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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대구 추억기행 .45] 다방이야기<1> - 아루스 다방과 이인성 화백 :: 2006/04/0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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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자기한테 커피를 소개해주고 적적할 때 말벗까지 되어준 벽안의 여인에게 보답하기 위해 1902년 아관 옆에 184평규모의 대지를 하사한 뒤 2층 적벽돌조 손탁호텔까지 만들어준다. 고종의 속맘을 헤아린 손탁은 1층 에 사교클럽을 겸한 커피숍을 꾸미는데, 거기가 한국 최초의 다방격인 정동 구락부가 된다. 일본은 1726년쯤 네덜란드 상인으로부터 커피를 소개받았고, 일본 최초의 커피숍은 1886년 도쿄에 세수정(洗愁亭)이다. 일본에선 다방이 기사댕(喫茶店)으로 불렸다. 1930년대 두 명의 천재 예술가가 서울과 대구에서 다방을 개업한다. 당시 예술가에게조차 난해했던 ‘오감도’란 시를 발표했던 시인 이상은 33년 서울 종로에서 제비다방을 연다. 대구시 중구 태평로에서 태어난 화가 이인성은 36년쯤 중구 아카데미 극장 옆에 대구사람으로선 처음으로 아루스다방 문을 연다. 이인성은 일제 때 한국 화가들의 최대 소원이던 일본 제전(帝展), 문전(文展)은 물론 한국인 을 대상으로 한 선전(鮮展)에도 여러 차례 입상하는 등 일본화단의 기린아 로 촉망을 한 몸에 받으면서 대구에 안착한다. 그는 자신의 재주를 아껴주던 당시 대구여고보 교장 시라가 주키지(白神 壽吉)의 중매로 남산병원장 김재명의 장녀 옥순(玉順)과 결혼한다. 김 원장 은 맏사위가 술독에서 빠져나와 명화를 그려주길 바라는 맘에서 병원 옥상에 그를 위한 아틀리에를 만들어주었다. 대구에선 첫 화실이었다. 당시 전국적인 명사였던 이인성은 ‘반월당’과 함께 일제 대구의 대표적 백화점이던 ‘무영당’ 사장 이근무(李根茂)와 계성고교 재학시절 ‘뜸북새’를 작곡 한 음악평론가이자 동화작가인 윤복진 등과 교유했다. 밤이 돼 무료하면 아틀리에 맞은편 고려예식장 옆 골목에 있던 민족시인 이상화 사랑채로 마실을 나가기도 했다. 아틀리에 손님들이 갈수록 늘어나자 장인어른한테 미안하기도 해서 자기 손님들을 위한 별도의 사랑방이 절실했다. 그런 필요에 의해 아루스다방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다방에서 끔찍스러운 사건(10월30∼31일 매일신보 4면 기사 게재)이 37년 10월28일 오후 6시에 발생한다. 이인성은 선민의식이 너무 강했고 술을 먹으면 인사불성이었다. 그가 워낙 도도하게 놀자 수창소학교 선배이자 화가 지망생이던 김부돌(金扶乭)이 심통을 부렸다. 너 한번 당해봐란 심산으로 25세때 일본 제전에 입선한 400호 크기의 ‘한정(閑庭)’의 중앙 상단부를 칼로 30cm 이상 찢자 분을 삼키지 못한 이인성이 김부돌의 칼을 빼앗아 선배의 가슴을 찔렀다. 이인성은 자기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그림을 난도질한 선배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다. 김부돌은 남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이인성은 한동안 다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정신을 찾은 이인성은 정형수술 전문의처럼 ‘한정’을 정성스럽게 봉합해준다. 당시 아루스다방에 가본 적이 있는 신해철(82·전 대구일보 사장, 이인성와 종동서간), 대구시의원과 영남일보 상무를 역임한 강판룡(80), 일제때 일본 유학을 갔다 온 성만경(83)의 회고 에 따르면 당시 아루스의 명물은 실로 기워진 ‘한정’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작품은 호암갤러리는 물론 맏아들 이채원(54)의 손을 벗어나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아루스다방 탁자는 검정색이었 으며, 빅타(Victor) 회사에서 만든 유성기, 여종업원까지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인성은 남산병원을 떠나 아루스다방 옆으로 아틀리에를 옮겼다. 하지만 그는 알코올에 중독된 듯 그림보다 술에 더 무게중심을 둔다. 1940년대초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으로 거처를 마련했지만 주사는 더욱 심해갔고 급기 야 6·25 전쟁이 발발하던 그해 겨울, 서울 시내 술집에서 마포경찰서 교통순경 김성환과 사소한 시비를 벌이다가 피격돼 39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인성이 대구에 남기고 간 아루스다방은 중앙로 YMCA 바로 북편 아루스 제과점을 낳았으며, 이화진 등이 다방의 명맥을 잇다가 60년대 의학박사 박태환이 인수해 다방을 허물고 그 자리에 박내과를 세웠다. 빌딩은 현재 충무김밥 및 비디오방, 커피숍 등 복합상가로 임대돼 젊은이의 양지로 변모했다. 아쉽게도 그 공간을 찾는 젊은이들은 그 자리가 대구 최초의 다방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






[PDF] 일제치하 선전 최고작가의 영광과 비애 :
| contents 1999.11 작품 발굴 -- |
![]() 일제 시대 한국 서양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인 이인성의 작품 여러 점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삼성문화재단이 기획하고 한국미술연구소가 진행하는 ‘한국의 미술가’ 시리즈 《이인성》편 출간 준비중 발굴된 것이다. 정물화와 풍경화 뿐만 아니라 그동안 흑백 도판으로만 알려졌던 <카이유> <복숭아> 등, 그리고 미공개작이었던 수묵화도 함께 소개된다. 향토적 서정주의 경향의 작가로 알려진 이인성의 새로운 작품세계를 감상해 본다.
이인성이 화가로서 활동한 기간은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으로 약칭)를 통해 데뷔한 이후, 1950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작가 중 그림만을 전업으로 삼은 몇 안 되는 화가였다. 그런 만큼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에겐 이인성의 작품을 직접 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1972년 서울의 한국화랑에서 <이인성 회고전>이 열려 많은 작품이 공개되었지만, 그후로 열렸던 대부분의 전시회는 소규모였거나 몇몇 대표작들만이 간헐적으로 공개된 정도였다. 이번에 삼성문화재단과 한국미술연구소가 공동으로 기획한 ‘한국의 미술가’ 시리즈 중 《이인성》편이 발간되어 이인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의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카이유>를 비롯해 <복숭아> <산사> <단발머리 소녀> <아기> 등 새롭게 찾아낸 10여 점의 작품들은 이인성의 예술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미술사적 위상을 세우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새로 발견된 이인성의 회화와 후원자들 이인성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타고난 재능으로 어려서부터 주위의 관심을 끄는 가운데 여러 번의 행운과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우선 그를 후원한 사람으로 1920년대 후반 대구에 수채화를 보급시켰던 서동진을 들 수 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되었던 이인성은 서동진이 경영하던 대구미술사에 입사하여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동진에게 수채화를 배우며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하던 이 무렵의 작품들은 대부분 조선미전의 도록을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어서 초기 작품세계를 파악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인성이 조선미전을 통해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다시 그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후원자가 나타난다. 당시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장으로 고미술 수집가였던 시라가 주키치(白神壽吉)는 이인성이 1931년 <세모가경>으로 특선을 차지하자, 동경에 있는 미술 용구 제조회사인 오오사마상회(王樣商會)의 사장에게 그를 소개하여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시라가의 주선으로 일본에 도착한 이인성에게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작품으로 1932년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카이유>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일본 궁내성(宮內省)에 판매되어 그동안 흑백 도판으로만 알려졌다가 최근에 국내로 반입되었는데, 유학 초기 이인성의 작품세계를 연구하는 데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풍경화만을 그렸던 그가 정물화를 개별적인 장르로 인식하고 그렸다는 점에서 주목되기 때문이다. 즉, 유학 이전에는 인물화나 정물화를 독립된 장르로 다룬 적이 없었으며, 인물은 그저 풍경의 일부분으로 등장할 뿐이었다. 따라서 그가 정물화를 관전에 출품하였다는 사실은 유학 이후 일어난 큰 변화의 하나로 기록될 만하다. 또한 청회색이나 황갈색이 지배적이던 대구 시기 작품들과 달리 원색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점, 작은 터치로 수채화의 경쾌한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는 점 등은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일본 유학을 계기로 다양한 서양 회화를 수용하며 자신의 화풍을 정립해 나가던 이인성은 1935년 고향 대구로 돌아와 남산병원 원장 딸인 김옥순(金玉順)과 결혼을 한다. 결혼으로 그는 다시 든든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다. 1936년 장인 김재명(金在命)의 배려로 남산병원 3층에 그토록 소망했던 아틀리에를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37년에는 조선미전에서 추천 작가의 자리에도 오른다. 30년대 후반의 새로운 작품세계 생활은 이렇게 안정이 되어갔지만 1930년대 후반의 작품은, 1930년대 중반에 이룩한 향토색이 소재주의로 귀착되는 한계를 보인다.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은 장식적인 배경을 생략하고 하나의 소재를 화면에 가득 채워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번에 도록 발간을 계기로 찾아낸 1939년 문부성미술전람회 입선작 <복숭아>에도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930년대 중반 작품들이 인물·풍경·정물을 한 화면에 종합하여 향토색을 구현했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은 나무 자체만을 확대하여 화면 가득히 채워놓았다. 또한 붉은색·녹색·노란색이 미묘하게 혼합된 바탕색과 녹색의 나뭇잎이 조화를 이룬 화면은 강렬한 원색으로 채색했던 1930년대 중반 작품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인성은, 수채화가로 더 잘 알려져 있듯이, 초기부터 수채화를 즐겨 그렸는데 이번에 발굴한 <산사>나 <바위가 있는 해안 풍경>은 수채화가로서 능숙한 경지에 이르렀던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두 작품은 종이 크기와 필치, 물감의 강약을 조절한 기법 등이 유사할 뿐만 아니라 둘 다 ‘Lee.i.s. 星’이라는 사인을 사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인의 형태로 보아 1940년대 초반의 작품들로 여겨지는데, 야외 사생을 나가 그 자리에서 직접 제작한 작품인 듯 사생에서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배어 있어 경쾌함이 느껴진다. 작가에게 물질적·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부인 김옥순이 1942년 세상을 떠나자 이인성은 삼덕동에 새로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딸 애향과 함께 지낸다. 지금까지는 부인 김옥순이 1940년에 사망하자 상경하여 서울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이번에 조사한 결과 김옥순의 사망 연도는 1942년이며, 1944년 작품 <해당화>를 조선미전에 출품한 곳이 대구로 나와 있는 것을 볼 때 1944년까지 대구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주위의 권유로 재혼한 후 상경을 하지만, 두 번째 부인마저 딸 하나를 낳고 그의 곁을 곧 떠나게 된다.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1949년의 작품 <단발머리 소녀>는 바로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승란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한국인의 인물상 정립시켜 그의 인물화들은 대부분 입을 꾹 다물고 무표정하게 화면 한쪽을 응시하고 있는데, <단발머리 소녀> 역시 몸은 약간 측면을 향하고 있지만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화면을 벗어날 정도로 꽉 채운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에서 일정한 방향을 따라 작은 터치를 가한 얼굴부분은 마치 목조각 같은 느낌을 주는데, 얼굴에 사용된 이 꼼꼼한 필치와 대조적으로 옷과 배경에는 대담하고 활달한 터치가 구사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나무판 위에 그려서인지 필치에서 강한 힘이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아주 연하게 물감을 칠했지만 얼굴과 배경을 녹색 계열로 처리한 대신 모자와 옷은 주황색 계열로 칠하여 산뜻한 느낌을 준다. 