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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어제와 오늘 - 비산지하차도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21:12

(사진으로 보는 어제) 비산지하차도
낭만이 가득한 여유로움이다. 한가롭기 그지없다. 바쁜 걸음도, 쏜살같은 자동차도 보이지 않는다. 신호등도 없었나 보다. 버스가 앞으로 지나가는데도 말쑥한 신사가 그 옆을 느긋하게 지나가고 있다.

1970년 대구 서구 북비산네거리. '일단정지'라는 철길의 노란 팻말에도 아랑곳없이 쌀을 실은 자전거와 교복 입은 학생이 지나간다. 저 멀리 팔공산이 눈에 가득 담긴다. 그 시절 '여인숙'과 '전당포'는 서민들과 함께였다.

이곳 토박이인 박귀남(72) 할머니는 "하얀 고무신 신으면 멋쟁이 아가씨였지. 저 멀리 보이는 세발자동차(삼륜차)는 아마 연탄 배달부였을 거야. 사람이 지나가는 길은 차들이 피해다녔는데…."라며 옛사진을 보고 감회에 젖어들었다.

지금은 어떤가. 철길 밑으로 지하차도가 뚤려 '일단 정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도로 옆으로는 목공소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왕복 6차로로 하루에도 몇 만 대의 차들이 씽씽 달리며 속도를 자랑한다. 여인숙은 여관이 됐고 원룸이 돼, 저 멀리 팔공산이 보이지도 않는다. 양버즘나무가 10m 간격으로 가로수를 만들고, '야간 통행'을 위한 가로등도 빽빽하게 박혀 있다. 세월이 물씬 흘렀다.

박 할머니는 "마주보고 앉아야 했던 버스좌석이 지금처럼 바뀐 게 저 빨간 버스였어.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많던 시절에는 교통사고도 없었는데…고속열차가 지금은 어찌나 빨리 다니는지 볼 수도 없게 철판으로 가려버렸지 뭐여." 낭만의 여유가 그립다.

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 2005년 05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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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어제와 오늘 - 39년전 대구 중앙로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21:12

사진으로 보는 어제와 오늘-39년전 대구 중앙로
최고의 번화가… ‘60년대의 동성로’
요즘은 동성로가 젊음의 거리지만 1960년대 청춘을 보낸 연세 지긋한 장년층 이상에겐 중앙통이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다. ㅁ양복점 사장 이상동(65)씨는 20대 초반 직장을 구하려고 이 거리를 찾은 뒤 줄곧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

그는 사진을 쳐다보며 옛 생각에 젖어 빙그레 웃더니 사진 속 오른편의 애안당이 현재 이동통신 대리점이라고 했다. "당시 이곳은 양복점이 줄지어 있었어요. 그 땐 다들 양복을 맞춰 입었으니까 장사도 잘 됐죠. 1966년이라면 내가 재단사로 일할 무렵이네요. 당시에는 일을 시키고 밥만 먹여줘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넘쳐나던 시기라 기술까지 가르쳐주는 양복점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였지요"

옛 사진 속 아치 아래에는 '도라지 위스키'라고 적혀 있다. "이 무렵 애안당 뒤편은 도라지 위스키를 파는 고급 술집들이 즐비했어요. 향촌동에서 술을 먹으려면 고향의 논 한마지기는 날릴 것이라는 말들도 나오던 때죠"

이씨는 사진 속 버스를 보더니 한바탕 웃는다. "아! 이 버스! 그땐 시내 합승버스라 불렀는데 요즘으로 치면 좌석버스 정도 될까. 일반버스보다 요금도 더 비쌌고."  

국경일 행사라도 벌어지면 이 거리에는 고적대의 음악소리가 울려퍼졌고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댔다. "이 때는 중앙통이 최고의 번화가로 요즘 말로 하면 정말 '삐까뻔쩍'했죠. 그땐 지금처럼 '시내 간다'고 하지 않고 '성내 간다'고 했고 그 성내가 바로 이곳이었지요. 동·서·남성로와 남문로 밖은 시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논밭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니…. 나도 그땐 한창 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는데…"

채정민기자 cwolf@imaeil.com

- 2005년 05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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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어제와 오늘 - 계산오거리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21:09

사진으로 보는 어제와 오늘-계산오거리
'나지막한 언덕에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과 기와집, 이국적인 선교사 사택, 들쭉날쭉한 나무 전신주, 느릿느릿 달리던 20인승 시내버스, 차선도 없는 도로에서 리어카를 밀고 가는 아주머니, 시골에서 갓 올라온 듯한 고운 한복차림의 아주鍛區?'

사진 위(대구시청 강문배 사진실장 제공)는 1967년 1월 24일 화요일 계산오거리에서 바라본 동산병원 뒤편 '동산'(현재 중구 성내 2동)의 모습이다. 동서관통도로가 막 뚫리기 직전, 본격적인 시가지 개발이 시작될 무렵의 정겨움이 묻어난다. 저멀리 와룡산 능선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워낙 오래전이다 보니 이곳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물었는데 사진 오른편 위쪽 초가 사이에 동산병원 선교사 사택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40여년 전부터 이곳에서 세탁소를 운영해 왔다는 토박이 김해용(66)씨는 "수도가 나오지 않아 집집마다 공동수도에서 물지게로 물을 사다 먹던 시절이었다"며 "언덕 위에는 동산병원의 빨간 벽돌담이 쳐져 있어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곤 했다"고 회상했다.

신명여고 옆 '90계단'을 따라 꼬불꼬불 언덕을 오르면 만나는 초가집들에는 집집마다 2, 3가구가 세들어 살고 있었고 연탄 100장을 채워 넣는 집은 부자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시장 막일거리, 노점상을 하면서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살았어도 결혼식이라도 있을라치면 집집마다 떡을 돌리며 인정을 내던 때였다고 했다.

김씨는 "합승(미니버스), 브리샤·포니택시가 다녔는데 워낙 차가 귀하다 보니 큰 도로에도 더러 차선이 없었고 무단횡단이란 말도 몰랐다"며 "초가집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날 때쯤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이 제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달려가던 모습이 아련하다"고 추억했다.

현재 이 일대는 반월당 네거리와 성서방면을 잇는 교통 혼잡지가 됐다. 사진 속 초가집들은 엘디스리젠트 호텔(구 동산호텔)과 아파트(동산맨션)로 변했고 사진관 자리에는 대형 옥외전광판이 들어서 옛 정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사진설명 : 계산오거리(구 고려예식장 방면)에서 바라본 동산병원 뒷산 초가 동네의 1967년 풍경(사진 위). 예전 사진관 자리에는 현재 대형 옥외 전광판이 들어서 있다. 저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와룡산 능선과 맞춰보면 어제와 오늘의 달라진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imaeil.com

- 2005년 02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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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어제와 오늘 - 달성 다사 매곡리 공동우물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21:08

사진으로 보는 어제와 오늘-달성 다사 매곡리 공동우물
마을 앞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리는 아낙네와 우물가에서 맨발로 뛰어 노는 아이. 예전 우리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이제는 아련한 추억속의 장면이 됐다. 당시에는 마을마다 3, 4곳의 공동우물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낙네들은 두레박을 이용, 물을 길러 머리에 이고 집으로 날랐다. 남정네들도 물 지게로 물을 나르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다. 사진(60년대 추정)속에 보이는 아낙네들의 물긷는 모습은 달성군 다사읍 매곡1리 앞 공동우물. 현재 다사중 뒤편으로 사진속의 초가집이나 흙담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초가집 대신 양옥집이 들어섰고,  반라의 모습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사내아이가 서 있는 자리는 콘크리트 포장으로 바뀌었다. 당시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50여가구에 불과하던 매곡리는 최근 개발 붐을 타고 아파트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고 있고 주민 4천명에 불과하던 다사읍은 3만1천명을 넘어섰다.

