑤였다. 이제 물질세상은 예전에 비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다. 곳곳에 아파트와 자동차, 휴대전화가 지천인 세상이다. 하지만 비록 너나없이 헐벗고 주리며 셋방에들 살았으나 마음만은 희망으로 부풀던 그때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짐은 웬일일까. 대구의 옛 이야기들을 새삼 들춰보고픈 까닭의 하나이기도 하다. 백 년 전 대구의 사회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대구에 거류하던 일인들이 자신들의 정보지 형식으로 발행하던 주간신문인 <朝鮮>지를 통해 어렴풋한 윤곽이 잡힌다. 일본 동경대학이 보관하고 있는 이 신문에 따르면 백 년 전인 1906년 초의 대구성내의 인구는 약 4만 명, 가구 수는 약 1만호였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광역이 아니라, 진동(鎭東), 달서(達西),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공북(拱北)문 등 사대문 안의 인구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동성, 서성, 남성, 북성로 안의 인구와 호수만을 대상으로 한 집계이다. 이들 상주인구 외에 관찰사(觀察使·도지사), 군수, 우체사(郵遞司), 전보사(電報司), 관리사정(官吏使丁·관속) 약간명과, 진영대(鎭營隊) 병사가 400명가량 주둔하고 있었다. 진영대는 형식상 관찰사의 지휘를 받는 방위군 성격의 군대였다. 그러나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조인되고, 7월 20일 ‘군사경찰훈령‘에 의해 한국(조선)의 치안을 일본군이 담당한다고 통고된 이후, 사실상 대구의 일본군 수비대(헌병대)의 지휘통솔 아래 놓여 있는 허수아비 군대였다. 대구에는 이들 성내사람들과 관속 및 병사들을 상대로 한 조선인들의 각종 장삿집들이 제법 번창하고 있었다. 숙박과 술집을 겸한 주막집이 200여 곳, 각종 박래(수입)품을 파는 잡화점이 123곳, 담뱃집이 50곳, 고깃집이 40곳, 포목점이 40곳이었다. 이 밖에 기생집이 50여 곳 있었나 하면, 매음 전문의 ‘갈보 집’ 역시 50군데 있었다고 앞의 신문은 특기하고 있다. 지체 높은 양반이나 부자들이 드나드는 기생집이 있듯, 보통사람들의 ‘객고’를 풀어주는 매음집도 같은 숫자로 있어야만 형평에 맞았는가 보다. 그러나 홀아비로 이주한 일인들의 필요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성된 전문적인 집창촌(集娼村)인 이른바 서문 밖 유곽(遊廓)이 생기기 3년 전이어서, 여염집 형태로 산재해 있었던 모양이다. 이 무렵 대구의 일인 숫자는 1천200명 안팎으로, 남녀의 비율은 6.5대 3.5 정도였다고 한다. 영주할 터전을 닦기 위해 남정네들이 먼저 건너 온 까닭에 유곽의 필요성이 시급했던 것 같다. 이보다 13년 전인 1893년 9월 두 사람의 의약 및 잡화상이 나귀를 타고 부산에서 청도 팔조령을 넘어 온 것이 일인이주의 시작이었다. 관부연락선이 생기고, 경부선이 트이면서 이주는 러시를 이뤄, 한 달에 최저 80명에서 최고 250여 명이 ‘장사가 잘 된다’는 대구로 몰려오는 형국이었다. 이들은 헌병대용달상, 석유상, 음식점, 의사, 과자상, 조각사, 교원, 잡화상, 주상(酒商), 연초상, 사진사, 이발사, 승려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대구생활‘이란 한 신문가십을 통해 이 무렵 대구사회상의 단면이 엿보여 흥미롭다. * 많은 것은 지게의 수, 손님 끄는 매음부, 길가의 똥. * 적은 것은 일인 처들의 공공심과 염치심. * 높은 것은 매음부와 기생의 화대, 남문 밖의 교회당. * 싼 것은 시장 부지료, 정거장의 지게 싹. * 아름다운 것은 달성 산의 경치, 정거장의 야경. * 불결한 것은 부녀자의 ‘서서 오줌 누는 짓’, 성내의 도로. * 즐거운 것은 고향의 편지, 한어를 배웠을 때. * 슬픈 것은 이 곳에 미인이 없는 것, 독수공방. * 두려운 것은 매음집 주인과 경찰의 검문, 전염병. 백년 뒤에 읽어봐도 조선인들의 실업, 가난, 저노임, 저임대료, 비위생, 비교양의 정경이 여실하게 집약돼 있어 뒷맛이 씁쓸하다. |
| - 2006년 01월 02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