이인성은 이렇게 자기 주변에 있던 인물을 모델로 삼아 한국인의 얼굴상을 정립한 작가다. 서양화가가 그린 수묵화의 세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인성은 재료나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작가였다. 이번에 발굴된 작품 중 마지막으로 언급할 수묵화들은 이인성이 얼마나 폭이 넓은 작가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동안 이인성의 수묵화가 공개된 적은 더러 있었지만 사군자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사군자를 그린 이 작품들에서는 자유분방한 필치와 파격적인 구도가 돋보이며, 특히 이 작품들의 제작 시기가 해방 직후로 여겨져 관심이 집중된다. 1945년 이인성은 이화여중의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우리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교장 신봉조의 뜻에 따라 학급의 명칭을 종전의 일본색 짙은 사쿠라(櫻)·쓰바키(椿) 대신 매·난·국·죽을 각 학년에 사용하는 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인성이 내놓은 안이 채택되어 종전의 학년별로 사용하던 학급명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인성이 사군자라는 전통적인 소재를 그린 것은 이렇게 해방 이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었던 시대적인 흐름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백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이 느껴지는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수묵으로 그렸다는 점 외에도 등장 인물들이 전통적인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그가 향토색을 표현하기 위해 연구 범위를 전통화에까지 넓힌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 |||||
| contents 1999.11 한국의 고갱 이 인성 화백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 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돌연 거리를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걸음을 막아 세운다. “나 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오.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오.”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고위층의 인물인가 은근히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준다. 그리고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어?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치안대원은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종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 취해 자리에 누워 있던 이인성이 옷도 입기 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뛰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적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작가 최인호가 오래 전에 화가 이인성의 최후를 소설적으로 각색해 쓴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의 한 부분이다. 한국의 고갱이요 세잔으로 불렸던 이인성은 1950년 늦가을 서른아홉 나이로 북아현동 집에서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최후를 마친다. 어떤 기록은 이미 집 근처 술집에서부터 경찰관과 시비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이인성의 최후는 이 땅에서 예술 한다는 것의 자리매김이 어떠했는가를 소스라치게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천하의 이인성이라고 했을 때 치안대원은 당시의 세도가 중 이기붕 일가쯤의 한 사람으로 지레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이씨 천하였으니까. 그래서 어떤 기록에 보면 취한 이인성을 정중히 ‘모셔다 드렸다’고 나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세도가는 커녕 일개 ‘환쟁이’였던 것. 치안대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글쓴이는 묻는다.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우리 곁의 천재를 죽인 것은 너와 나 우리 모두”라고,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다. 총을 쏘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고. 허다한 우리 곁의 천재적 예술가를 멸시하고 심지어 죽음의 길로 까지 내몰고 나서 추모비, 기념비를 세운다 호들갑 떨지 말라고. “너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 한때 대구에서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에게 ‘화가 되겠구나’ 대신 그렇게 말했다 한다. 그는 1912년 대구 남성동에 있는 작은 음식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근대 화가들이 대부분 지주나 자본가 혹은 관료가문 출신의 자제들이었던 데 반해 이인성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가의 길을 갔다. 그가 쓴 어떤 글에 의하면 부친은 그의 뜻에 극구 반대하여 몽둥이를 들고 나올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세계아동작품전에 슬며시 출품하여 특선하였으나 정작 부모님은 화를 내시는지라 서럽기까지 했노라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주변의 몰이해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당시 구로다세이키가 빠리로부터 돌아와 일본 화단에 일으킨 외광파의 영향을 받은 일인 미술교사들에 의해 서양화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한국 고미술 연구가로 이름 높던 시라카미 쥬요시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어 태평양 미술학교에 적을 둔다. 그는 메이지(明治, 1868-1911) 말기로부터 다이쇼(大正, 1912-26) 초기에 걸쳐 이입된 후기 인상주의적 기법을 ‘조선의 향토색’으로 수용하여 토착화시킨다. 이를테면 평범한 주변의 일상적 사물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한국적 색체, 형태와 정서로 덧입혀갔던 것이다. 그에게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가져다 준 <경주의 산곡에서>와 같은 작품은 천년 영화가 몇 개의 기왓장으로 나뒹구는 폐허가 된 고도 경주와 힘없는 어린 소년들을 대비시켜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는데, 헐벗은 아이들과 매미와 산하를 통해 당시의 민족상황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붉은 황토색을 통해 특유의 조선정서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그는 도시에서 출생하여 도시에서 살다간 도시인이었지만 대부분의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토착에 탐익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세련된 근대적 감각을 불어 넣었다. 버터 냄새나는 서양 기름 물감을 토장국 맛 나는 카슬카슬한 조선 황토의 토착미감으로 바꾸어버린 이인성. 아니다. 인위적으로 바꾸었다기보다는 체질로 풀어내고 토해냈다는 편이 낫다. 조선의 붉은 토지와 맨드라미, 조선 여인의 흰 저고리와 검은 무명치마 같은 색채의 대비로써 그는 암묵적으로 민족적 미의식을 드러낸다. 투쟁적 모습을 보이거나 목청 높여 드러내놓고 민족주의를 부르짖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의 그림은 향토 정서 이상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가 그린 <아리랑 고개>와 그 그림에 관한 고백은 그의 이런 생각의 뼈대를 가늠하게 한다. “보리타작 시즌은 과연 아름다운 볼거리다. 모두 ‘예술적 콤포지션’의 하나이다. 다른 나라에 없는 조선의 보리타작이라서일까? 몸을 가볍게 들어서 ‘도리깨’를 번쩍 들어올리는 그 순간의 이즘(ism)은 얼마나 대륙적인가? 여기저기서 흘러오는 아리랑의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며 또 걷기 시작한다. 황혼의 들길은 끊없이 아름답고 ‘감정적’이다.” - 1935.6.19. 유족 소장의 신문자료- 그는 거의 독학으로 수채화와 유화를 공부해 열여덟 나이에 선전(鮮展)에 입선한 이래 연달아 입. 특선을 거듭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약관 26세 나이로 추천작가가 되었던 식민지 화단의 별이었다. 경쾌한 붓터치와 동양화의 파묵법(破墨法, 거친 먹그림 기법의 하나)을 연상시키는 필세에 토속적 정감 넘치는 소재의 화면들. 그 위에 강한 명암 대비에 의한 미묘한 긴장과 울림, 넘치는 문학성 등으로 ‘이인성류’는 선전(鮮展)뿐 아니라 해방 후의 국전 작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선전(鮮展) 참여 이력이 때로 그를 평가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그가 한국적 미의식을 명료히 드러낸 작가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인성의 아들 채원씨는 그 부분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아버님이 줄곧 선전(鮮展)에 참여하셔서 각광을 받았대서 그 부분을 약점으로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신 분으로서 그런 제도적 관문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화가로 입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처럼 화랑이 많아 개인전을 통해 자신을 알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니까요. 비록 선전(鮮展)에 참여는 했지만 아버님은 끊임없이 우리 그림을 그리려 애쓰신 분입니다. 아버님의 그림은 숫제 동양화입니다. 저희는 아버님께서 고이 간직해 오신 미발표 작품 백여 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는 종이에 그린 수묵화가 많습니다. 제 짧은 눈에도 아버님의 수묵화는 아버님의 개성과 기질을 유화 쪽에서 보다 휠씬 잘 발휘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대서 서양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수채와 유채를 주로 쓰긴 했지만 아버님의 그림은 한국화였습니다.” 그는 도시인이었으면서도 우리 산, 우리 물의 아름다움은 물론 심지어 공기의 흐름까지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때로는 일상의 풍경에서 암울하고 애잔한 식민지적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세잔의 <생 빅트와르 산>은 알아도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는 무지하다. 고갱의 <타히티 여인>의 그 원시적 생명력은 예찬하지만 <어느 가을날>의 황막한 들판에 반나(半裸)로 선 조선여인에는 무심하다. 모네의 <수련>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이인성의 <해당화>는 낯설다. 우리는 거의 늘 그랬다.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눈으로 허다한 일본인 화가들이 식민지 청년 이인성의 재능을 시샘했지만 나라 안에서 그 이인성은 정작 보잘 것 없는 ‘대구의 식당집 아들’이었을 뿐이다. 1936년 24세에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던 김옥순과 결혼한 그는 귀국 후 장인되는 김재명의 남산병원 3층에 현대식 화실을 꾸며 안정된 가운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40년 상처하고 실의에 잠기면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1947년 김창경과 재혼하면서 이듬해 서울 동화화랑에서 재기전을 갖게 되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그는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1950년 장남 채원군이 탄생하고 제2의 전성기가 열리는가 했지만 그 해 11월 4일 그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서양화로 조선의 ‘향토색’을 담으려 노력했던 이인성의 흔적은 대구에서 찾을 길이 없다. 이인성의 활동 반경을 짚어주는 것으로는 봉산 문화거리 입구에 사각의 표석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옛 정취와 연경되는 것은 그나마 약전 골목, 그리고 메마른 도시의 향기같은 한약 냄새가 끝나는 지점의 계산동 성당. 하늘에 닿을 듯한 뾰족 십자가에 남북으로 길게 익랑(翼廊)을 단 이 고딕식 성당을 이인성은 몇 차례나 화폭에 담았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이인성의 그림 속의 그 붉은 빛 구도 안에 서 있건만 천지간에 화가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김병종의 화첩기행 B.G.M A Orilla Del Rio ; Duo Orientango | |||||