빛바랜 사진을 살펴본 김태주(64) 전 이장은 "마을 앞 우물은 차고 물 맛이 좋고 수량이 많아 가뭄이 들면 인근의 죽곡·강창 사람들도 물을 길러 왔다"며 "90년대초 수돗물이 보급되면서 우물 사용이 줄어들었으나  지금도 가끔 농사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매곡리 주민들은 지금도 우물을 없애지 않고 덮개를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우물터에는 집을 짓지 않는다는 통설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사읍  정병율 총무계장은 "마을 앞 우물을 지나쳐 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난다"며 "먹고 살기 힘든 시대였지만 이웃간에 정이 넘쳐났다"고 회상했다.

이덕휘 다사읍장은 "이 우물 때문인지 매곡리에 대구시민 대다수가 사용하는 정수장이 들어섰다"며 "사진속의 우물이  없어지지 않도록 보존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용우기자 ywpark@imaeil.com

사진: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의 물긷는 모습 뒤로 정겨운 농촌풍경이 보이는 60년대(위쪽 사진)와 덮개로 덮어놓은 우물과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현재 풍경이 묘한 대조를이룬다.

- 2005년 03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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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년전 대구역 초가지붕에 통나무집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21:07

101년전 대구역 초가지붕에 통나무집
1905년,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기차역인 대구역이 문을 열었다. 당시 대구역은 볏짚 지붕에다 통나무로 엮어 지어졌다. 10평 남짓한 초가집. 초라했지만 이곳은 '경부선 시대’의 화려한 출발을 알리는 발원지였다.

그리고 101년. 경부선엔 고속철 KTX가 다닌다. 대구는 KTX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고, KTX 역사를 갖게된 김천도 철도를 무기로 혁신도시를 유치, 비약을 준비하고 있다. 대구경북 철도 101년. 이곳을 따라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앞으로는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철도의 어제

1905년 개통된 경부선은 국토개발의 중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도시 간 명암을 엇갈리게 만들었다.

경부선의 첫 설계 당시만 해도 노선은 '서울~충주~안동~대구~경주~울산~부산'이었다. 그러나 충주 유림들이 "열차의 검은 연기가 벼농사를 망치고, 조상들의 영혼이 놀란다"며 극구 반대, 노선이 바뀌었다. 때문에 충주는 교통 요충지라는 옛 명성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안동 역시 경부철도에서 소외되면서 '경북 1등 도시’를 내줘야 했다.

반면 '금전'이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에 불과했던 경북 김천은 경부철도가 놓인 뒤 교통 도시로 급성장했다. 그리고 100여 년. 김천은 2005년 12월 경북지역으로 옮기는 13개 공공기관이 들어설 혁신도시 예정지로 선정, '용꿈’을 꾸게 됐다. '철도의 위력’이 나타난 것이다.

또 1918년엔 대구를 기점으로 금호강 연안을 따라 영천에 이르는 대구선이 개통됐고 1924년에는 경북선(김천~영주) 가운데 김천~상주 구간이 뚫렸다.

포항과 부산진을 잇는 동해남부선은 1935년에 제 모습을 갖췄다. 동해남부선은 동해안의 해산물과 해안지방의 자원 수송을 목적으로 부설된 철도. 동해남부선이 태어나면서 신라 건축양식을 본뜬 경주 역사와 불국사 역사도 만들어졌다.

일제가 물러간 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북선과 문경선이 잇달아 개통됐다. 무연탄과 비료, 시멘트 등의 수송을 위해서였다.

점촌에서 영주를 잇는 경북선 선로도 신설돼 1966년 11월 개통했다. 3년 뒤인 1969년에는 문경과 점촌을 연결하는 문경선이 완공됐다. 은성광업소에서 생산된 무연탄을 수송하기 위해 기존 점촌~가은 구간에 진남 신호소~문경 구간을 연장한 것. 1968년에는 포항종합제철소의 원자재 공급과 생산제품을 수송하기 위한 포항종합제철선(괴동선)이 개통됐다.

▨철도의 오늘

2004년 4월 KTX 경부 고속철도가 착공 12년 만에 개통했다. KTX는 시간당 300㎞로 질주하며 대구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를 100분으로 좁혀놨다.

고속철도 이용객도 날로 늘어 2005년 11월 현재 KTX를 통해 동대구역을 찾은 이용객은 407만2천614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248만1천73명)에 비해 64%나 증가했다. 반면 새마을, 무궁화 등 일반열차의 경우, 지난해 11월 현재 832만4천47명이 이용, 전년 같은 기간(903만3천227명)보다 18.3%나 줄어들었다.

고속철은 삶의 질·산업·교통문화·관광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왔다. 고속철이 가져다준 최고의 선물 중 하나는 바로 '시간 및 비용 절약'. 주말 부부의 오붓한 시간이 길어졌고, 하루 출장이 가능하게 됐다.

당초 고속철 개통으로 인해 쇼핑객 및 공연·전시회 문화 관람객, 병원 환자 등의 수도권 역유출 우려도 있었지만 기우인 것으로 나타났다. 백화점 등 지역 유통업계는 쇼핑객의 이탈은 거의 없고 오히려 개통 이전에 비해 매출이 는 것으로 분석했고, 수도권의 오페라, 뮤지컬, 연극, 전시회 등 다양하고 풍부한 전시·공연으로 역유출이 우려됐던 문화 관련 분야도 현재까진 고속철의 덕을 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고속철의 대구도심 구간(11.5㎞) 통과방식이 지상화로 확정, 대구시는 오는 2010년까지 철로변 주변 및 도심 낙후지역, 동대구역세권을 교통, 관광, 비즈니스, 문화 등 복합기능을 갖춘 신도심으로 대대적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내일의 철도

동대구역에서 열차를 타고 영국 런던까지 갈 수 있다면? 꿈이 아니다. 남북종단철도(TKR)를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중국횡단철도(TCR)와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가 건설되면 충분히 가능하다. 대구에서 서울, 평양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 영국 런던까지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다는 것.

유라시아 대륙으로 통하는 물류 체계가 확보되면 한반도는 단숨에 동북아 물류·수송기지로 도약할 수 있다.

우선 경의선이 개통되면 개성공단 물류비 절감과 물자교류 확대 등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경제협력의 토대가 마련된다. 동해선도 금강산 관광 열차로 활용될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 TSR(시베리아 횡단철도)-TKR(한반도 종단철도)이 연결되면 남·북한과 러시아는 매년 1억 달러 이상의 운임 수입을 거둘 수 있을 전망.

또 경의선이 복원되면 한국-유럽 간 물동량의 20%, 일본-유럽 물동량의 5% TSR로 실어 나를 수 있고 체증이 심한 중국 대련항 물량의 10%, 천진항 물량의 5%가 TKR을 이용하게 된다.