[영남일보 대구 추억기행 .44] 대중문화의 뒤안길<17> - 달구벌만평 김경호氏, 홍문종氏 :: 2006/04/0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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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의 기질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건 중구 계산동 요정 일심관 해프닝 사건. 하루는 김경호가 일심관에서 술을 마시게 됐다. 유별나게 괄괄하고 큰 김경호의 목소리가 건너방에 앉아 있던 대구MC 모 사장 귀 속으로 들어갔다. 모 사장은 유명인사인 부하직원 김경호를 자기 술자리로 불러 동석한 구자춘 도지사, P 경북도경찰국장, M 공화당 연락실장, O 대 구상공회의소 회장 등 지역 기관장에게 소개를 했다. 모 사장은 김경호를 앞세워 자기 체면을 한껏 높여볼 심산이었는데 계산착오였다.p 김경호는 천연덕스럽게 마이크를 잡고 “이 술자리의 술과 음식은 백성 의 피와 살이요,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성 또한 높아간다”는 요지 의 암행어사 이몽룡이 변사또 앞에서 읊었던 시조 한수를 갖고 즉석 ‘패 러디 달구벌 만평’을 진행해 참석자를 경악케했다.p ‘달구벌 만평’때문에 된서리를 맞은 고위 공직자들도 적잖았다. 경주지역의 모 총무과장이 시간만 나면 기원에서 산다는 첩보가 입수됐 다. 특히 연말연시 업무 결산에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기원행을 한다는 얘기에 김경호는 어금니를 악 물었다.p “연말연시 공무원 여러분, 업무결산에 얼마나 노고가 많습니까요. 그런 데 OOO 경주시 총무과장님, 기원에서 번거롭게 결재를 받느니 이 참에 경 주시청을 기원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요?” 양택식 경북도지사 시절 영양군의 모 공보실장이 노름을 즐겼다. 그 소 식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p “양택식 도지사는 ‘약진 경북’ ‘들에서 만나자’고 외치는데 영양군 공보실장을 만나려면 노름판으로 가야되겠네요.” 구자춘 도지사의 친구였던 고령군 모 양정계장도 표적이 됐다. 그 계장 은 자기 친구인 구 도지사 이름을 팔며 거들먹거리다가 ‘달구벌 만평’에 덜미가 잡혔다.p “고령군 양정계장, 친구가 높이되어 얼마나 좋겠습니까요? 낙동강 잉어 가 뛰니깐, 사랑방 목침도 팔딱팔딱 뛰는구만요.” 보도 수위가 위험수위에 도달하자 몇몇 기관장들은 ‘달구벌 만평 죽이 기 물밑작전’을 시도해보았지만 허사였다.p 1969년말쯤 박정희 대통령이 순시차 대구에 들렀다가 수성관광호텔 202호 에 투숙하고 있을 때 우연히 ‘달구벌 만평’을 듣게 된다. 지방에서 문제 기관장들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것을 보자 속으론 허뭇하게 생각한 박 대 통령은 상경하면서 비서진들한테 달구벌 만평을 호평했고, 이 때문인지는 몰 라도 10월유신 전후 비판적이며 반체제적 프로그램을 숙청시킬 때 ‘달구벌 만평’만은 철퇴를 맞지 않았다.p ‘달구벌 만평’이 ‘지역 공직자 킬러’로 등장하자 경북도지사, 대구시 장 등 지역의 주요 기관장들은 달구벌 만평 시간만 되면 혹시 자기 이름 이 거론되지 않는지 노심초사하며 귀를 쫑긋 세우는 진풍경까지 연출했다. 특히 구자춘 도지사는 달구벌 만평 시간과 아침 화장실가는 시간이 겹 치자, 아예 화장실에서 들을 수 있는 휴대용 트렌지스터를 급히 구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청와대까지 전담 모니터 요원을 두고 ‘달구벌 만평’을 스 크린했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그늘도 짙다고 했다. ‘가짜 김경호 사건’이 김경호를 괴 롭힌다. 참고로 김경호는 사석에서는 절대로 자기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 이름도 ‘정칠삼’으로 소개했다.p 구미 금오산 나이트클럽에서 한 취객이 술을 70만원어치 마시고 김경호 란 이름으로 외상사인을 했다. 총지배인은 좀 이상했지만 “김경호가 먹은 술인데…”라며 그냥 넘어갔다. 며칠 후 다시 외상을 하려고 하자 구미경찰 서에 신고한 결과 문경의 한 농기구 판매상 아들 소행임이 드러났다. 그뿐 만 아니라, 한 성폭행범이 김경호 이름을 팔고 MC드라마에 출연시켜 준다 면서 10∼20대 여성들만 집중적으로 연쇄 성폭행을 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 생해 김경호는 3년간 악몽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p 83년 김경호는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대구MC를 떠나 사업가로 변신하고(현재 달서구 성당동에서 사업체를 꾸려가고 있다) 뒤를 이어 20여년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은 후발주자로 홍문종(56)이 등 장한다. 그는 김경호 캐릭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청나게 고민을 많이 했다 . 홍문종은 99년 ‘달구벌 만평’으로 한국방송대상 성우상을 받았지만, 실 은 그는 성우 출신이 아니고 연극배우 출신이다.p 홍문종은 82년 6월부터 한국연극협회 대구지부장 재직중에 59년 경북학생 연극회 연극인으로 출발해 원술랑 등 20여편의 연극에 출연한 김경호와 이 런저런 인연이 있었다. 70년대에는 대구 MC TV ‘범어동 할아버지’ 코너 에서도 함께 일했다. 김경호가 라이온스 309 D지구 보도위원장으로 일본 출 장 때 홍문종이 대타로 진행을 맡은 인연으로 고정 진행자로 발탁된다. 김 경호가 사라지자 그 맛을 이을 대타 진행자 물색이 어려웠다. 홍문종 전에 안민재, 현재 MC FM 골든디스크 진행자 DJ 이대희씨, 김준연씨 등이 진 행을 맡았지만 모두 적격자가 아니었다.p 홍문종은 절호의 찬스를 그냥 놓칠 수가 없어 김경호의 어투와 자신의 어투를 비교했다. 김경호가 늘 맨트 끝을 ‘∼까요’로 몰고간다는 걸 알 고 자신은 ‘∼데요’ 그리고 후렴부 직전 당사자를 비웃는 듯한 냉소적 의미로 헤헤, 허허투를 섞으면서 극적 요소를 가미했다. 홍문종이 지금 스 타일을 잡는데 약 6개월이 걸렸다. 처음 몇달간은 홍문종으로 진행자가 바 뀐 줄도 모르는 청취자도 있었다. 그는 다시 고심했다. 그래서 해당 기관 장과 가능한한 목소리를 동일하도록 가는 게 김경호 그늘에서 빨리 벗어난 다는 걸 알고 주요 기관장 목소리를 녹음, 밤새도록 연습해 점점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p하지만 기자들이 물어 온 원고 확인작업을 하지 않아 남자 를 여자인 줄 착각해 여성성대묘사를 해 망신을 당한 기억도 있다. 녹음방 송이다 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전날 오후 7∼8시 신사옥 4층 라디오부 조 종실에서 녹음을 해야 한다. 시사만평은 시의성이 생명. 당연히 밤에 녹음 을 해두었더라도 심야에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녹음하러 와야 한다. 전번 삼덕동 권총강도가 심야에 검거돼 재녹음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집에 와도 휴대폰을 꺼놓지 못한다. 70년 이필동 연출의 ‘수전노’를 KG홀에서 공연 한 것을 비롯해 그동안 250여편의 연극에 출연한 지역 연극계 고참격. 당 연히 그는 연극인인데, 달구벌은 홍문종이란 인식이 강하게 심어져 그 이미 지를 벗어던지는 게 그의 남은 생의 화두인지도 모른다. 김경호-홍문종, 두 사람이 일궈온 달구벌 만평 37년. 3일 한국방송부문 지역라디오 제작부문 대상을 수상했다.p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
[영남일보 대구 추억기행 .38] 대중문화의 뒤안길(11) - 김상규氏 :: 2006/04/0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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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는 KS대구방송국 1세대 전속가수로 1983년 가수로선 드물게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KS KG홀 사옥 시절 가수 분과 위원장, 70∼72년 한국연예협회 경북도지부 9·10대 지부장, 복현 세계 노인대학장, 월간지 ‘대한화보’ 대구지사장을 역임하는 등 다채로운 인생여 정을 걸어왔다. 그는 오리엔트레코드사가 50년대 중반 중구 대신동 서문시장 네거리에 있던 시민극장에서 주최한 가수 선발 콩쿠르와 인연이 돼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육군 군복 차림으로 출전한 그는 실력파들 때문에 3등 밖으로 밀려났다. 당시 1등은 경산 출신의 김석희. 그는 동향 출신의 방운아(본명 방태원·현재 경기도 안양에 거주)가 ‘마음의 자유천지’ ‘한많은 청춘’ 및 영화 주제가 ‘두 남매’ 등을 불러 50년대 인가 가수 반열에 든 것과 달리 상경해 이렇다 할만한 히트곡을 내지 못하고 세인들의 기억속에 서 잊혀버렸다. 콩쿠르 직후 김상규는 불편한 심기를 안고 심사위원장이던 이병주를 찾 아가 심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그게 인연이 돼 이병주가 63년 2대 대 구연예협회 지부장이 됐을 때 사무국장으로 발탁된다. 당시 대구연예협회 사 무실은 KG홀 1층에 있었다. 자연 방송국 가요담당 PD들과 긴밀한 업무협조 를 하게 됐고 그 인연으로 김상규는 이 지부장과 함께 62년부터 전속가수 제도가 실시되기 전까지 무대에 설 가수 추천권을 위임받게 된다. 당시 지 역민들한테 가장 인기가 좋았던 주간 라디오 프로그램은 ‘KS 노래의 향연 (녹화는 일요일, 방송은 화요일 낮 12시30분부터 30분간)’이었다.P 정오 뉴 스가 끝나자마자 ‘K--S, 노래의 향연∼’을 외치는 유필기 아나운서의 오프닝 멘터가 도민들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당시 도민들중 형편이 괜찮은 사 람들은 제니스(ZENITH) 라디오, 중산층은 58년 금성사보다 먼저 나온 국내 최초 천우사 라디오로 이 프로그램을 들었다.P 그는 경쾌하고 빠른 리듬이 인상적인 스윙스타일의 ‘국산연초 아리랑’ 과 ‘연탄공장 노총각’을 즐겨불렀다. ‘국산연초 아리랑’은 양담배 추방을 주제로 한 노래였다. 아리랑 담배를 피워물면 사랑이 피고, 아리랑 담배 를 피워물면 행복이 온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연탄공장 노총각’은 비록 연탄공장 일꾼으로 겉은 검지만 맘만은 하얗다는 신파조 내용이었다. 노래 속 연탄공장은 당시 대성연탄(현재 주 대성가스로 발전)이었다.P 당시 전속가수들의 선민의식은 대단했다. 팬들의 불시 악수 요청에 대비 해 늘 흰색 장갑을 끼고 다녔다. 그도 가끔 흰색 장갑을 끼고 다녔지만 나중에는 장갑끼고 악수하는 게 팬을 위한 게 아니란 생각에 맨손을 고집 한다.P 언변이 탁월한 그는 지역의 회갑·희수연 명사회자였다. 그는 체면을 생 각하지 않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잔치 당시 D극장 사장 장모 회갑연 때 생긴 해프닝이다. 그 장모는 사위가 20만원을 요구하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부르려고 하자 난색을 표명하고 김상규만 고집했다. 동구 신암동 대구측후소 근처 넓은 저택. 민우호·정기원 악단의 오프닝 사운드 끝자락을 물면서 “안녕하십니까, 저는 KS 김상규입니다.” 김상규의 다정다감하고 리듬감 넘치는 인사말에 가족들은 물론 잔치구경 온 이웃사람들까지 일제히 환호성 을 터트렸다. 행사 막판쯤 한 민요가수가 장모의 만수무강을 비는 신나는 민요 메들리를 불렀다. 김상규는 갑자기 장모를 등에 업고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등에 업힌 장모는 너무 기분이 좋아 쌈지에서 축의금으로 들어온 수십만원을 김상규에게 몽땅 줘버렸다. 김상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P 자존심이 무척 강했던 김상규는 73년 3월3일 대구방송국이 한국방송공사 로 통폐합될 때 자기 시절이 끝났다는 판단을 하고 명강사로 변신한다. 미 국으로 유학, 사회학 박사까지 취득할 정도의 학구열도 대단했다. 대학강의, 민방위교육장, 노인대학 등 다양한 공간에서 특강순례를 하는 한편 연예인 자녀 결혼식 주례로도 자주 불려다녔다. 수성못 근처 재즈 라이브 레스토 랑 ‘SKY OX’ 대표 재즈색소포니스트 김일수(그의 아버지는 2군군악대 대 원이었던 올해 일흔셋의 테너 색소포니스트 김인배)가 1994년 대구문화예술회 관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도 그가 주례를 섰다. 제1회 자랑스러운 시민상(사 회복지부문)을 수상한 그는 방송에 대한 미련때문인지 장남 웅진(타계), 둘 째 충진을 전국 유일의 형제 아나운서로 키웠다. 다음회에는 60년대초 팝송 을 주 레퍼토리로 활동했던 클로버3중창단과 가수 김해광 이야기가 이어진다 .P /이춘호기자 leekh@yengnam.com
지난 7월31일자 ‘대구추억기행- KS대구방송국 전속가수 김상규’편에 타 계한 것으로 게재된 장남 웅진씨는 생존해 있기에 바로잡습니다. 웅진씨는 지난 30여년간 지역 방송문화 창달에 큰 기여를 하다가 2000년 안동MC방송 국 아나운서 부장으로 정년퇴직했습니다. | |||||
[영남일보 대구 추억기행 .37] 대중문화 뒤안길<10> - HLKG 방송국 :: 2006/04/0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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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당은 일제때 조양회관과 함께 ‘대구 문화 1번지’로 일제때 대구의 전통문화와 현대 문화가 충돌한 공간이기도 하다. 29년 대구부와 유지들이 내놓은 15만5천원으로 갖고 착공한지 2년만에 위용을 드러낸 공회당은 830 여평의 부지에 지하 1층·지상 5층(19m)의 적벽돌조로 당시 전국적 명물로 자리잡았다. 4∼5층은 한때 호텔로 쓰였고, 광복 직후에는 건국치안유지회 경북지부, 미군환영대회장, 6·25때는 부상병수용소, 군인호텔, 육군중앙극장, 61년말 잠시 경북문화회관이 거쳐갔지만 폭증하는 지역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모두 감당하지 못해 철거되고 75년 10월 5일 현재의 대구시민회관으로 태어나게 된다. 고성동 사옥 시절에도 전속가수를 두었지만 공개홀이 없어 주말에 대구 공회당 강당을 빌려 각종 공연 행사를 선보였다. 당시 KG배지를 달기 위해 선 매년 실시되는 가수시험에 합격을 해야만 했다. 58년부터 대구방송국은 매년 기수별 공채 가수를 뽑았고 그 시험에 합격하면 정식으로 가수로 활 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대접을 받아 흡사 사법시험처럼 숱한 재원들이 응시를 했다. 대구 가수 1호 고화성을 비롯, 현재 KBS안동 방송총국 아나운서 실장인 김충진의 아버지 김상규, 60년대 중엽 ‘사랑의 백서’(김학송 작곡)를 불러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나운, 원남이란 예 명으로 활약했던 전 대구상공회의소 모 회장, 전 동아일보 대구주재 기자 이혜만, 연세대 음대를 졸업한 재원 이은우, 냇 킹콜 노래를 잘 불렀고 매력적 저음을 가진 안대원, 여자가수로는 김차란, 이영숙, 윤금란, 이혜주, 서영순, 이명희, 이혜정 등이 거쳐갔다. 6년전 대구시 남구 대명5동 명덕 시장에서 달구지 막창집을 꾸려가고 있는 김해광(62)은 한국연예협회 대구시 부지방과 가수분과 고문을 역임했고 지금도 지역내 크고작은 노래자랑 심사 위원과 위문공연 무대에 서기도 한다. 당시 KG홀 가수들이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수를 통하지 않고 음악을 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방송이 처음 시작된 것 은 27년 경성방송국이었고, 61년 12월31일 KS TV를 통해 처음 방송을 시 청할 수 있었다. PTV는 말할 것도 없고, 전축과 라디오도 한 마을에 한대 정도밖에 없던 50∼60년대엔 직접 공개홀, 극장의 악극단 가수를 만나지 않고선 유행가 한 자락 들을 수 없었다. 녹향, 하이마트, 시보네 등 음악 감상실이 있었지만 거의 클래식만 틀어주어 일반인들이 가기 부담스러운 곳 이었다. 50년대, 지역에는 팝송 앨범을 구할 수 없었다. 마니아들은 83년 대구MC FM이 개국이 하기 전까지 AFKN방송, 나이트클럽, 카바레, 비어홀, 살롱, 바의 캄보밴드 연주에 만족해야만 했다.P KS전속 가수들은 월급이 없는 명예직이었다. 1주일에 몇차례 고정프로에 출연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밤무대를 통해 푼돈을 벌었다.P 당시 KG홀 2층은 공개홀(588석)이었다. 도민들한테 가장 인기가 좋았던 프로그램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께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노래의 향연’이 었다. 당시 전속 악단장은 예천 출신의 김상열이었다. 악단은 7인조였고 전 기기타가 없어 드럼, 콘트라베이스, 아코디언, 색소폰, 트럼펫이 하모니를 이뤘다. 가수들은 양복에 넥타이, 여가수들은 민요파트는 한복, 가요파트에서 는 원피스를 정숙하게 입어야만 했다. 가수들에게 여러가지 행동의 제약이 많았다. 첫째 객석을 너무 자극해서는 안되고 율동도 점잖아야만 했다. 담 당 PD들은 가급적 한쪽 팔만 조금 흔들어라고 주문했다. 그렇지 않으면 경 고조치를 당했다. 물론 백 댄서도 없었다. 자연 객석은 핫(Hot), 무대는 쿨(Cool)했다. 프로그램당 전속가수 6∼7명이 나와 1∼2곡을 부르고 들어가고 2부에선 도민노래자랑대회가 열렸다. P 가끔씩 중앙에서 쇼단이 내려오면 전속가수들도 그곳에 가서 푼돈을 벌 수 있었다. KG홀 전속 가수들이 한번 출연하면 30원정도 받았고 만원사례 일 경우 극단주로부터 50원을 받았다. 이들은 팔공산 공군부대, 삼덕동 대구교도소, 포항송도해수욕장 등지로 순회공연를 자주 나갔다. 선거철이 되 면 이승만 정권의 지시에 의해 여당 유세반으로 전락되기도 했다. 다음회에 는 현재 대구에 살고 있는 KG홀 전속가수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본 다.P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
[영남일보 대구 추억기행 .34] 대중문화 뒤안길 <7> - 가수 배호 :: 2006/04/0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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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한국 가요계의 별이었던 배호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71년 11월8일 오후 2시. 전국에 걸쳐 방송됐던 KS 라디오 방송프로그램 ‘오후의 로터리’ 진행자의 상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부터 약 1주일간 극성팬들은 망연자실의 시간을 보냈다. 일부 극성 여성팬들은 소복을 입고 서울 미아10동 빈소로 몰려들었다.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뒤편에서 거행된 노제(路祭)에는 워낙 많은 애도 인파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 에 영구차가 식장에 들어오지 못한 채 연예인 합동장이 진행됐다. 그의 시 신은 11월12일 경기도 송추 신세계공원에 안장됐다.P 중국 산둥성 제남시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난 배호(본명 배신웅). 1963년 가수로 데뷔해 5년여동안 300여곡을 발표, 한국 가수 중 가장 짧은 시간 , 가장 많은 히트곡과 2001년 11월 서울 용산구 삼각지 근처에 배호로(路) 까지 남긴 그였다.P 배호는 대구와 이런저런 인연이 많다.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그 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성주군 성주면 대흥리에서 태어난 작곡가 배상태. 그는 배호에게 ‘삼각지 로타리’와 ‘안개낀 장춘단 공원’ ‘능금빛 사랑 ’등 숱한 히트곡을 안겨주었다. 배호가 불렀던 노래의 반은 배상태 작품이 었다. 배호에게 돈과 명예를 가져다준 ‘돌아가는 삼각지’(1965년 6월 발표 ). 그 곡을 만든 배상태는 배호의 삼종숙(三從叔)이었다. 배상태는 대구시 중구 칠성동 성광중학교를 졸업(1회)했고, 한때 대구방송국 전속가수로 활동 하다가 해병대 군악대에 입대, 클라리넷을 불렀다. 제대후에는 서라벌예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60년대초 서울의 오아시스 레코드사 전속 작곡가가 되기 전 그는 대구시 중구 남산파출소 옆에서 배상태 작곡사무실(당시 대구에는 이병주, 추월성 작곡사무실 등이 있었다)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출세를 위 해 상경했다.P ‘돌아가는 삼각지’는 배상태가 군대 시절 군용열차를 기다리며 만든 작품이다. 오후 7시 용산발 부산행 군용열차. 그는 당시 휴가 나오면 칠성 동 형님(배상진) 집에 주로 머물렀다. 열차 출발시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용산 미군부대 바로 옆 삼각지 로타리 근처 빗소리 들리는 선술집에서 그 노래의 악상을 간추렸다. 배상태는 원래 ‘님과 함께’를 불렀던 남진에 게 그 곡을 주려고 했는데 외면당했다. 결국 일반 트롯 가수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저음과 고음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애절하고 독특한 보이스컬러를 가진 배호한테 그 곡이 돌아간다. 1965년, 지병인 신장염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 청량리 시립병원 뒤켠 집에서 요양중인 배호에게 악보를 보여주었다. 아직 별다른 히트곡을 갖지 못한 배호도 그 곡에 반해 다음날 부리나케 앨범을 취입한다. 하지만 ‘돌아가는 삼각지’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일부 가요 평론가들은 배호 음성을 ‘깡패 목소리’로 비 유하면서 평가절하했다. 당시 종로 2가 궁전 카바레 싱어 겸 드럼 마스터 였던 배호의 노래 실력은 1968년과 69년 영남일보 주최 ‘제2·3회 서라벌 가요대상’ 최우수 남자가수상을 수상하면서 입증됐다. 이때 패티김과 이미자 도 함께 최우수 여자가수상을 받았다.P 두 사람은 대구 연고성을 앞세운 채 대구방송국에 ‘돌아가는 삼각지’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서울과 달리 영남권은 배호의 목소리가 금방 먹혀들 었다. 얼마 안돼 대구와 부산지역 방송가 가요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서울 로 인기몰이를 했고 20여주동안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P 스타덤에 오른 배호. 그러나 얼굴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배호는 그걸 내색하지 않기 위해 늘 멋을 부렸다. 승용차도 흰색을 좋아했 고, 중절모자도 즐겨 쓰고 다녔다. 눈이 나쁘지 않으면서도 선글라스를 즐 겼다. 그는 너무 맵고 짠 것을 먹지 못해 늘 운전기사가 간맞는 설렁탕 등을 갖다주었다.P 배호는 전국 순회공연을 자주 다녔지만 1970년 오픈한 동촌카바레 무대를 선호했다. 배호의 공연은 보통 밤 8시30분·10시30분, 두 타임. 당시 갤런티는 배호가 이미자보다 많았다. 요즘 1억원이 넘는 공연 겔런티를 받 고 있는 나훈아(69년 데뷔)도 당시에는 출연료가 변변치 않아 동촌카바레 악단장 조정영한테 차비를 빌려 갔을 정도였다.P 공연 직후 대구의 유명인사들이 은근하게 그에게 동석을 요청했지만 내 성적이고, 지병까지 있었던 그는 막바로 휴식을 취하려 숙소(당시 서라벌레 코드 대구지점장 김광옥씨가 경영한 동인동 청수장여관을 애용했다)로 직행했 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너무 많은 여성과 관계를 하다보니 성병 때문에 타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그로선 일종의 유명세를 치른 셈이다. 그는 지병때문에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물론 독신인 그의 맘을 사로잡은 미모의 여인이 있었다. 대구의 한 고등학교 교장 딸이었던 옥이(배호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였다. 옥이의 상경 구애에 감동한 배호는 60년대 후반 그녀와 약혼을 했다. 대구 공연이 있을 때마다 배호는 옥이와 단둘만의 시간을 보냈지만 배호가 요절하는 바람에 부부의 연은 맺지 못했다.P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
영남대로(嶺南大路) 일천리 (25~29) - 대구 영남일보 1997년 기획기사 :: 2006/03/31 20:44
< 영남대로 일천리 . 25 > 양원~팔조령 | ||
경북 청도군 이서면 양원리 샛별장터에서 팔조령까지의 영남대로는 자로 잰듯한 직선 길이다. 양원리의 양원교를 지나온 영남대로는 이서면 농산물 직판장 앞에서 지방도 911 호선과 만난다. 여기서 팔조령 가는 길은 따로 이 길을 찾지않아도 될 만큼 곧다. 조선시대의 길이 지형지물의 장애가 없 으면 무조건 가장 빠른 직선길을 택했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 마을 주민 김성태씨(79)는 "어릴적 팔조령 가는 길을 묻는 행인들에 게는 손짓도 필요없이 고개로 재(팔조령)만 가리켰다" 고 말했다. 이서면 농산물직판장에서 지방도 991호선과 겹쳐가던 영남대로는 칠곡초등학교에 50여m 못미친 지점에서 신촌리 새월마을 방면 농로를 가로질러 마을 앞 들 로 향한다. 길은 신촌리 393 일대 과수원사이에 나 있는 탱자나무 사잇길을 통과해 이서면 팔조리 아랫마을(下八助)의 포장길과 마주친다. 영남대로는 신촌리 의 논을 지나오면서 옛길의 흔적이 거의 사라지고, 일부분이 농로로 남았 다. 현재 팔조리 아래.윗마을 주민들은 콘크리트로 포장된 신작로를 이용 하고 있으며, 영남대로는 팔조리 아랫마을에 도착해서 부터는 이 길과 겹 쳐간다. 팔조리 아랫마을을 지나면 못마루매운탕 식당 앞에 있는 당산나무와 성 황당에 다다른다. 현재에도 스러질 듯 간신히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성 황당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폐가가 되기 일보 직전인 상태다. 이 동네의 자랑거리인 당산나무는 수령이 3백년이 넘어 지금도 1백여평 정도의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행인들은 한 여름 땡볕과 소낙비를 여기서 피해가고 있다. 당산나무 3그루에서 떨어진 포구 열매를 약재로 쓰기도 하며, 정월 대보름 새벽이면 어김없이 마을의 안녕을 기원 하는 당제가 열린다. 길은 성황당 바로 위 저수지를 끼고 왼쪽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팔 조령 윗마을로 들어가 팔조령 봉화산 밑에 다다른다. 워낙 가파르고 험난해서 꼭대기가 안보일 정도인 팔조령 봉화산은 물금 의 황산도 벼랑길처럼 위험한 곳은 없지만, 옛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벅찬 길이었다. 동래에서 한양까지의 관로중 문경새재 다음으로 높은 고개가 팔조령이다. 올라갈수록 길이 험해 갈지자로 경사도를 줄여놓은 팔조령 길 은 얼마전까지등산로로 이용되었으나, 팔조터널 공사로 길이 끊어진 뒤 잡초가 무성해 현재는 찾기가 힘들 정도다. 청도군지는 "수레도 넘지 못하여 소, 당나귀, 인력으로 짐을 옮기거나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붐볐고, 대구로 가는 가장 직선길이었 기에 화물이 줄을 이었다" 고 적혀있다. 행인들은 양원에서 단숨에 이곳까지 왔지만, 이 고개를 넘기 위해 한숨 을 돌려야 했다. 팔조리 윗마을 옛길 입구 쪽에는 주막터가 남아있다. 마 을쪽의 주막터에는 현재 전원주택이 지어져 있고, 위쪽은 터만 남아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행인들이 힘든 고개를 넘다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지만, 행인규합을 위한 역할때문에 더 중요했다. 청도의 운문적과 함께 팔조령 봉화산은 마적단이 득실거려 8명이 모이지 않고는 고개를 넘지 않았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여기에서 팔조령(八助嶺) 이라는 말이 기원했다고 믿고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팔조령 아래의 주막이 행인규합을 위한 주막이었다면 팔조령 정상에 있 었던 주막은 그야말로 술 한잔 하며 쉬던 곳이었다. 달성군 가창면과 청도 군 이서면의 경계지역인 이곳 일대에는 옛 주막거리로 서너채의 주막이 있 었다. 옛 주막터 위에 현대판 주막을 운영하고 있는 팔조령 산장휴게소 이 흥기씨(83.청도군 이서면 칠성리)는 "이 근처 주막은 일제시대까지 노인 부부가 운영했으나, 장사도중 큰 아들이 부모가 술장사하는 것을 못마땅하 게 여겨 음독자살했고, 둘째 아들은 정신질환으로 죽는 바람에 그만뒀다" 고 말했다. 팔조령에는 얽힌 사연도 많다. 팔조령 동쪽산 8부능선에 술이 나는 샘, 즉 주천당(酒泉堂)이 있는데 행인이든 누구든 단 한잔의 물만 마셔야 물도 안마르고 고개를 넘는데 화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이 잘 지켜지고 있는데 어느날 한 군수가 팔조령을 넘다가 목이 말라 술샘에 갔 다가 한잔만 마시라는 행인들의 말에 상놈은 한잔만 마셔야 하고 양반은 두잔 이상 마셔도 된다며 두잔을 들이켜 술샘이 금방 말라버리고 군수도 고개를 내려가다 급사했다고 전했다. 퇴락한 성황당을 뒤로 한 영남대로는 팔조령을 올라와 산장휴게소 옆길 을 통해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으로 들어간다. 최영철 박천학 기자 |