문제는 남북한 철도연결이 답보 상태에 있다는 것. 당초 올해안에 실시될 예정이었던 경의선·동해선 시범운행은 무산된 상태. 하지만 내년에는 개통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의선과 동해선은 열차 운행이 가능하다. 다만 북측 구간의 경우 역사 및 신호, 통신, 전력계통의 공사가 진행중이며, 내년 초면 이 같은 주변공사가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개통된다 하더라도 북한철도의 현대화를 위한 재원조달, 구 공산권철도운영체인 국제철도협력기구(OSJD)에 가입해 운영 자격을 따내야 하는 등 국제적인 여건도 조성돼야한다. 북한 철도 현대화를 위해서는 28억 달러(3조∼4조 원)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대구·경북을 지나는 철도 노선

1)정규노선- 경부선(서울-부산), 중앙선(청량리-경주), 영동선(영주-강릉), 대구선(가천-영천), 동해남부선(부산진-포항), 경북선(김천-영주)

2)지선- 문경선(점촌-문경), 괴동선(포항종합제철선·효자-괴동), 가은선(주평-가은), 북영주선(중앙선-영동선 연결), 영천 삼각선(대구선-중앙선 연결)

사진: 경부철도회사 대구건축공사 사무소와 숙사(1904년 3월)

- 2006년 01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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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청 직원 골목 답사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20:53


대구 중구청 직원 골목 답사
"이 작은 골목이 지난날 유생들이 과거보러 가던, 100년전만 해도 대구에서 가장 긴 성밖골목이었다니…. 동산에 이런 서양식 정원이 있을줄이야…. 이곳이 뽕나무골목,  저쪽이 화교거리…".

공무원들이 단체로 골목 답사에 나섰다. 대구시 중구청 간부를 중심으로 한 공무원 26명이 9일 오전 10시부터 3시간 동안 대구의 역사 골목을 답사했다.

공무원들은 업무상 늘 접하던 골목골목을 직접 걸어다니며 유서깊은 건물과 전통있는 음식점, 문화적·사회적 명소를 확인하고 골목에 어린 살아있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특히 이같은 골목 답사는 최근 약령시 테마거리 조성사업 지하굴착 공사현장에서 대구읍성 성벽돌이 발견됨에 따라 공사가 중단되는 등 문화재행정 부실에 대한 시민들의 비난여론이 높은 때여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남산동 아미산~관덕정~진골목~화교거리~염매시장~떡집골목~성밖골목~약전골목~뽕나무골목~동산 등을 둘러 본 공무원들은 길 모퉁이의 돌멩이 하나, 담장에 박인 붉은 벽돌 한장에도 역사적 숨결이 담겨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는 표정들이었다.

골목 답사를 제안한 권대용 중구청 부구청장은 "공무원들의 지역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업무추진에 참고하기 위해서"라며 "반응이 좋으면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2·3차 답사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답사 가이드 자원봉사자로 나선 권상구 골목문화팀장은 "공무원들의 관할지역 골목답사인 만큼, 약전골목 성벽돌과 상화 시인 고택 일대 그리고 남산동 초가집 보존 여부 등 정책적인 문제도 많이 부각시켰다"고 말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 2002년 11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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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9세 대구 중앙로 변신 꿈꾼다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20:36

올해 89세 대구 중앙로 변신 꿈꾼다
인도를 따라 실개천을 만드는 등 대구의 상징거리인 중앙로를 업그레이드시키려는 대구시의 계획이 발표된(본지 9일자 1면 보도) 이후 시민들의 반응이 뜨겁다. 매일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엔 "좋은 아이디어다" "여름에 도심 열섬 현상이 없어져 한결 시원해지겠다"는 등 기대감을 표시하는 누리꾼들의 글이 잇따랐다. 반면 "중앙로는 너무 좁아서 실현불가능하다"는 회의적인 의견도 올라왔다.

서울의 청계천처럼 중앙로를 물길이 흐르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변신시키려는 시의 계획을 계기로 대구의 대표거리인 중앙로를 다시 들여다봤다.

1)대구와 애환 함께한 중앙로

길은 소통을 가져오고, 문명을 낳는다. 나이가 89세인 중앙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달구벌대로, 국채보상로, 동대구로 등 넓고 쭉 뻗은 도로에 밀려났지만 중앙로는 아직까지 대구를 대표하는 도로다. 대로(大路)로 불렸을 만큼 처음 선보였을 때엔 대구에서 가장 넓은 도로였고, 향촌동, 약전골목 등과 함께 중앙로에는 100년 가까이 대구 사람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

꼭 100년 전인 1906년 대구읍성이 붕괴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대구에 근대화의 ‘신호탄’이 울려퍼졌다. 성이 사라진 자리가 현재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길이 됐다. 3년 후인 1909년엔 지금의 중부경찰서 앞을 지나는 십자대로가 생겼고, 이 무렵부터 기성세대들의 귀에 익숙한 ‘신작로(新作路)’란 말이 대구에도 처음으로 나돌게 됐다.

1917년에 드디어 대구역에서 중앙파출소까지 대구의 남과 북을 잇는 중앙로가 뚫렸다. 비로소 대구의 동서남북 대로의 골격이 짜인 셈. 당시 일본인들은 중앙로를 중앙통으로 불렀으며 대구에서 처음 선보인 폭 12간(間·1간은 약 1.82m) 도로여서 사람들로부터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당시 경북 도내 곳곳에서도 새로 생긴 중앙로를 보기 위해 ‘원정’을 올 정도로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았던 것.

박경용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일제 식민지배 세력이 도시개발을 통해 지배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중앙로가 만들어졌다"며 "그러나 대구의 남과 북을 잇고 대구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측면에서 중앙로는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비록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도로였지만 중앙로는 대구역사 신축공사와 더불어 당시 대구의 상권 판도를 단번에 바꿔놓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대구 최대거리였던 염매시장에서 계산동으로 이어지는 읍성의 남쪽 부근은 시들해지고 대구역전과 북성로, 향촌동, 동문동, 동인동 일대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 특히 당시 최고의 번화가 북성로는 ‘대구의 긴자(銀座)’로 급부상했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도 계속 대구의 대표적 거리 자리를 차지했던 중앙로는 1960년대에도 그 위세를 떨쳤다. 섬유특수 등으로 돈이 잘 돌자 중앙로 인근 향촌동이 서울의 무교동, 부산의 남포동과 함께 전국 3대 주점가로 흥청댔고, 중앙로옆 중앙파출소는 취객들로 항상 붐빌 정도였다. 이 무렵 대구의 예술인들도 중앙로와 그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동성로 일대에 백화점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중앙로의 빛은 바래기 시작했다. 동성로 상권의 축이 중앙로 서편 향촌동을 누르기 시작했고, 대구 상권이 점차 남하하면서 중앙로 주변 상권이 쇠퇴기로 접어든 것. 특히 중앙로를 중심으로 서쪽 상권은 쇠락을 거듭했다.

급기야 국채보상로, 달구벌대로 등 대구의 도로망이 확충돼 대구 상권의 확산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중앙로는 대구의 대표 거리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특히 지하철 1호선 공사가 중앙로를 따라 진행되면서 중앙로 쇠퇴 속도는 빨라졌다.

대구와 애환을 함께했던 중앙로는 대구 시민들에게 가슴 아픈 거리이기도 하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화재 참사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입었던 것. 당시 중앙로엔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고, 가족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비명이 끝없이 울려퍼졌다. 그 이후 중앙로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부상자들의 회복을 기원하는 애도의 물결로 흘러넘쳤다.

지하철 개통 이후 중앙로는 다소 활기를 찾았지만 예전의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흥청대던 분위기 대신 어르신들이 중앙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중앙로의 서편과 일부 동편 한구석에 실버거리가 형성되면서 어르신들의 전용거리로 변모한 것. 중앙로 서편은 다방, 동편은 커피숍일 정도로 중앙로 동·서편의 분위기가 다르다. 서편인 약전골목, 진골목에서는 휴대전화 판매업소를 찾아보기 힘든 반면 동편은 이들 업소가 집단촌을 이룰 정도다. 서편에서는 무슨무슨 식당이란 간판이 흔하지만 동편에서는 패스트푸드점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있는 것도 대조적이다. 중앙로를 경계로 양편의 색깔이 확연하게 다른 셈이다.

이제 89세가 된 중앙로는 다시 변신을 꿈꾸고 있다. 버스와 택시만 다니는 대중교통전용지구가 되고 인도를 따라 실개천과 분수, 가로수, 의자 등이 설치되는 등 중앙로의 모습이 확 달라지는 것. 한 환경전문가는 "중앙로는 대구의 중심가로로 재승격, 조성돼야 한다"며 "실개천은 물론 가로시설물, 포장, 녹화 및 식재, 간판정비, 조명 등에서 중앙로는 조형성과 심미성 및 공공성 그리고 역사성을 갖춘 거리로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 2006년 0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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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에 실개천…'대구 청계천' 조성한다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20:35

중앙로에 실개천…'대구 청계천' 조성한다
대구의 상징거리 가운데 하나인 중앙로(반월당네거리~대구역네거리 1.05km)가 서울의 청계천처럼 물이 흐르는 길로 탈바꿈한다.

대구시는 9일 올 상반기 중 중앙로 경관조성계획 등을 구체화하고 하반기에 이 구간을 실개천이 흐르는 대중교통전용지구(버스와 택시만 통행시키고 승용차의 통행은 원칙적으로 금지)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156억 원(국비 50억 원·시비 106억 원)을 투입해 2007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2008년까지 중앙로를 친환경적인 거리로 조성한다는 것.

특히 현재 4차로인 반월당네거리에서 대구역네거리 사이의 중앙로를 2차로로 축소하는 대신 인도를 넓히고, 인도를 따라 물길을 만들기로 했다. 물길의 구체적인 길이와 폭, 깊이 등은 추후 확정할 예정이나 길이는 약 1km, 폭은 1~2m, 깊이는 어른들이 발을 담그거나 어린이들이 물장구를 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질 전망이다.

일부 구간은 보도를 투명유리로 설치해 그 밑에 물길이 흐르는 도심공간으로 변모시킨다는 것.

물길에 사용될 물은 반월당네거리 지하 30m에 위치한 3곳의 지하수 집수정 시설로부터 깨끗한 지하수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사용하기로 했다. 반월당네거리 일대 지하에는 하루 4천100여t의 지하수가 모이고 있으며 그 중 약 70%인 3천t 정도가 실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구시는 또 중앙로 인도에 특색있는 포장재를 깔고, 다채로운 조명을 설치해 시민들이 자주 방문하고 싶고, 이용하기 편리한 거리로 만들기로 했다. 버스이용객 쉼터, 대중교통이용자 안내단말기, 가로수, 벤치, 분수, 공중화장실 등 각종 조형물을 설치해 대구 시티투어 코스에 포함시키고 장기적으로 이 일대의 상가 간판정비도 병행해 아름다운 거리로 가꾸어 나갈 계획이다.

공사에 따른 상인들의 불편과 영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2007년 공사착공시점부터 버스와 택시만 통행시키고 승용차의 통행은 금지시키며 공사기간은 8개월 이내로 대폭 단축하기로 했다.

나아가 시는 중앙로 일대를 인근의 동성로와 교동시장의 패션주얼리 특구, 약령시 한방특구, 경상감영공원 등과 연결시킨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올해안 배전반 이설공사가 완료되는 동성로는 향후 ‘중앙로 대중교통전용지구 지정’과 ‘중심시가지 상권 활성화법’ 제정시 전문연구기관에 ‘상권활성화계획’ 용역을 의뢰해 이 일대 전체를 대구의 대표적 테마거리 및 문화관광 클러스터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신경섭 대구시 교통정책과장은 "전국 최초로 추진되는 대중교통전용지구 지정과 물길 등을 비롯한 중앙로 상징거리 조성사업이 완료되면 중앙로는 파리의 샹제리제 거리, 중국의 상하이 거리, 서울의 청계천 등과 같이 명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사진:대구를 대표하는 거리인 중앙로가 서울의 청계천처럼 물이 흐르는 거리로 탈바꿈한다. 중앙로의 변천 모습(위로부터 1930년대, 1960년대, 2006년 현재, 2년 후 물길이 흐를 중앙로의 조감도)

- 2006년 02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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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매일신문 2006.2] 대구 중앙로 변신을 꿈꾸다 :: 2006/04/01 20:34

대구 중앙로 변신을 꿈꾸다-(상)되돌아본 중앙로 100년
대구 첫 남북 신작로 ‘도시발전 한축’
인도를 따라 실개천을 만드는 등 대구의 상징거리인 중앙로를 업그레이드시키려는 대구시의 계획이 발표된(본지 9일자 1면 보도) 이후 시민들의 반응이 뜨겁다. 매일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엔 "좋은 아이디어다" "여름에 도심 열섬 현상이 없어져 한결 시원해지겠다"는 등 기대감을 표시하는 누리꾼들의 글이 잇따랐다. 반면 "중앙로는 너무 좁아서 실현불가능하다"는 회의적인 의견도 올라왔다.

서울의 청계천처럼 중앙로를 물길이 흐르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변신시키려는 시의 계획을 계기로 대구의 대표거리인 중앙로를 다시 들여다봤다.

1)대구와 애환 함께 한 중앙로.

길은 소통을 가져오고, 문명을 낳는다. 나이가 89살인 중앙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달구벌대로, 국채보상로, 동대구로 등 넓고 쭉 뻗은 도로에 밀려났지만 중앙로는 아직까지 대구를 대표하는 도로다. 대로(大路)로 불렸을 만큼 처음 선보였을 때엔 대구에서 가장 넓은 도로였고, 향촌동, 약전골목 등과 함께 중앙로에는 100년 가까이 대구 사람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

꼭 100년 전인 1906년 대구읍성이 붕괴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대구에 근대화의 ‘신호탄’이 울려퍼졌다. 성이 사라진 자리가 현재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길이 됐다. 3년 후인 1909년엔 지금의 중부경찰서 앞을 지나는 십자대로가 생겼고, 이 무렵부터 기성세대들의 귀에 익숙한 ‘신작로(新作路)’란 말이 대구에도 처음으로 나돌게 됐다.