< 영남대로 일천리 . 26 > 청도~경산~대구 우횟길 | ||
조선시대 대구로 가려던 행인들은 영남대로(관로) 즉 청도에서 팔조령을 넘는 길외에 남성현고개를 넘어 남천~경산~대구로 가는 길을 많이 이용했 다. 이 길이 팔조령 길보다 덜 험한데다 당시 유명했던 경산장을 거쳐 대 구로 가는 행인들이 많았던 것이다. 특히 청도.경산.밀양 등의 13개 역을 관장했던 찰방역이 영남대로상의 팔조령 고갯길에 설치되지 않고 남성현에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 였다. 청도에서 대구로 넘어가는 경우, 남성현 넘는 우회로가 영남대로 못 지않게 서민들과 익숙한 길이었다. 경북 청도군 고수리 납닥바우에서 대구로 가는 영남대로를 제쳐두고 경 산방면으로 달리는 우횟길에는 조선시대 경상도지방의 2개 찰방 가운데 하 나인 성현(현 남성현) 찰방이 있었다. 이 찰방은 청도군과 경산시의 경계 지점에 있는 남성현고개 바로밑 청도군 화양읍 송금리일대에 있었으며, 조 선시대 밀양, 청도, 경산 등지에 있는 13개 역(驛)을 관할했다. 납닥바우에서 남성현으로 가는 우횟길은 현재 경부선 복선철로 우측으로 나란히 나 있다. 이 철로는 일제가 대륙침략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수송하 기 위해 1905년 단선으로 철도를 개설했다가 1937년에 복선으로 재가설했 다. 이 과정에서 우횟길이 좀 더 우측에 생겼다고 한다. 청도읍 고수4리에 사는 추경숙씨(72)는 "당시 히카리, 노조미 등 일본 식 이름이 붙여진 목탄기차가 연기를 내뿜고 우횟길 좌측으로 달렸다" 며 "이 단선철로는 선친들이 직접 가설했다" 며 이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납닥바우에서 남성현으로 가는 길은 창녕으로 가는 국도 20호선을 따라 5백여m정도 가다가 청도군 청도읍 고수4리 청도 LG전자랜드에서 국도와 결 별하고, 경부선철길을 택해 철길옆에 있는 고수4리 청도중앙교회와 철길사 이로 빠진다. 이 일대는 일명 귀환동포촌으로, 해방 당시 일본에서 건너온 청도가 고 향인 사람들이 자리잡은 곳이다. 이 당시부터 유일하게 대를 이어 살고 있 는 추정원씨(55)는 "이 동네는 철길 바로 우측에 있는 우회길 오른쪽가의 연못옆에 있었으며, 길가로 싸리집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고 전했다. 추씨의 말로 미뤄, 조선시대 이 길은 지금은 메워버린 연못옆으로 났던 것으로 추측된다. 길은 귀환동포촌의 끝집인 고수4리 463 조봉환씨 집 앞 에서 청화슈퍼 뒤 골목길로 들어간 뒤 철길 오른쪽 사잇길로 나와 양지농 원으로 들어간다. 이 농원의 끝머리가 청도천으로, 여기서는 강위로 나 있는 산성철교 왼 쪽으로 넘어간다. 철교 왼쪽 논으로 변한 지역에 조선시대에는 산성시장이 들어섰었다. 철교건너 화양읍 송읍리에 사는 김금순씨(80)는 "이 시장은 정기시장이 아니어서 보따리 행상과 황화장수라고 하는 행상, 엿장수, 소금장수, 굴 비장수, 소반장수들이 모여 시장을 형성했다" 고 말했다. 당시 청도천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에 보가 설치돼 있다. 청도천을 건너면 바로 누각이 자리했다. 이자리는 청도군 화양읍 소 라리 주구산 동쪽 끝자락으로, 돌무더기만 대나무숲에 가린 채 듬성듬성보 여 옛 모습을 가늠케 할 뿐이다. 1673년에 제작된 청도군최초의 군지인 오산지(鰲山誌)에는 '청도군을 드 나드는 찰방이 이 누각에서 곰방대에 담배 한대를 끼워물고 쉬어가거나 풍 요롭게 흐르는 청도천을 보며 세월을 낚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남성현으로 가는 길은 누각옆에 나 있는 경부선 철길을 질러 다시 우측 청도천의 지류인 다로천변 길로 접어든다. 현재는 주구산 기슭으로 나 있는 경부선 복선과 다로천 사이에 나란히 있었던 단선사이 우측길이다. 이곳 다로천변 논은 화양읍 송금.진라리 주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평야 지대이다. 이 평야지대 중간쯤인 진라1리에 있는 4백여년이나 된 버드나무 는 농민들과 이 길을 다니는 백성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길은 다시 다로천과 철길사이를 따라 삼신2리에 있는 용암온천으로 향한 뒤 마을 중간에 있는 정자목옆 주차장으로 가는 길로 나와 포도밭과 다로 천변 사이로 다시 들어가면서 경부선 철로와는 잠시 결별한다. 포도밭이 끝나는 지점에서 길은 남성현초등학교 후문으로 가서 삼신1리 경로회관을 지나 나타나는 청구부동산에서 다리를 건너 남성현 LG주유소를 만난다. 여기서부터 1km정도 경산으로 가는 국도 25호선과 일치해 달리다 성현찰 방이 있었던 송금리 송금교회로 들어간다. 이 국도상에는 찰방의 비석이 즐비했으나, 일제가 신작로를 닦으면서 모두 묻어버렸다. 현재는 3개의 비 석만 청도군에서 발굴, 화양읍 도주관에 옮겨뒀다. 송금교회터는 옛날 마구뜰 자리로 앞에는 성현시장이 형성돼 있었으나, 찰방의 몰락과 함께 1900년대초에 모두 사라졌다. 여기서 시멘트포장길을 3백여m 따라 올라가면 송금리 300 강상준씨 집이 나온다. 이 집터가 종6품 인 찰방의 위사(衛舍), 옆에 있는 송금리 381 양미수씨 집터는 통인방(通 引房) 자리였다고 마을 주민 정치훈씨(71)가 전했다. 이 집터 바로 위에는 일제가 단선으로 가설한 경부선의 터널이 뚫렸으나, 현재는 막혀있다. 일제가 복선공사를 하면서 다시 이 집터 아래로 터널을 뚫었기 때문이다. 이 터널로 인해 풍부했던 지하수가 고갈돼 겪기 시작한 주민들의 식수난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래 성현이었던 마을 지명도 일제가 복선터널공 사를 하면서 남성현(南省峴)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남쪽에 있는 일본 을 숭배하라는 뜻에서 남녘남자(南)를 갖다 붙인 것이다. 단선터널옆으로 시멘트포장된 길이 우회길로 바로위 보물 제836호인 대 적사 옆에서는 산을 치달아 올라 남성현휴게소 좌측 옴폭한 남성현고개(해 발 3백30m)를 넘어 경산으로 간다. 남성현고개를 넘은 길은 경산시 남천면 화도들판을 지나 경산시내를 거쳐 대구시 수성구 시지동 조선시대 시지역 을 지나 대구로 들어간다. * 취재기 취재팀은 경산으로 가는 우횟길인 청도군 화양읍 진라1리의 논 중앙에 있는 4백년된 느티나무에 얽힌 풍습을 녹취할 수 있었다. 여느 느티나무와 같이 여름철 휴식처로 이용되는 이 나무는 주민들에게 예사롭지 않은 믿 음을 안겨줬다. 높이 10여m, 둘레 6m나 되는 이 나무는 주민들에게 농사작황과 농사철을 알려주는 달력과도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 느티나무가 봄을 맞아 잎이 일제히 나면 그 해의 모내기를 물걱정없이 다 같이 할 수 있고, 듬성듬성 천천히 나면 모내기때 한발이 들거나 모내기를 적기에 할 수 없다고 믿었다. 주민들은 그래서 봄이 되면 나무의 잎이 나는 상태를 보고 한해 모내기를 점치고 있다. 또 나뭇잎이 예년에 비해 많이 나면 풍년이 들고 적게 나면 흉년이 진다고 믿고 있다. 이 나무의 이러한 신비로움은 십중팔구 맞아떨어져 주민들은 이 나무를 동신(洞神)으로 모시고 정월 보름에 한해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주민 임덕수씨(72) 는 "근래에 와서는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사라졌지만, 이 나무를 통해 한해 농사를 점치는 것은 아직까지 그대로 남 아 있다" 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 영남대로 일천리 . 27 > 팔조령~우록 | ||
경북 청도군 이서면을 지난 영남대로는 팔조령을 넘어 대구광역시 달성 군 경계로 들어선다. 대구(大邱)는 조선 정조 이전 문헌에는 '大丘' 로 쓰 였다. 영조실록에는 이와 관련한 사실기록이 있다. 대구부의 이양채(李亮 采)라는 유생이 구(丘)자는 공부자(孔夫子)의 이름자이므로 고을이름에 붙 여 부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상소문을 쓴 내용이다. 당시 영조는 "아! 근래에 유생들이 신기한 것을 일삼음이 한결같이 어 찌 이와 같은가? 3백여년 동안 본부(대구부)의 많은 선비들이 그만 못해서 말없이 지내왔겠는가?" 하고 질책했다. 어쨌거나 다음 임금부터 구(丘)자 옆에 우부방(○)이 붙었으니 유생들의 고루한 뜻이 관철된 것임에는 틀림 없다. 달성(達城) 은 신라 때 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 불리다가 대구현으로 고 쳐진 뒤 고려 초에 지금의 수성구 일대에 자리했던 수창군(壽昌郡)에 속했 다. 조선 숙종 이후 대구부는 오늘날 달성군을 포함한 대구광역시 전역 중 북구 칠곡지구, 동구 안심동, 수성구 고산동을 제외한 지역으로 권역이 넓어졌고 청도의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 등 3개면까지 포함했다. 이러한 대구부역은 1906년 지방구역 정리에 의해 청도군 4개면이 청도로 빠져나갈때까지 계속되다가 1913년 달성군이 독립하면서 급격히 축소된다. 그러나 달성군은 대구시역 확장으로 조금씩 편입되다가 급기야 1995년 행 정구역 개편때 대구광역시의 유일한 농촌군으로 완전히 포함됐다. 팔조령을 넘어서면 같은 경북권이면서도 청도와 언어, 습속, 문화가 다 소 다르다. 청도문화는 차라리 밀양에 접근해 있다. 이에 대해 고지도연구 가 이우형씨(63)는 "행정편의에 따라 마구잡이로 경계선을 그어놓은 지금 의 지도는 산줄기 중심의 우리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며, "백두산과 지 리산을 등뼈삼아 사이사이의 산맥 공간을 한 문화권으로 파악하는 것이 맞 다" 고 지적한다. 팔조령과 팔공산 사이를 금호강문화권으로 본다면 그 남쪽은 밀양권, 북 쪽은 안동권으로 나눌 수 있고 방언이나 농요, 기후 등에서 이 주장의 근 거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은 경상도라도 산맥으로 나뉘는 경남 구포와 기장, 울산 말씨가 다르고, 강원도 속초까지 경상도 방언이 퍼져 있는 것은 어쩌 면 당연한 일이다. " '너거집에 모심고 이틀 있다가 우리 집에 와라. 우리도 모심어야지'라 는 조상들의 말은 산맥중심으로 파악한 국지 기상권을 나타내는 말이다." 산맥을 넘으면 언어, 습속 뿐만이 아니라 기후도 달라진다는 것이 이우형 씨의 당연한 주장이다. 팔조령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과 경북 청도군 이서면의 경계를 이룬 삼성 산~봉화산~상원산을 잇는 해발 3백60m의 고도에 위치해 있다. 고려대 최영 준 교수의 말을 빌리면, 팔조령 고갯길은 대부분 길이 진흙길이었던 것과 는 달리 넙적한 돌들로 깔아 틈새를 흙으로 메운, 당시로는 보기드문 박석 (薄石) 포장길이었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팔조령 산장휴게소 서쪽 뒷산 1백m정도 지점에는 봉수대 흔적이 희미한 석축과 함께 남아있다. 팔조령봉수대는 한반도의 각 방면에서 한양에 이르 는 5개 간선봉로 중 부산 다대포에서 출발한 제2직봉선상의 봉수로, 밀양 추화산성~청도 남산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대구부 남쪽 수성현의 법이산 봉수대로 넘겨주는 봉수대이다. 봉수는 횃불과연기신호가 여의치 않을 경우, 봉졸이 육로로 달려 신호 를 전달해야 해 대부분 대로변에서 멀지않은 산정에 위치한 점을 살펴볼수 있다. 팔조령 고개정상에는 현재 지방도 911호가 통과한다. 동래를 출발한 길 손이 이곳에 당도하는데는 대략 6일 정도가 걸린다. 대구읍성을 벗어나면 한양까지 8일 정도를 남겨놓은 셈이다. 팔조령에서 수성구에 이르는 영남대로는 대체로 911호 지방도를 벗어나 지 않지만 팔조령에서 산을 내려서는 약 1.5km는 구간이 크게 다르다. 911호지방도가 산허리를 구불구불하게 돌아내린 반면, 영남대로는 곧장 계 곡을 타고 내려 현재의 석주사 뒤편 산등성이를 타고 현재 팔조령터널공사 가 진행중인 산중턱에서 2백m가량 아래쪽에 위치한 대원개발주 채석장입 구로 빠져나간다. 열악했던 조선의 도로사정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구간으로, 사람들이 많 이 다닌 길이 아니었다면 1년만 묵혀도 길의 흔적이 없어질 판이다. 인근 마을에 사는 이태재씨(38)는 "이 길은 지금도 묘소벌초 등의 목적으로 청 도 이서로 넘어가는 길로 쓰이고 있다" 고 말했다. 