1917년에 드디어 대구역에서 중앙파출소까지 대구의 남과 북을 잇는 중앙로가 뚫렸다. 비로소 대구의 동서남북 대로의 골격이 짜여진 셈. 당시 일본인들은 중앙로를 중앙통으로 불렀으며 대구에서 처음 선보인 폭 12간(間·1간은 약 1.82m) 도로여서 사람들로부터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당시 경북 도내 곳곳에서도 새로 생긴 중앙로를 보기 위해 ‘원정’을 올 정도로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았던 것.

박경용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일제 식민지배 세력이 도시개발을 통해 지배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중앙로가 만들어졌다"며 "그러나 대구의 남과 북을 잇고 대구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측면에서 중앙로는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비록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도로였지만 중앙로는 대구역사 신축공사와 더불어 당시 대구의 상권 판도를 단번에 바꿔놓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대구 최대거리였던 염매시장에서 계산동으로 이어지는 읍성의 남쪽 부근은 시들해지고 대구역전과 북성로, 향촌동, 동문동, 동인동 일대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 특히 당시 최고의 번화가 북성로는 ‘대구의 긴자(銀座)’로 급부상했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도 계속 대구의 대표적 거리 자리를 차지했던 중앙로는 1960년대에도 그 위세를 떨쳤다. 섬유특수 등으로 돈이 잘 돌자 중앙로 인근 향촌동이 서울의 무교동, 부산의 남포동과 함께 전국 3대 주점가로 흥청댔고, 중앙로옆 중앙파출소는 취객들로 항상 붐빌 정도였다. 이 무렵 대구의 예술인들도 중앙로와 그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동성로 일대에 백화점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중앙로의 빛은 바래지기 시작했다. 동성로 상권의 축이 중앙로 서편 향촌동을 누르기 시작했고, 대구 상권이 점차 남하하면서 중앙로 주변 상권이 쇠퇴기로 접어든 것. 특히 중앙로를 중심으로 서쪽 상권은 쇠락을 거듭했다.

급기야 국채보상로, 달구벌대로 등 대구의 도로망이 확충돼 대구 상권의 확산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중앙로는 대구의 대표 거리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특히 지하철 1호선 공사가 중앙로를 따라 진행되면서 중앙로는 쇠퇴 속도는 빨라졌다.

대구와 애환을 함께 했던 중앙로는 대구 시민들에게 가슴 아픈 거리이기도 하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화재 참사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입었던 것. 당시 중앙로엔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고, 가족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비명이 끝없이 울려퍼졌다. 그 이후 중앙로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부상자들의 회복을 기원하는 애도의 물결로 흘러넘쳤다.

지하철 개통 이후 중앙로는 다소 활기를 찾았지만 예전의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흥청대던 분위기 대신 어르신들이 중앙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중앙로의 서편과 일부 동편 한 구석에 실버거리가 형성되면서 어르신들의 전용거리로 변모한 것. 중앙로 서편은 다방, 동편은 커피숍일 정도로 중앙로 동·서편의 분위기가 다르다. 서편인 약전골목, 진골목에서는 휴대폰 판매업소를 찾아보기 힘든 반면 동편은 이들 업소가 집단촌을 이룰 정도다. 서편에서는 무슨무슨 식당 이란 간판이 흔하지만 동편에서는 패스트푸드점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있는 것도 대조적이다. 중앙로를 경계로 양 편의 색깔이 확연하게 다른 셈이다.

이제 89살이 된 중앙로는 다시 변신을 꿈꾸고 있다. 버스와 택시만 다니는 대중교통전용지구가 되고 인도를 따라 실개천과 분수, 가로수, 의자 등이 설치되는 등 중앙로의 모습이 확 달라지는 것. 한 환경전문가는 "중앙로는 대구의 중심가로로 재승격, 조성돼야 한다"며 "실개천은 물론 가로시설물, 포장, 녹화 및 식재, 간판정비, 조명 등에서 중앙로는 조형성과 심미성 및 공공성 그리고 역사성을 갖춘 거리로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 2006년 02월 10일 -





대구 중앙로 변신을 꿈꾼다-(중)어떤 모습으로 바뀌나
‘휴식+문화’ 공존 대표거리 조성
세계의 대도시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난제 가운데 하나가 도심 공동화(空洞化)다. 대구도 마찬가지로 특히 중앙로를 중심으로 한 도심은 주거기능이 쇠퇴하고, 도심이 갖고 있는 고유한 기능인 중심상업 기능마저도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교통측면에서도 중앙로는 개선이 시급한 실정. 도심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중앙로는 대량교통을 처리하는 간선기능을 발휘해야 하나 폭이 22m정도로 양방향 4차로에 불과해 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실정. 보행자수에 비해 열악한 보행환경을 가진 것도 문제점이다.

이에 따라 대구시는 오래전부터 중앙로 개선 방안을 모색해왔다. 그 결과 도출된 방안이 중앙로를 대중교통 전용지구로 만드는 것. 우선 중앙로에는 버스와 택시만 통행시키고 승용차의 통행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겠다는 게 그 중요한 골자다. 또 왕복 4차로를 2차로로 줄여 남는 2개 차로는 보행자 전용도로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조해녕 대구시장은 "중앙로의 대중교통 전용지구 지정에는 교통문제 해결은 물론 중앙로 주변 상권의 활성화를 위한 대책도 함께 포함시킬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아가 대구시는 중앙로를 사람들이 모이고, 휴식과 문화가 공존하는 거리를 만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단순하게 교통, 상업적 측면에서 변모시키기보다는 친인간, 친환경적인 대구의 대표거리로 재탄생시키겠다는 포부다. 신경섭 대구시 교통정책과장은 "현재의 중앙로를 개선해야 한다는 점은 시민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며 "중앙로에 인접한 건물의 주인과 점포 상인, 보행자, 대중교통 이용자, 나아가 시민들이 모두 혜택을 누리는 차원에서 중앙로의 변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 시민들의 큰 관심을 끈 중앙로 실개천 사업도 중앙로 개선책의 핵심 사업 중 하나. 실개천 외에도 버스이용객을 위한 쉼터, 대중교통이용 안내단말기, 분수, 가로수, 의자, 공중화장실 등이 갖춰져 인도가 ‘가로공원’으로 조성된다. 실개천에서 어린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연인들이 가로수 아래 의자에 앉아 정담을 나누고, 어르신들이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쾌적한 거리를 만들겠다는 게 대구시의 구체적인 계획이다. 실개천 사업 등을 골자로 한 중앙로 경관조성계획을 보고받은 조 시장은 "매우 참신한 계획"이라며 사업추진에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중앙로 대중교통 전용지구 지정 및 경관조성의 사업기간도 8개월로 해 주변 상인들의 피해을 최소화한다는 게 대구시의 방침. 또 예산도 156억원 정도로 그다지 크지 않은 금액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게 대구시의 얘기다.

일부에서는 예산 마련을 걱정하고 있지만 대중교통 전용지구로 지정할 경우 국비지원이 가능해져 예산 확보는 무난하다는 게 대구시의 귀띔이다.

또 중앙로에 실개천이 들어설 수 있느냐는 일부의 의구심에 대해서도 대구시는 실개천에 필요한 용수확보 방안 및 실개천 조성의 토목·건축학적 타당성 등을 검토했기 때문에 당장 사업추진이 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대구의 상징거리인 중앙로의 변신은 주변 도심과의 변화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변모한 중앙로 일대를 인근의 동성로와 교동시장의 패션주얼리 특구, 약령시 한방특구, 경상감영공원 등과 연결시켜 대구 도심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것이 대구시의 장밋빛 청사진이다.

대구시는 "중앙로를 비롯한 이 일대 전체를 대구의 대표적 테마거리 및 문화관광 클러스터로 조성할 계획"이라며 "좁은 도심 공간에 동성로, 약령시, 보석거리, 로데오 거리 등 다른 도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볼거리가 집적돼 있어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밝혔다. 여기에 지하철 1호선은 물론 작년 10월 반월당을 환승역으로 하는 지하철 2호선 개통, 19일 시내버스 준공영제 시행과 더불어 중앙로에 대한 접근성도 매우 좋아 변신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것.

전국에서 처음으로 추진되는 대중교통전용지구 지정과 실개천을 중심으로 한 중앙로의 가로공원화가 완료되면 이 일대는 대구를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문가들은 "다른 지역에서 대구를 찾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하는 얘기가 '대구엔 대구다운 거리가 없다'는 것"이라며 "중앙로가 성공적으로 변모할 경우 전국의 대표 거리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사진: 중앙로의 2년 후 변신 모습 조감도.

- 2006년 02월 13일 -




대구 중앙로 변신을 꿈꾼다-(하)전문가·시민 의견
‘상권·보행공간’ 相生묘안 짜야
실개천 등 중앙로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꾸미고, 대중교통전용지구로 만드는 데 대해서는 대다수 시민들이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대구시는 예산확보 방안을 강구하고, 3월부터 구체적 계획 마련에 돌입키로 하는 등 사업추진에 가속도를 붙인다는 방침이다.

이제부터는 많은 시민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최적의 중앙로 개선 방안을 찾고, 그 것을 제대로 추진하는 데 역량을 모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작년에 열린 중앙로 대중교통전용지구 공청회에서 제기된 의견들을 중심으로 중앙로의 ‘갈 길’를 그려봤다.

△대중교통전용지구= 박용진 계명대 교수는 대중교통과 시내버스의 활성화 차원에서 중앙로 대중교통전용지구는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더불어 동성로는 자주 안가게 된다며 아이들과 함께 할 공간이 없다고 덧붙였다.

김경민 대구 YMCA 관장 역시 대중교통전용지구는 ‘필연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구 지정 추진시 도심상권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토론이 필요하다며 남북이동통로는 보행권과 직결되므로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김정희 건설교통부 서기관은 해외사례를 봐도 초기에 효과에 대한 우려가 있으나 진행 후에는 호응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또 대중교통전용지구 지정은 교통정책과 도심활성화 차원에서 매우 고무적이라며 중앙정부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적극 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윤대식 영남대 교수는 지하철 2호선 부근의 역세권을 잘 활용해야 한다며 반월당을 중심으로 발전의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 승용차가 있어야 도심이 활성화 된다는 논리는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공청회에 참가한 상인들은 승용차 이용자가 구매력이 높은 상황에서 중앙로의 승용차 통행을 금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침체한 상가 지원책부터 시작한 후 중앙로 공사를 시행할 것도 촉구했다.

△"특색있는 중앙로 만들어야"= (주)코리아 랜드스케이프 이제화 박사는 상권활성화는 사람의 이동문제라고 전제한 후 흡인력을 가질 수 있도록 확대된 보행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중앙로엔 명소가 없는 만큼 명소를 만들어야 한다며 야간 레이저 조명, 잘생긴 가로수 등 사람들을 유인할 수 있는 획기적 아이디어가 나와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기혁 계명대 교수도 대구의 도심은 가볼만한 곳이 없고,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한 곳이 없다며 그로 인해 도심기능이 약화되고 있다고 얘기했다. 또 구매력이 높은 30~50대는 거의 없는 실정인 만큼 돈이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는 흡인력이 있는 랜드마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달리 한 상인 대표는 대구시의 중앙로 업그레이드 프로젝트 추진에 대한 시의 의지를 믿을 수 없다고 꼬집었다. "상인이라면 내일보다 오늘이 시급하다"며 상인들이 호응하고 협조할 수 있도록 정책이 수립돼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보행자의 ‘천국’ 중앙로= 실개천 추진 등 중앙로 개선 방안 보도 이후 매일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엔 다양한 의견이 올라오고 있다. 한 누리꾼은 "좀 일찍 이런 생각들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찌들어 가고 있는 도시를 살리는 길은 편히 숨쉬며 걸을 수 있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아이디어다" "도심에 실개천이 생긴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것이다" "대구는 분지라서 도심재개발의 필요성이 더욱 높다"는 의견도 나왔다.

또 "적정 수심과 유속을 감안하면 하루 3천 t톤의 유지수는 부족함이 있다고 본다"며 "유지수 확보 방안을 구체적으로 계획해야 사업의 성공이 보장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청계천을 정비한 이명박 서울 시장 따라하기 아니냐" "폭 2m면 너무 좁다. 더 넓혀야 한다" "공평네거리, 아미고호텔,  반월당, 대구역 안으로 승용차 진입을 전면 금지하자"는 등의 의견도 눈에 띄었다.

중앙로 대중교통전용지구 사업에 대해 거리문화시민연대 권상구 사무국장은 "중앙로의 차선을 줄이는 대신 인도를 넓히는 등 중앙로를 대중 보행의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시의 발상은 바람직하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중앙로 실개천 사업은 시민들이 걷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오히려 줄이는 결과를 낳는다며 서로 이질적인 것들을 좁은 공간에 무작정 넣는 것보다 휴식공간 및 문화광장으로서의 역할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제안했다.

류규하 대구시의원도 "실개천 등 중앙로 대중교통전용지구 사업에 공감한다"며 "다만 승용차 통행을 금지시킬 경우 상권이 위축될 우려에 대한 대책 마련 및 상인들의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 2006년 02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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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ING DAEGU ‘四城路’ :: 2006/04/01 19:01

골목문화 오딧세이
WALKING DAEGU ‘四城路’

대구도심지의 골목들은 현재의 자리에 경상감영이 들어서면서 주로 형성되었다.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대구읍성이 건립되면서 안과 밖으로 주거지가 들어서게 되었고 논과 밭의 경계지점이었던 논두렁, 밭두렁은 자연스레 조금 넓혀져 골목이 되었던 것이다.

도심지 골목을 체계적으로 들여다보려면 대구읍성의 성곽을 허물고 형성된 사성로(四城路), 그 사이로 생겨난 십자대로, 1920년대의 중앙로의 역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1906년에는 서장대에서 달서문까지 철거되고 97년 3월 달서문에서 서소문을 거쳐 망경루까지 3주만에 철거가 되고 그 위에 신작로가 건설 되었다. 사성로는 경상감영공원자리에 있었던 선화당과 징청각, 중부경찰서자리의 객사터, 대구읍성의 4대문을 기리는 작은 표석, 조선시대 관덕정이었던 ‘천주교순교기념관’과 함께 대구읍성의 화려한 과거를 상기시키고 있다.