두어 곳의 음식점과 5~6채의 가옥이 남아있는 산기슭 도로 좌우에는 짐 터라는 지명이 남아있어, 산길을 오르내리는 길손이 짐을 내려놓고 쉬어 간 자리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팔조령터널이 뚫리면 911호 지 방도를 중심한 팔조령 고갯길은 완전히 전설에 묻힐지 모른다. 짐터에는 신천의 한 발원지인 팔조령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이 장마철 에는 제법 물길을 이루고, 지금은 6m가량의 짧은 다리가 옛길과 911호지방 도를 연결해 준다. 대구읍성 방면으로 1.2km 정도 더 가면 녹문으로 불리 는 '주막껄' 이 있다. 녹문은 왼쪽 산계곡의 우록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으로, 팔조령을 지나온 길손이 이곳에서 허리춤을 풀고 막걸리 잔술 이나 걸치기 좋은 지점이다. 한때는 이곳에 기생들의 치맛바람도 제법 불 었다는 마을 주민들의 말이 전해진다. 녹문삼거리에서 우록골까지는 3km 정도. 팔조령에서 여기에 이르는 길가 에는 소위 러브호텔로 불리는 장급여관이 14개, 대형음식점이 40여개나 자 리해 과거의 영화(?) 를 잇고 있다. 산 사이로 난 계곡길이어서 길손은 지금도 이 시설들을 이용할수밖에 없 다.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사슴과 노닐었다는데서 이름 붙여진 우록(友鹿) 주변에는 사슴농장이 4개나 자리해 땅이름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 취재기 권영철(대구효성가톨릭대) .김택규 명예교수(영남대)가 동행한 6월말 어 느 하루. 청도~대구구간 취재 도중 청도군 각남면 전주이씨 재실 뒷산에서 산불이 나자 두 교수는 아는 사람이 그곳에 산다며 핸들을 돌리게 했다. 산불구경까지는 좋았으나 좁은 시골들길로 밀려드는 소방차량들 덕분에 예정에 없던 밀양까지의 비포장 산길을 한시간 가량 걸려 넘어야 했다. 곳 곳에 우거진 밤나무숲을 지날 때, "춘향이도 밤나무 숲아래에서는 속옷을 벗는다" 는 권 교수의 걸찍한 입담에 한바탕 웃고. 일행은 산불 덕분에 청도~밀양구간의 말로만 듣던 옛길을 답사할 수 있 었다. 밀양에 내려섰는데도 청도면이라는 지명이 있고 청도초등학교가 있 어, 주민생활권을 무시한 일제의 자의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실감했다. 특별취재팀 |
< 영남대로 일천리 . 28 > 우륵~냉천 | ||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골 상류 2.2km지점에는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 의 선봉장이었다가 부하들을 이끌고 귀화한 사야가(한국명 金忠善)를 기린 녹동서원이 있다. 골짜기 우측길을 4km정도 오르면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키고 병사 들을 지휘한 남지장사가 있어 당대 두 명장의 관계에 관심이 간다. 두 사 람이 만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모두 자신의 출신과 신분을 벗어났다는 데는 공통점이 있다. 김충선은 임란 뒤 세차례에 걸친 국난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고종 때 병 조판서로 추증됐고, 우록골 뒷산에 묻힌지 4백년이 지난 1992년 성균관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신도비(神道碑)가 섰다. 남지장사 하류 백록동(白鹿洞) 은 사명대사가 이곳에 기거할 무렵 흰사슴이 나타났다는 데서 연유한 이름 이다. 우록골의 물줄기는 녹문 입구 삼산교지점에서 팔조령물줄기와 만나 신천 상류를 형성한다. 녹문삼거리에서 2.3km정도 지난 곳에 위치한 달성군 가 창면 옥분리의 '들마' 마을은 들 한가운데 위치했다는데서 유래한 지명이 다. 다시 6백m를 지난 주리의 구진터는 임란때 남북과 서쪽 방향이 훤히 트인 이곳에 방어진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911호 지방도를 따라 가는 영남대로는 7백m정도 지나 옹기와 기와를 구 웠다는 뜻의 점촌마을 표석을 만나게 된다. 지방도 왼쪽으로 3백50m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한 점촌에는 장인들의 손길이 끊어진 지 오래다. 마을 곳 곳에 흙벽돌집이 남아있고 장마철 황토마당에서 붉은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옹기마을의 흔적이라면 흔적이다. 오동원(梧桐院)은 점촌에서 911호 지방도를 따라 5백여m 지난 곳에 있다. 대구시 서구 원대동에 있었던 원(院)과 더불어 대구부의 관문역할을 했던 이곳은 4일과 9일에 장이 열린 장터이기도 하다. 오동나무숲이 많아 이름 붙여진 그대로 곳곳에 오동나무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측으로 고개하나 넘은 곳에 고려시대 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상 원리와 내상원이 있어 사람과 물품이 어느정도 모였음을 알 수 있다. 상원 리 뒷산 창산은 1910년부터 불리는 이름으로, 그 이전에는 역졸들이 돌보 던 말이 잘 죽었다는 이유로 마산(馬山)으로 불렸다. 오동원에서 상원리로 넘는 치마고개는 임란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이 곳 지형으로 봐 장차 영웅이 태어날 것을 예감, 종이에 산을 그려놓고 혈 맥을 끊었는데, 실제로 여 장군의 치마가 잘린 듯 산이 잘려 고개가 됐다 는 전설이 전한다. 상원리에 있는 폐광산은 대한중석 달성광업소로, 한때 국내 제일의 품질 을 자랑한 중석(텅스텐)이 생산된 곳. 갱구에서 산중턱 아래 선광장(選鑛 場)까지 원석을 나르는 삭도가 설치돼 이 지역의 볼거리가 되기도 했다.달 성광업소는 1934년 고바야시(小林)가 운영한 소림광업주이 처음으로 이 일대 19만4천평을 금은광산으로 출원등록하면서 문을 열었다. 이듬해 중석광을 추가등록했으며 이 회사는 1943년 2차대전이 절정이었 을 무렵, 강원도 영월 상동광업소 직원까지 모두 9백51명이 근무하는 대기 업으로 성장했다. 해방과 함께 미군정 직할기업으로재발족한 회사는 다음 해 조선중석광업회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49년 대한중석광업회사로 개 칭했다. 완제품들은 영남대로를 거쳐 국내외로 팔려 나갔다. 달성광업소는 70년 대들어 제품품질이 낮아지면서 생산을 중단, 지금은 민간에게 소유권이 넘 어가 환경오염방지사업이 진행중이다. 정부재투자기관으로 운영되던 대한 중석은 지난 94년 민영화와 함께 거평그룹에 인수돼 제2의 도약기를 맞고 있다. 상원리 마을에서 삼각형의 한변을 채우며 1.9km 가량 벗어나면 영남대로 인 911호 지방도와 다시 만난다. 이곳에서 한천바위까지는 1.5km. 조선말 이 바위에 돌을 던져올린 뒤 아들을 낳았다는 서찬규라는 선비가 5m 높이 의 바위에 새긴 한천(寒泉)이라는 글씨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 일대 신천물이 아주 찼다는 이야기로, 지금도 냉천 또는 찬샘이라는 표기가 이 일대 지명으로 많이 남아있다. 한천바위 서쪽 '높은 집' 이라 는 음식점에도 부엌에 찬샘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남아 있다. 18세에 시집와 지금까지 이 집에 살고 있는 성영임씨(64)는 "수온이 일 정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샘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며, "한때 이 집에 살던 선비가 겨울에 움막을 짓고 샘의 온기로 겨울을 났다는 얘기 를 들었다" 고 말했다. 이 일대의 수질이 좋은 것은 대구 앞산에서 청도, 경산 일대에 걸쳐 있 는 맥반석지층과 무관하지 않다. 911호 지방도를 2km 되돌린 곳에 위치한 대림생수 등도 이런 이유에서 대구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높은 집에서 5백m 정도 진행한 곳에 성업중인 냉천자연랜드는 냉천과 수 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25년째 영업중이다. 동.식물과 놀이시설을 찾는 이는 연간 50여만명. 향나무와 단풍나무광장이 일품이다. 구관조가 유명 했으나 몇년전에 병들어 죽었다. 겨울에는 최근 개관한 눈썰매장이 냉천의 이름이 그냥 붙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냉천에는 여름철에 옷을 훌렁 벗고 멱을 감아도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바위가 많았으나, 911호 도로가 포장되고 하상이 정비되면서 지금은 찾는 이 없는 한천바위만 덩그러니 남았다. * 취재기 달성군 가창면 냉천1리 111의 9 우이태씨집 남새밭 끝지점에 있는 이랑 의 묘는 집에 화재가 나자 젖먹이동생을 몸으로 덮어 살리고 자신은 세상 을 떠난 12세 이랑(李랑)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순조때 일로 장성한 동생이 누나를 위해 봉분 앞에 비석을 세웠으나, 멸 실되자 마을사람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의자이랑지묘(義姉李랑之墓)라는 비명과 甘羅其齡 代弟而死 섭앵乃志 爲親之祠(꽃다운 어린나이 의로운 누 나구나/동생을 살리고 자기는 죽었구나/젖먹이 껴안고 생명살려 뜻 이루니 /어버이 뒤를 잇는 대를 세웠다)라는 비문은 당시 판관 조종순이 썼다. 지 금은 무심한 후세들이 벌초조차 않아 길가에 접한 어렵다. 봉분에는 아카시아가 뿌리를 내렸고, 비석은 풀숲에 묻혔다. 우씨집에서 빌린 농기구로 비석을 드러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이랑이야 이름 남기려는 뜻이 있었겠냐만. 특별취재팀 |
< 영남대로 일천리 . 29 > 냉천~대구읍성 | ||
냉천을 지난 영남대로는 911호지방도를 따라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대한 중석주 본사를 오른쪽에 두고 가창댐물이 흘러내리는 용계교를 건넌다. 영남대로 왼쪽으로 1km 벗어난 가창댐은 상류 7.1km의 용계천물을 원수로 삼아 1959년에 축조됐다. 이에앞서 1918년에는 당시 3만명이던 대구부민의 식수공급을 목적으로 용계천에 취수탑이 섰다. 가창정수사업소 전원열 소장은 이 취수탑이 현재 댐안에 수장돼 있다고 전했다. 정수된 물은 수도산 대봉배수지에 보내져 부내 5천8백76명의 주민들에게 공급됐다. 대구최초의 수도시설인 셈이다. 가창정수장은 지금은 하루 7만t을 정수해 수성구일대 13만8천명에게 급수 하고 있다. 용계천물은 용계교 아래 1km정도 지점에서 신천과 합쳐져 본격적인 수류 를 형성한다. 용계교를 지난 영남대로가 3백m쯤 진전한 곳에 파동교와나란 히 가창교가 있고, 여기서 911호 지방도는 끝난다. 이곳부터는 대구시 수성구 파동이 시작되며 대구광역시도가 영남대로를 잇는다. 고지도연구가 이우형씨(63)는 이 구간 영남대로에 대해 신천을 건 너지 않고 용계초등학교 앞으로 난 주택가 길을 따라 용두산 동쪽기슭으로 길이 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 1750년쯤에 제작된 해동지도 역시 이 구간 길이 신천을 건너지않고 대구읍성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권영철 교수(69.효성가톨릭대) 등 향토사학자들은 신천유량이 많 았던 시절이라면 절벽이었을 이 구간에 길이 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잘 라 말한다. 해동지도의 경우 신천의 물길이 지금과 달랐던 시대의 지도여 서 조선말의 길과는 다르다는 것. 지금도 용계초등학교앞 주택가를 수해로 부터 보호하기 위한 높이 1.3m 정도의 제방이 1.5km 가량 서 있어 길나기 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파동은 산사이 협곡으로 난 길이 곧다는 의미에서 니리미, 파잠, 파집 등으로 불렸다. 파동길 동쪽산은 법이산으로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법이산 봉수대가 있는 곳이다. 지금도 고압선 철탑이 있는 자리에 봉수대가 남아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수현내(守縣內)에 남창을 표시해 놓고 있으나 위치 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대구읍지 등에 남창이 대구부 남쪽 12로 돼있어 '부남쪽 30리'로 돼있는 오동원과 부남쪽 3리로 돼있는 연구산(건들바위산)의 위치 등으로 계산해 볼 때 수성구 상동과 중동 중간지점쯤일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사창은 세종때 대구지역에서 처음 시험운영돼 전국에 보급된 구황진휼 (救荒賑恤)제도로,가을에 곡식을 사들였다가 봄철 춘궁기에 곡식을 꾸어준 남송(南宋) 의 제도를 본떴다. 관주도의 상평창이나 의창과는 달리 지방향 촌이 공동으로 설치해 자치적으로 운영한 만큼 부호들의 비싼 장리에 시달 린 주민들의 호응이 컸다. 당시 13개의 사창이 대구에 섰으나, 위치는 모두 알 수 없다. 대구에서 사창제도가 처음 시험된데는 예부터 생산기술이 발달해 농산물이 다른 지 역에 비해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창제도는 처음 취지와는 달리 세월이 지나면서 폐단도 적지 않아 상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때 이시수라는 암행어사가 30년된 남창을 예로들 며 "한냥의 이자는 2전이고 감관(監官)과 색리(色吏)에게 바치는 선물을 포함하면 3전7푼 남짓한데, 빚을 놓을 때 선이자를떼고 1년 뒤 곡식을 회 수합니다. 명목상 해마다 빚을 받고는 놓지만 실제는 한번 빚이 영원한 빚 이됩니다...괴로워하는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촌락마다 발생하고 있습 니다" 라고 상소한 내용이 있다. 가창교에서 하류쪽 상동교까지는 3.7km. 1918년에 제작된 지도에 의하면 수성못오거리에서 상동교까지의 길은 지금의 강변도로에서 동쪽으로40~50m 정도 벗어난 들판으로 났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주택들이 들어섰지만 조선 말에 이곳이 허허벌판이었다는 것은 짐작이 가는 일이다. 권영철 교수는 상동교 지점에서 길손이 신천을 건넜을 것으로 본다. 이 는 1778년 신천 이전의 대구천이 지금과 달리 서쪽으로 우회해 흘렀을 때 난 길이 그대로 굳어졌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대구부 판관 이 서(李서) 가 사재를 털어 홍수피해를 줄이기 위해 상동교지점부터 하류까지 제방을 쌓아 지금처럼 물길을 곧게 한 사실은 대구읍지 등에 전한다. 