성곽을 허물고 난 뒤 대구부사 박중양은 1908년 12월 공비 1만 9,849원을 들여 폭 5간(間)의 길을 만들게 된다. 순수하게 민족자본으로 지어진 대구 최초의 근대식 신작로가 된다. 그 후 십자형대로(十字型大路)공사가 경상감영 앞 마당에서 시작된다. 1909년 3만 8,962원을 들여 폭5간6분1리의 크기로 서소문에서 대구시청까지의 길, 염매시장이 있는 영남제일문에서 대안동까지의 길을 조성하게 된다. 성밖에는 일본인, 성안은 대구 부민들이 많이 살았고 안팎의 땅값차이가 4배정도 났다고 한다. 북성로(元町)의 경우 성밖은 평당 6-10원인데 성안은 23원이었다. 일본거류민단의 식민정책으로 성곽이 허물어지고 길이나자 성밖 부지는 안쪽보다 10배 정도 뛰어올랐던 사실을 볼 때 대구지역 첫투기꾼은 일본식민지 개척자라 할 수 있다.

1909년 십자대로가 들어설 당시만 하더라도 경상감영, 대구부의 고유한 풍수체계와 전통구조들이 훼손되지 않았지만 일본의 식민정책은 십자도로가 교차하는 네거리주위에 많은 변화들을 만들게 된다. 아울러 대구역을 중심으로 대구역세권을 확장시켰다. 달성에는 일본통신부와 헌병대 설치 이후 일본신사와 공원까지 설치하였다. 선교를 목적으로 활동한 종교지도자들은 달서문 밖 동산에는 미국교회당과 선교사건축물, 남산에는 성모당과 같은 프랑스건축물들을 건축하였다. 십자대로 사거리주변에는 조선식산은행지점과 경찰서, 금융조합, 일본사찰인 서본원사, 동본원사 등 공공건축물이 들어서게 되고 경상감영이 있던 포정동과 향촌동은 상업행정업무의 중심지로 전락하면서 식민지배형 도심지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일제시대에 제작된 대구부전도(大邱府全圖) 중 대구부 중심가 부분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보세요)


현재 사성로는 어떠한 모습으로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보는 골목상권과 근대건축물들은 일제시대 당시의 동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크게 달라진 점은 향촌동과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이 동성로 대구백화점 쪽으로 많이 이동했다는 것이고, 객사에서 열리던 약령시가 상설시장으로 남성로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서성로와 북성로는 서문시장 큰장이 열렸고 일제시대 최대상권지였던 옛 흔적을 몇몇 주상병용 건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걷는 사람의 천국, 동성로
대구역 건너편 대우빌딩에서 한일극장을 지나 중앙파출소까지의 보행자전용로를 말한다. 최근까지 자동차가 들어왔으나 2003년 보행환경조성을 위해 바닥에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대리석으로 깔면서 인파가 더욱더 모이고 있다. 대구 도심지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형성되는 곳이며 청소년들이 가장 즐겨 다니는 놀이문화공간이 밀집해 있다. 한달에 한번 인테리어가 바뀔 정도로 유행에 민감한 곳이기도 하다. 동성로가 부각이 된 이유는 한국전쟁이후 교동상권이 확장하면서 상권이 한일극장, 대구고등법원(대구백화점 주차장자리)쪽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키네마구락부로 불렸던 한일극장과 중앙지하상권 개발로 상권은 한일로를 건너게 되고 69년 대구백화점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공평동 쪽으로 확장된 것이다. 대구백화점 뒤쪽에 밀집해 있던 학사주점들이 좀더 싼 임대료로 영업하기 위해 동아 양봉원 거리 쪽으로 옮겨가면서 새로운 동선이 생기게 된다. 봉산동 문화거리와 유신학원, 대구학원까지 상권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모든 상권의 힘의 중심은 동성로에 있었던 것이다. 매년 5월 동성로축제가 열리고 8월에는 동성로 일대에서 거리문화축제가 열린다.

한약냄새가 진동하는, 남성로
남성로는 약전골목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2002년 전선 지중화공사를 하면서 옛날 대구읍성 돌들이 무더기로 나와서 공사가 중단되었던 적이 있다.



=> 참고기사 (당시 대구 매일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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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전골목 지하 성벽돌 발견
한방테마거리 조성사업 공사를 하고 있는 대구 약전골목 일대 도로에서 지하에 묻혀 있던 대구읍성 성벽돌이 상당수 발견됐다.

영남대박물관의 양도영 학예연구원은 현장을 확인한 결과 공사장에서 나온 성벽돌은 화강암과 안산암으로 된 성벽 기초부분의 돌로 추정됐다.

이 중 일부 돌은 네모형으로 다듬어진 흔적이 뚜렷했으며, 또다른 일부는 쐐기형태가 선명하게 드러나 100년전 대구읍성 철거 이후 지하에 묻혀 있던 성벽돌로 밝혀졌다.

대구시 중구 중앙파출소 건너편에서 약령시 상징문간 600여m 구간의 약전골목 도로에는 현재 한방테마거리 조성사업에 앞선 전력설비 지중화 공사가 진행 중으로 이 과정에서 지하에 남아 있던 성벽돌들이 다수 드러나고 있다.

문화재관계자는 "일제때 대구읍성 해체와 함께 약전골목 지하에 남아 있던 성벽돌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의 축성방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국은 문화재 지표조사도 없이 공사를 강행,  읍성의 유적과 성벽돌이 마구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권상구 문화봉사단 골목문화팀장과 약령시보존위원회 관계자 등에 따르면 포클레인으로 도로를 파헤치면서 성벽돌로 보이는 상당수의 돌들이 발견되고 있지만 대부분 일반 흙더미와 함께 트럭에 실려 폐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대구문화재지키기 시민모임의 김계숙 대표는 "조상의 땀방울과 호국의지가 깃든 성벽의 마지막 흔적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파괴되고 있다"며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전반적인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쳐 발굴조사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구읍성은 조선 선조때 처음 축성됐다가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후 영조 때(1737년) 둘레 2,650m 규모로 증·개축됐으나 1906년경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 2002년 10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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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전골목 공사 중단 매장문화재 현장조사
대구읍성 성벽돌이 발견된 약령시 거리의 전력설비 지중화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대구시와 중구청에 따르면 약령시 공사현장에서 성 벽돌이 발견됐다는 본지 보도(24일자 23면)에 따라 일단 공사를 중지시키고 매장문화재 내장 유무에 대한 보다 정확한 현장 조사를 거친 다음 공사 계속 또는 문화재 발굴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방테마거리가 조성될 약령시에는 거리 미관 정비를 위한 전력설비 지중화 공사가 현재 20% 가량의 공정을 보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성벽돌이 나왔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 2002년 10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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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재 행정 실종(상)
약령시 테마거리 조성사업 지중화 공사 현장에서 대구읍성 성벽돌이 발견됐다는 본보(10월24일자) 보도에 따라 공사가 전면 중단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대구시는 그제야 중단된 공사구간에 문화재전문기관의 시굴조사를 의뢰, 그 결과에 따라 공사 재개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뒷북행정이다. 매장문화재가 발견된 공사 현장에서 대구시는 언제나 이랬다. 대구의 문화재에 웬만큼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약령시 거리가 도로를 중심으로 북측이 성내(城內) 남측이 성밖(城外)이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약령시보존위원회가 지난해 여름 발간한 ‘대구약령시 한방문화 연구’ 책자에 실린 대구성 지도는 바로 이곳이 과거 읍성의 남쪽 성벽이 있던 자리로,특히 지역 방위의 상징성과 중요한 건축 가치를 지닌 영남제일문이 근접해 있던 곳임을 적시하고 있다. 이 일대가 남성로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같은 연원 때문이다.