물론 새 물 길도 대구천범람원내에서 난 것이었다. 대구천은 상동교~효성타운 아랫길(현재 앞산 카서비스센터 아래 주택가 길) ~봉덕시장~미군부대(캠프헨리)후문~건들바위네거리~봉산문화거리~대구 학원앞으로 났다. 길은 강 양쪽으로 났을테지만 동쪽이 구릉지대여서 절벽 구간이 많았던 만큼 오른쪽으로 났던듯하다. 미군부대는 구한말 군사훈련장으로 쓰이다가 한일합방 뒤에는 일본군 80 연대가 주둔해, 영욕의 역사를 반증한다. 일본군이 주둔할 때는 근처에 일 본인이 많이 거주했으며, 이들이 조선폭도들의 침입을 우려해 만든 인공도 랑이 지금도 건들바위와 미군부대 중간지점 고갯마루에 북동방향의 복개천 으로 남아있다. 건들바위 뒷산(連龜山)은 순조때부터 정오를 알리는 대포가 설치돼 오포 산으로 불렸다. 4m높이의 건들바위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지만 바위모양 이 갓쓴 노인같다고 해서 삿갓바위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지금은 폭포시 설 등 조경으로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이서가 물길을 돌린뒤의 영남대로는 일제때의 지도 등으로 볼 때 상동교 7백m아래 중동교를 건너 봉덕시장길로 연결됐던 듯하다. 물론, 파동에서 직진한 김에 강을 건너지 않고 중동교를 지나 하류 2.4km지점의 수성교까지 직행해 다리를 건너는 이도 있었지만,둘러가는 길 이어서 이용빈도가 낮았다. 수성교는 그보다는 경산에서 대구로 오는 사람 들이 고산~범어역을 거쳐 주로 이용했다. 수성교는 한국전쟁 직후까지 나무다리로 있었다는 것이 향토사학자들의 얘기지만 다리의 역사를 확인하기가 쉽지않다. 1백26m 길이, 30m 폭의 현 재다리는 1978년에 세워진 것이다. 대구학원 앞길에서 대구읍성 남문까지 는 불과 1km 정도 길이다. * 취재기 조선시대 마지막 지도라는 1872년의 군현도에 대구부지가 남아 있지않아 영남대 도서관측의 협조로 아쉬운대로 해동지도를 구해 옛길을 더듬는데 참조했다. 다행히 대구는 대도시이면서도 한국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않 아 옛날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리나 이번 취재의 핵심이었던 도심대교의 연혁은 어디에서도 알 수 없 어 향토사학이 존재하는가하는 의문조차 들었다. 각종 공공건축물은 물론, 민간건축물까지도 상세히 족보를 보관하고 있는 구미국가들이 부러운 순간 들이었다. 변성석 기자 |
영남대로(嶺南大路) 일천리 (30~33) - 대구 영남일보 1997년 기획기사 :: 2006/03/31 20:35
< 영남대로 일천리 . 30 > 대구읍성 | ||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대구는 감사가 있는 곳이다. 산이 사방을 높게 막 아 복판에 큰 들을 감추었으며, 들 복판에는 금호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하류에 합친다. 고을관아는 강 뒤쪽에 있다. 일도(一道,경상도를 지칭)의 한복판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거리가 매우 고르니, 또한 지형이 훌륭한 도회지이다" 라고 적고 있다. 택리지는 이서가 신천을 축조하기 1백여년전에 쓰여진 만큼 관아앞의 강은 당시 대구천 물길을 말한다. 팔조령과 비슬산계곡들에서 발원된 대구천 물길은 대구시 수성구 상동교 지점에서 곧게 펴져 지금의 신천이 됐으나, 앞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은 일제가 도시계획을 하기 전인 1930년대까 지만해도 여전히 대구학원~반월당~적십자병원~동산동제일교회~중소기업은 행~동산파출소~달성공원정문~서구 원대동~달서천~금호강으로 흘렀다. 대구학원에서 대서로를 따라 동서로 흐르던 하천은 저지대 범람원이었던 계산오거리지점에서 서북방향으로 굽어 대구읍성의 축조에도 영향을 미쳤 다. 이 지점 성곽이 물길따라 굽은 것이다. 대구시가지에 석성이 구축되기 전에는 토성이 있었다. 임진왜란 두해전인 1590년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영천.청도.성주.진주. 동래.안동.상주성과 같이 만들어졌다. 임란 때 파괴된 토성자리에 석성이 구축된 것은 1736년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閔應洙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에 옮겨져 있는 영영축성비(嶺 營築城碑)에 의하면 성체는 석달여만에 완성됐다. 성의 둘레는 총2천1백24보(약 2.7km), 여첩(女堞.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 로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하는 곳) 8백19개, 높이는 17~18척(5~5.5m)으로, 동서남북 4개의 정문을 쌍홍문(雙虹門)으로 건축한 뒤 동남간에 동소문을 서북간에 서소문을, 암문(暗門.야간통행문)으로 두었다. 서민들은 검문이 덜한 암문을 주로 이용했다. 동문은 지금의 동성로 제일은행 대구지점 네거리, 서문은 대구은행 서성 로 지점, 남문은 약전골목 대남한의원 네거리, 북문은 북성로 경북소방설 비 네거리에 정방향으로 세워졌으며, 동소문은 중앙파출소에서 대구백화점 가는 중간지점 네거리에, 서소문은 서성로가 북성로를 만나기 전인 제민 약국 자리쯤에 섰다. 이 문들을 연결한 성곽의 흔적이 지금의 동.서.남.북 성로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관리들이 부임하는 관문이었던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는 편 액 그대로 현재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에 복원돼 있다. 동서문과 남북문 간의 길이는 각각 8백m. 성이 정방형임을 나타낸다. 동원된 인부는 군위.성주.선산.대구부민과 승려등 연인원 7만8천5백84명 이었다. 읍성을 수축한 돌은 붉은색이 도는 이암(尼岩)으로 팔달교건너 지역에서 가져왔다. 이 바람에 성돌은 인부 한 사람이 짊어질 만한 크기로 다소 작았다. 대구읍성은 1870년 대원군 이하응의 군사정책으로 한차례 수리되면서 성 벽위에 네 개의 누각을 세우고 그 사이에 8개의 포루를 설치했다. 읍성에는 관찰사감영이 지금의 중앙공원자리에조성됐으며, 관찰사가 업 무를 보던 선화당(宣化堂)과 징청각(澄淸閣)이 들어섰다. 감영에는 이밖에 유치장건물 등이 있었고, 감영곁에는 객사와 육방관사, 대구부사가 지금 의 대구중부경찰서와 종로초등학교 자리까지 걸쳐있었다. 감영의 정문은 포정문이었으며, 관풍루(觀風樓)라는 누각이 섰다. 백성들의 풍속을 살핀다는 뜻의 이 누각은 현재 달성공원에 옮겨져 있다. 감영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포정문 외에 만경관 남쪽지점에 있던 홍살문을 거쳐야 했다. 윤용진 경북대 명예교수(66)는 "경상감영은 서너차례 화재 피해를 입은 기록이 있으며, 순조 6년(1806년) 12월3일의 화재는 관찰사비 서실에서 발화돼 징청각, 선화당, 연초당, 좌우익관청, 공창, 내아 등 1백 84칸이 전소되는 대화재였다" 며, "일부화재는 부정을 저지른 것이 탄로날 것을 우려한 증거인멸이 목적이었을 것" 으로 추정했다. 현재 남아있는 선화당과 징청각은 그 뒤 복원된 것이다. 읍성내의 길은 종로가 가장 넓었으나, 1907년 관찰사서리였던 박중양이 성곽을 허문 뒤에 는 동서길이 확장되는 등 교통흐름이 달라졌다. 박중양이 조정의 반대를 무시하고 읍성을 헌 배후에는 한국상권을 침탈 하려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일하다 그와 맺은 인연으로 관찰사자리에 오른 인물로, 그가 대구부에서 전남으로 전임할때 일본인들이 시계를 선물하면서 뒤에 십자가를 새긴 것은 지금까 지 향토사기록으로 전한다. 십자가는 읍내 십자로를 상징하는 것이다. 허물어진 성의 돌은 일부 민간건축에도 쓰였다. 최근 계명대 성서 캠퍼 스 본관 주춧돌 공사에 쓰인 돌이 대표적이다. 이돌은 현재 계명대 동산의 료원 홍보과로 쓰이는 북미 선교사 스윗즈의 사택 기초공사에 쓰였던 것이 다. 열강의 각축전이 벌어지던 구한말 대구읍성 지역의 거주 분포에 대해 권 영철 교수는 "중심가인 종로에는 중국인이, 동산동은 개신교인이, 동산아 래는 천주교인이, 동성과 북성 주변은 일본인이, 서성과 남성주변은 한국 인이 세력을 형성했다" 고 설명했다. 대구천과 대구읍성 남쪽 성곽사이에 난 영남대로(염매시장골목)에는 서 울로 가는 길손이 남문과 서문.동소문으로 빠져나왔다. 한양가는 서북방면 길에 여관과 시장 주막이 집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취재기 대구구간 취재는 여러모로 정리되지 않은 향토사학의 허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일제시대 단절된 역사기록은 가치를 몰라 폐기됐거나 정리되 지 않기 일쑤여서, 학자들이 일본에까지 가서 사진자료와 지도 등을 구해 오는 형편이다. 윤용진 경북대 명예교수(66)는 "앞선 세대가 거의 사라져 가는 마당에 우리 세대에서도 이런 역사 정리작업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고 토로했다. 전쟁피해가 없던 지역인 만큼 과거와의 단절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탓일까.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3월 대구지역 중.고등 학교 교사 11명 등이 펴낸 '대구역사기행' 은 귀중한 향토사 탐구자료로 취재에 큰 도움이 됐다. 변성석 기자 |
< 영남대로 일천리 . 31 > 대구읍성~팔달교 | ||
현재 2백만명을 넘는 대구인구는 한일합방 당시3만명이 채 안됐다. 1918 년에 제작된 지도는 읍성에서 1km만 벗어나면 논밭과 과수원 임야로 채워 져 있다. 영남대로가 이 지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경부선 철도가 경산 을 우회하는 바람에 철도부지 편입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남제일관(남문) 남쪽 대구천 건너에는 관덕정(觀德亭)이 있었고 주변 에는 병사들의 훈련장이 있었다. 현재의 적십자병원 자리는 죄인들의 처형 장으로, 1861년 천도교 교주 수운 최재우가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 로 참살당한 곳이다. 기록에는 그의 처형장이 '대구장대(大邱將臺)' 로 돼있어, 감영에 가까운 현재의 대구병무청 뒤편 군 연병장 자리를 그의 처 형장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관덕정 형장에서는 1815년 을해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 해때 24명의 천주교인이 순교해 천주교 대구대교구측이 지난 91년 한국포 교 2백주년을 맞아 관덕정을 복원한 뒤 순교기념관을 열어놓고 있다. 관덕정 남쪽 남산교회 비탈길 지점에는 석빙고가 있었고, 겨울에 금호강 얼음을 가져와 여름에 썼다. 석빙고는 1907년 읍성파괴때 허물어졌으며 비석이 경북대 박물관 앞에 옮겨져 있다. 영남제일관앞 덕산동 일대를 나 타내는 반월당이라는 지명은 일제때 세워진 반월당이라는 백화점 이름에서 유래됐다. 대구읍성길 영남대로를 많이 이용한 사람들은 상인들이었다. 큰 장으로 통했던 서문시장과 약령시는 전국상권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전 국 최대규모의 한약재시장이었던 약령시는 1650년이전 조정의 진상약재를 구입할 목적으로 경상도관찰사가 열었다는 설과, 약재가 귀한 일본의 요구 로 열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인들은 때로 낙동강을 거슬러 달성군 화원의 왜물고(倭物庫)에서 직 접 약재를 구입해가기도 했다. 남문밖 염매시장은 일제시대 일본인이 이용 하는 중앙시장보다 물건값이 싸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명절이나 잔치용 떡, 강정, 돼지머리 주문이 지금도 많다. 경부가도(京釜街道 곧, 영남대로)가 뻗어간 서문시장은 김정호가 대동여 지도를 제작할 당시 읍성서문(조흥은행 서성로지점 자리)에서 3백m정도 떨 어진 지금의 시장북로 본전다방 주위 오토바이골목일대에 있었다. 성주, 고령, 의성, 김천, 안동 등 먼곳에서도 2일과 7일 장날에 장꾼들이 모여들 었다. 중구 동산동 동산파출소~본전다방~달성공원앞 골목에는 말을 매어두고 매매한 말전골목이 있었고 등겨진골목, 떡전골목, 엿장수골목 등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평양 강경시장과 더불어 조선 3대시장이었던 서문시장이 중구 대신동 현재 자리로 옮긴 것은 1922년. 천황당못을 메워 장터로 삼았 다. 옛시장이나 옮긴 큰장이 모두 대구읍성 서문밖이어서 서문시장 이 됐다. 천황당못은 주변구릉에서 흘러내린 물이 저절로 만든 자연호수로, 주변에 는 참나무숲이 무성했다. 동산병원앞길~대신로터리~대신파출소앞~계성중학 교 담을 따라 위치한 건어물상 일대가 못자리였다. 이 못은 성내한량들은 물론 부녀자들의 봄 가을 나들이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은 교통과 상권변화로 옛명성이 퇴색했으나, 조선시대에는 평양.강 경시장과 함께 삼남(경상.전라.충청)상권을 거머쥔 국내 3대시장으로 이름 을 떨쳤다. 영남대로는 대구천물길(현 인쇄골목)을 따라 동산파출소 일대 서문시장 가운데로 들어간 뒤, 말전골목~자갈마당~달성네거리~원대지하도~원대동으 로 이어졌다. 대구천을 따라 오토바이골목을 직진해 달성공원 동북쪽 뉴그랜드여관골 목을 통해 경부선 철길 굴다리지점을 지나 원대동에서 영남대로와 합친 길 도 있었다. 서문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서문시장을 거치지 않는 시장 서북쪽 서문로2 가의 신용보증기금 대구서지점~서성새마을금고~한일은행북성로지점~한남정 밀~달성파출소~달성네거리길은 지금도 남아있다. 대구천물길과 소로가 지나간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은 청동기시대이래 이 지방 중심세력들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으로, 고려 공양왕때에 이어 조선 선조 29년(1596년)에 다시 석축을쌓아 경상감영을 두기도 했다. 성리학자 서침(徐沈)을 배향한 구암서원(대구시 중구 동산동 229) 비석 에 의하면 세종때 성을 쌓기 위해 남산동 국가소유부지와 교환할 것을 제 안받은 서침이 환지를 사양한 대신, 당시 대구사람들이 빌려먹은 관곡의 이자를 한 섬에 5되씩 감해줄 것을 청원해 성사시켰다. 달성을 국가에 헌납한 혜택을 대구읍민이 고루 입은 것이다. 달성공원은 일본인이 신사를 건립해 참배를 강요했던 곳이기도 하다. 신사는 1966년 철거됐다. 공원에는 최재우 동상과 함께 대구출신 민족시인 이상화 시인 (1901~1943)의 시비가 남아있다.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 이 다르지 않느니/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가자 아 름답고 오랜 거게로' 상화 시인의 생가는 대구시 중구 서문로2가 11의 1에 타인소유로 남아있다. 경부선철길을 건넌 영남대로는 서구 원대동 대원아파트 정문을 지나 달 성초등학교앞에서 왼쪽으로돌아 보신탕으로 유명한 대원식당 앞길로 났다. 대원아파트 일대는 원대걸이라는 마을이 형성돼 있었고, 주민들은 주변 날 뫼못물로 농사를 지었다. 지명의 '원(院)'자는 대구북부의 관문인 원이 위치했던 데서 유래됐지만 원자리는 찾을 길이 없다. 대원식당~달서로네거리~신팔달시장~풍국면 대구 공장~금호강 팔달교에 이르는 영남대로는 2.4km정도. 풍국면 대구공장부 터는 공단이 조성되면서 취락의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길자리는 길 로 남아있다. * 취재기 7월하순 폭염의 도심길취재가 적성에 맞는 사람이 있겠는가 마는 대구시 중구 도원동 속칭 자갈마당을 취재하는 동안은 잠깐 더위를 잊었다. 습지 여서 자갈을 깔아 자갈마당이 됐다고도 하고, 창녀촌이어서 일본인이 행정 명을 도원동(桃園洞)으로 바꿨다는 말이 "복숭아 나무가 많아 그렇게 불렸 다"는 설과 함께 남아있는 곳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경부선철도건설이 한창이던 1906년쯤 건설 인부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모인 창녀들이 많았다는 것. 한때 7백명이 넘던 여인들 이 지금은 3백여명으로 줄었다. 59개업소의 포주들은 동심회라는 계를 만 들어 외압을 막고 우의를 다지고 있다. 관할 달성파출소 소장의 말이 걸작이다. "관례상 탈없이 자고가면 그만 이지만 문제를 일으키면 손님이고 업주고 윤락행위방지법을 적용할 수 밖 에 없습니다." 변성석 기자 |
< 영남대로 일천리 . 32 > 노원~장태실 삼거리 | ||
금호강, 한양 일 천리 기약없는 길에 벗과 님을 보내는 애절함이 밴 곳. 배를 타고, 때로는 나무다리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을 긴강 다리 목. 그곳에는 이제 조선시대 사람들의 사랑과 풍류를 간직한 모래펄은 사 라지고 초현대식 팔달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향토출신 조선시대 가객 서거정(1420~1488)은 대구십경(大邱十景)으로 금호강에 뜨는 배(琴湖泛舟)와 노원송객(櫓院送客)을 노래했다. 官道年年柳色靑/短亭無數接長亭/唱盡陽關谷分散/沙頭只臥雙白甁/관도(영 남대로)에는 해마다 버들빛이 푸른데/단정(짧은 거리에 있는 주막)은 수없 이 장정(먼 정자)에 잇닿아 있네/양관곡(이별할 때 부르는 노래)을 부르고 나서 각각 이별한 뒤에/모래밭에는 다만 두개의 흰술병만 남아 있다. 지금이야 공단으로 둘러싸여 볼품없이 변했지만, 수백년전 이 일대는 서 울나들이 길(영남대로) 상의 절경이라고 짐작된다. 대구읍성을 떠나 한양가는 길목인 금호나루터에 길손들이 쉬어가는 집이 있었던 노원(櫓院)은 현재 3공단 금호강 언덕, 팔달교 남쪽지역으로 나루 터 주변 버드나무와 주막이 어우러져 길손의 휴식처 겸 대구 북부의 관문 역할을 했다고 대구읍지 등 고문헌은 전한다. 고문헌과 고지도 등 각종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영.정조시대 이후 얼마 까지 영남대로는 현재 팔달교 우측 3공단 뒤에서 금호강을 건너 노곡동으 로 넘어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확한 기록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영. 정조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칠곡부(漆谷府) 고지도에도 대로를 칠곡에 서부터 시작해 금호강과 합치는 팔거천 동쪽으로 비껴가는 것으로 표기하 고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이 길은 팔거천 서쪽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한문교씨(71.대구시 북구 사수동)를 비롯한 일흔살 이상의 주민들 은 당시 교량역할을 했던 나루터와 목교(조선시대 팔달교)의 위치를 현재 팔달교 서쪽 달서천 하수종말처리장 관리사무소쯤에 위치했던 것으로 들어 왔고, 자신들의 어린시절까지 그 자리에 나루터와 목교가 있었던 것을 분 명히 기억하고 있다. 한씨는 "해방되는 해까지 목교가 남아 있었으며, 이 나무다리는 주로 겨 울철에 이용됐고 물이 불어나 여름철로 접어들면 나룻배가 그 역할을 대신 했다" 고 전했다. 강 너머 좌측 1백여m지점에 덩그렇게 서 있는 한 그루의 감나무 자리가 뱃사공의 숙식처. 해방 2년후까지만 해도 장씨 성을 가진 노인과 젊은 청 년이 뱃사공으로 일했다고 한다. 한씨는 "비가 올때면 당시 영남 제1의 시장인 서문시장에 가신 어머님을 그집 안에서 기다렸다" 며 생생하게기 억해 냈다. 이곳은 멀리 부산 동래에서 만선으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배의 정박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읍성내 사창에 보관해 둔 한양가는 쌀, 모포 등 조세를 운반하는 역할에 더 충실했을 것으로 보인다. 목교는 한 사람이 겨우 건너갈 수 있도록 가설돼 많은 양의 물품은 배로 운반했 다. 금호강을 건너서 목교 인근지역은 당시 밤숲이었다. 밤숲은 길손들의 휴 식처였고, 강을 따라 사방 수백m까지 뻗쳐 있었으며, 현재 북구 태전동 동 양자동차학원부지 일대가 이 밤숲의 중심지였다. 이 일대는 재래종 밤나무가 무성해 가을걷이때는 수백가마의 알밤을 따 냈다고 한다. 당시 밤숲 주인들의 인심 또한 후했다. 이연정씨(73.대구시 북구 태전동)는 "가을철 열리는 계모임이나 유지들 의 가을 소축제(小祝祭)인 밤사리놀이 때는 농민들이 알밤을 말떼기로 헌 납했다" 고 전했다. 밤숲은 또 씨름경기의 주경기장이었고 피서지였다. 여 름철이면 강변에서는 모래뜸질을 하는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부 녀자들은 이들을 위해 미역국을 끓여 팔기도 했다. 금호강을 건넌 영남대로는 현 금호인터체인지 못미쳐 난 경부고속도로 밑 굴다리를 통과해 현재 대구에서 왜관가는 우회길에 닿는다. 이곳이 바 로 수리봉 장태실삼거리이다. * 취재기 "서서 본다. 서울장 다리가 아파 못보고, 아가리 크다 대구장 너무 넓어 서 못보고... 이천저천 이천장 개천많아 못보고, 똥쌌다 구례장 구린내 나 서 못보고..." 조선후기 보부상들이 요즘 랩송처럼 흥얼대며 불렀던 이 노래는 단연 최 고의 인기가요였다. 대구시 북구 노원동 주막거리에서 걸죽하게 한 잔 걸 치고 상주장으로 향하는 보부상들은 이 노래의 흥을 배에 실었다. 금호강 나룻배에 몸을 싣고, 냄새나는 고린전을 뱃사공에게 뱃삯으로 한 두 푼 주면 서로 족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기장수가 뱃사공과 함께 "결 세좋다 안성유기, 도듬질좋다 김천방짜.. 장맛좋다 놋탕기, 살결좋다 놋요 강..." 아낙네의 몸매를 빗대 간드러지게 부르는 노래로 노부꾼들(늙은 보 부상)의 애간장을 녹였다한다. 금호강 너머 사공막에 살았던, 주민들에게 마지막 뱃사공으로 기억되고 있는 장씨의 한 평생도 그랬을 것이다. 오가는 보부상과 장단치며 대나무 노와 배에 평생을 의지했다. 가끔 사공막에서 노름판을 벌이는 보부상들이 불전(노름장소를 빌리는 대가로 주인에게 주던 삯)이나, 나들이에 나선 양반이 행하(行下:양반이 밑사람의 수고에 내리는 상)라도 쥐어주면 효복 (배고픔)은 면했다고 한다. 특별취재팀 |
< 영남대로 일천리 . 33 > 탈안바위~유목정 | ||
금호강을 넘어온 영남대로는 대구시 북구 팔달동 수리봉 밑으로 난 소로 를 따라 북부농수산물 시장 방향으로 향한다. 바위산 정상의 나무 한 그루 에 독수리 한 마리가 날마다 마을을 굽어보고 날아가곤 해 붙여진 수리봉, 그 밑자락이다. 팔달동 414의 6 합동연사 공장에서 방주교회~삼호이용소~동양식당까지의 길은 아직까지 콘크리트 포장길로 잘 보존되어 있다. 수리봉 밑 길은 내 를 끼고 경운기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다. 나무 숲에 가려 항상 그늘이 져 있는 이 길의 끝 지점은 북부농수산물 도매시장. 여기서 길은 시장 왼쪽 수리봉 밑에 위치한 국성기계 공장 앞에 서 농수산물 시장내 대구수산시장 오른쪽 길을 따라 동성기업사, 제일빌라, 매천초등학교를 지나 매남이용소에 이른다. 현재도 농로나 칠곡쪽 사람들 의 지름길로 이용되는 폭 3m 도로로 남아있다. 매남이용소에서 북쪽 방향 왼쪽 길로 들어서면 큰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토박이, 그것도 여든 이상의 고령이 아니면 들어보지도 못한 사연이 있는 바위다. 탈안(脫鞍) 바위. 임진왜란 당시 경상감사가 왜군의 막강한 병력을 상대 하기 힘들어 탈안바위에서 잔꾀를 부렸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사와 말 안장을 벗긴 군마를 탈안바위 위에서 쉬게 해 당시 위급한 상태에 놓인 우 리군 병력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왜군을 철수시켰다는 것. 바위 위 돌산에 올라보면 금호강이 내려다보이는 점을 생각할 때 일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탈안바위 바로 위 태전동 147 집 옆에는 차람바위가 또 있다. 2평 남짓 보잘 것 없는 바위인 차람바위에도 역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왜군을 탈 안바위에서처럼 잔꾀로 물리쳤다는 비슷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탈안바위와 차람바위의 유래와 현 위치에 대해서는 향토사학자들 사이에도 이론이 분분해 확실치가 못한 상황이다. 탈안바위를 빠져나온 영남대로는 북구 태전동 태원빌라앞에서 왜관의 국 도 4호선과 마주친다. 이곳이 가죽진. 현재는 태전교 삼거리를 두고 가죽 진(가죽징이)이라 부르고 있으나, 이 자리는 일제때 옮겨진 지명이다. 조 선시대 이 근처에 가죽나무, 특히 개가죽나무가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 다. 가죽진을 통과한 길은 대구시 북구 관음동 경진공업 공장~대구전문대 정 문앞에서 구안국도로 내려와 길을 건넌 다음, 조선시대 새주막거리였던 동 아백화점 칠곡점으로 향한다. 구안국도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 법무부 대 구소년원, 읍내중학교가 위치한 자리가 조선시대 고평역터였다. 이 역은 한때 일본인들이 거주, 칠곡의 거점도시로 활용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아시랑고개로 유명했다. 이곳에는 해방 당시까지도 객주집들이 있었는데 읍내사람들이 대구에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자주 들렀 으며,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으레 '아리랑 스리랑 아라리요' 하면서 신 세타령과 한말의 설움을 노래했다고한다. 지금은 평지나 다름없는 조금 경사진 국도이지만 일제시대 이전에는 제법 큰 고개였다는게 주민들의 말 이다. 동아백화점 칠곡점에서 칠곡목련아파트~보성아파트~대천동창대교회~현대. 산호.한양아파트 옆 인근 야산 밑을 지난 영남대로는 대구시 북구 읍내동 으로 들어선다. 이 길은 팔거천을 가로지르는 읍내교를 건너 북구 학정동 경북도 농촌진 흥원에서 북구 동호동 370 박상목씨 집 앞까지 연결된다. 이 집 우측에 있 는 우봉이씨의 재실인 도산재에서 다시 팔거천을 건너 칠곡군 동명면 봉암 리 조선시대의 유목정 마을로 들어간다. 봉암리에 사는 조장수씨(88)는 "유목정은 어릴때 까지만 해도 버드나무 가 무성했고,주막이 즐비하게 들어섰던 자리였다" 며 "현재는 개간돼 논밭 이 들어서 있다" 고 말했다. 도산재에서 팔거천을 건너면 봉암리 289 박 재형씨 집이 나온다. 이 집 근처에 군수공덕비, 송덕비 등이 많이 서 있었 으나 개간으로 모두 묻혀 버렸다. 폭 2m정도 되는 조선시대 옛 길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 길에는 아직도 관찰사 이호준, 조강하 불망비가 비닐하우스와 닭장옆에 반쯤 묻힌 채 서 있어, 이 길이 조선시대 관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칠곡중학교 내 칠곡향교 앞에 있는 하마비는 본래 이곳에 서있던 것을 옮겨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 취재기 조선시대 칠곡도호부가 자리했던 옛 칠곡면 지역(현 팔달교 넘어 대구시 북구 지역) 을 취재하면서 칠곡면의 역사가 어느새 칠곡 사람들에게서 잊 혀져 가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이제 팔달교를 넘어서면 빽빽히 들어찬 아 파트 숲만이 가득할 뿐, 칠곡도호부의 옛 역사를 짐작 할 수 있는 사적은 거의 없었다. 취재팀은 옛 칠곡면 지역의 영남대로를 취재하기 위해 우선 왜관의 칠곡 군청을 찾았으나, 지난 81년 대구시로 편입돼 버린 옛 칠곡면의 역사에 대 해서는 사료나 역사적 결과물이 거의 없었다. 칠곡군청으로서는 조선시대 칠곡도호부의 행정중심이었던 읍내동이 대구 시로 편입돼 버리자 향토사 발굴 주체로서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 대구 시 북구청을 찾았더니 북구청은 불과 16년 전까지만 해도 칠곡군 땅이라 자료 수집에 한계가 많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결국 옛 칠곡면의 역사는 주인이 없어져 버린 셈이 됐다. 대구시의 역사 도 아니고 칠곡군의 역사도 아닌, 두 지방자치단체에 '미운 오리새끼' 가 돼버린 꼴이라고나 할까. 아파트만이 옛 역사를 깔고 앉아 주인으로 남은 셈이다. 옛 칠곡면은 사라지고, 대신 조선시대 일본인들의 교역장소이자 낙동강 변 허허벌판일 뿐이었던 왜관(倭館)이 한일합방을 겪으면서 일인들에 의해 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칠곡면의 역사는 외면받고, 왜관이라는 지명은 아 직도 학교와 기관 등 각종 관공서 문에 떳떳이 붙여져 있는 현실이 왠지 서글프기만 했다. 특별취재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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