그런데 하마터면 지하에 남아있던 대구성의 흔적이 영영 사라질뻔 했다. 문화재 당국이 선조의 땀과 투쟁의 역사가 밴 대구읍성의 존재와 그 성의 남쪽 성벽이 위치했던 자리가 바로 약령시 공사 구간임을 몰랐을까. (아래의 첨부사진 참고)


* 사진출처 : 지리로 읽는 대구 이야기(2002) 송언근외 8인 著


1906, 1907년간 일제의 침탈로 외형적인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해서 귀중한 문화유산인 성벽의 기초부위가 지하에 남아있을 가능성 마저 무시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대구문화재지키기시민모임은 아무런 사전 조사.확인 작업도 없이 굴착 공사를 강행했다는 것은 ‘문화재에 대한 폭거’로 밖에 볼 수 없다고 흥분한다.

주보돈 경북대 박물관장(사학과)은 “성벽돌이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충분한 약령시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도 없이 도로 지하를 파헤쳐, 남아있던 성벽돌이나 읍성의 기초부위 유구가 훼손됐을 우려가 크다”고 안타까워했다.

문화재전문가와 약령시보존위원회 일부 관계자는 이번 약령시 테마거리 조성사업과 관련, 지하의 성돌을 발굴해 대구읍성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라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재연구가 박경용 박사(문화인류학)는 “성돌을 모아 약령시 일부 구간에 대구성 위를 걷는 이미지를 되살릴 수 있는 보도를 조성하는 것도 의미있는일”이라고 했다. 아울러 그 주위에는 대구성의 존재와 철거의 역사 그리고 남성로의 유래 등과 관련된 사료들을 전시한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거리문화시민연대는 “이번 공사로 흙더미와 함께 폐기처분된 성돌에 대한 재발굴 작업도 서둘러야 한다”며, 대구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거나 저지대에 매립된 성돌을 되찾기 위한 범시민운동을 제안했다.

* 사진출처 : 지리로 읽는 대구 이야기(2002) 송언근외 8인 著


대구의 역사와 정신을 상징했던 옛 성터에서 벌어진 문화재 훼손행위. 그리고 뒤늦은 시굴조사와 테마거리 조성사업에 시민들은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그것은 역사문화의 고장인 대구 시민들의 문화적인 자존심인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 2002년 11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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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로와 근접한 시장은 염매시장으로 동아쇼핑을 포함한 반월당일대를 이뤘은 지금은 많이 축소되었다. 영남제일관이 있었던 남문시장의 명맥을 이어 지금까지도 동아쇼핑센터와 같은 대형상권과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다. 주로 혼례떡, 돼지수육, 죽, 송이버섯 등을 전문으로 하는 상점들이 많다. 그 밖에 남성로의 남쪽 긴 골목은 영남대로가 이어지던 길의 흔적인데 ‘성밖골목’이라고 한다. 남성로는 최근에 약령시축제를 통해 전통문화환경이 밀집해 있는 근대문화공간으로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 외에 구 제일교회와 그 건너편의 구 대구YMCA건물, 일제시대 양조장, 계산성당, 이상화, 이상정, 서상돈 고택 등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있으며 대를 이어 약방을 운영하는 상점들도 많다. 1908년 경상감영 서편에 있던 객사가 파괴되면서 약령시는 공간을 잃어버리면서 서문시장, 남문시장 등지를 옮겨 다니다가 남성로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화교들이 밀집해 살았던 종로와 달성서씨들의 부자골목이었던 진골목과도 교차한다. 작년 5월 약령시축제가 열렸을 때 연인원 4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일제시대 최대상권 혼마찌를 가로지른 도로, 서성로
서성로는 약전골목의 끝에 세워진 약령서문에서 구 금호호텔 사거리를 지나 대구은행 서성로지점까지 이어진 도로를 말한다. 현재 차가 다니는 2차선도로로 확장되어 옛날의 정취는 남아있지 않지만 달서문과 서소문이 서쪽 성곽이 있어서 표석이 남아있다. 달서문에서 300m 떨어진 지점 오토바이골목 주변에서 조선시대 3대장이었던 ‘큰장’이 열렸다. 아직도 홍두깨전이니 닭전골목, 말전거리와 같은 명칭이 남아 들려오기도 한다. 일제시대 명칭이었던 시장북로(市場北路)에서 ‘시장’이 서문시장을 말하는데, 옛날엔 말전거리, 70-80년대엔 실가게거리, 현재는 신발골목으로 불린다. 서성로 주변에 옛날에 번성했던 돼지골목도 있지만 지금은 2집만 남아있다. 차들이 주로 다니는 도로라서 산업, 경제와 관련된 업종들이 들어차있다. 다트를 생산하는 함석상과 건축부자재 업체들이 몰려있다. 구 금호호텔 뒷길은 일제시대 최대 번화가였던 한일로(혼마찌)로 이어지는데 서성로와 교차하는 곳은 달서문이 있었다. 북성로와 이어지는 서성로 끝자락에 대구은행 서성로지점이 있는데 이일우선생이 지었던 민족학교 우현서루 옛터다. 우현서루 건너편에 이일우선생 고택이 현존하며 그 일가가 아직도 살고 있고 그 바로 옆이 시인 이장희 생가가 있었지만 그때의 고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우현서루 쪽은 한국인 부자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 풍채좋은 한옥들이 남아있고 이상화 시인 생가터도 서성로에 번지수를 두고 있다.

모도마찌(元町)라고 불린 일제시대 최대의 상권지, 북성로
일제시대 북성로는 동경의 긴자거리를 본따 은좌(銀座)로 불렸다. 은방울 모양의 수은가로등으로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기 때문이다. 거리 정식명칭은 원정(모도마찌, 元町)이었다. 일제시대 상권의 번영을 상징하는 일본인백화점인 미나까이(三中井, 삼중정)오복점은 바로 북성로에 있었고 5층짜리 건물에다가 엘리베이터까지 있었던 명물장소였다. 일제시대엔 미나깡이에서 우동한그릇이 지금의 패밀리레스토랑에서의 외식수준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은 철거되고 대우주차장이 들어와있다. 지금은 옛날의 번화가임을 추측해주는 수많은 주상병용일본식건물과 첨단의 공구기자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구역 옆에 있는 청과물상가가 원래 북성로 공북문 입구에 있었다가 옮겨간 것이라 한다. 해방후 문인, 예술가들의 단골다방이었던 백조다방도 있었다. 현재 북성로에 남아있는 근대건축물은, 벽산페인트건물로 쓰이는 구 조일탕건물과 37년에 지어진 상점병용주택으로 광명페인트사로 쓰이는 건물이 있고 시민회관 건너편 쪽에는 태성주방으로 쓰이는 구 구성운(九星運)건물은 34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건물들이 반백년 전에 지어져서 대구 근대건축사에 많은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는 길거리 건축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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