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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매일신문] [20세기의 추억] ⑩전북지역의 日帝 :: 2007/03/26 11:19
| 곳곳 탐욕·수탈 흔적…영화속 눈 익은 촬영지 | |
전북 지역은 자연환경과 생활조건에선 경상도 지역과는 좀 다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야, 낮은 구릉, 평화롭고 한가로운 농촌마을... 경북에서 지겹도록 산과 접하다 확 트인 평야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후련해진다. 전주→김제→익산→군산을 오가면서 지난 세기의 흔적들을 적잖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저 지나간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가슴 아픈 것들이 많았다. 오직 우리의 쌀을 뺏아가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시설과 건물들이었다. 그위에 일본인들은 성(城)과 같은 거대한 집을 지어놓고 호사를 누렸다. ▶곳곳에 널려있는 수탈의 흔적="10년전만 해도 군산은 한집 건너 일본집이었어요. 요즘 많이 헐렸지만 그래도 꽤 많지요." 김정삼(56.군산시 소룡동)씨는 "아직까지 일본 잔재가 남아있는 것은 도시 발전이 없기 때문"이라며 "요즘 군산은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영화의 촬영지로 인기를 끌 뿐"이라며 씁쓰레했다. 내항에서 걸어 10분 거리인 월명동, 신흥동에서 일본 가옥은 대충 헤아려도 100채가 넘을 듯 했다. 물론 원형 그대로는 남아있지 않고 개조·변형되긴 했지만 한눈에 오밀조밀한 일본식 가옥임을 알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보존상태가 완벽한 신흥동의 히로쓰 가옥이다. 예전 포목상인 히로쓰와 대한제분 사장이 살았던 집인데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 2채와 널다란 정원에 큼직한 석등이 놓여있다. 영화속에서 가끔 만날 수 있는 집인데 '장군의 아들' '타짜' 등을 찍었다. 타짜에서는 주인공인 조성우가 백윤식에게 노름을 배우러 갔다가 이 집의 자그마한 쪽문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군산은 일제가 만든 계획도시였다. 옥구군에 달린 조그마한 포구에 지나지 않던 군산이 1898년 강제 개항되면서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서 생산되던 곡물 집산지가 됐다. 내항 앞에는 예전 군산세관으로 쓰던 붉은 벽돌의 건물이 있는데 이곳의 이름은 장미(藏米)동이다. 동네이름으로 '감출 장'에 '쌀 미'라는 한자를 쓰는데서 보듯 예전 이 일대는 온통 쌀 천지였을 것이다. 현재에도 내항 부근에는 일본으로 실어가기 전에 쌀을 보관하던 낡고 큼직한 창고가 여럿 남아 있어 한때의 영화(?)를 보여준다. 옛 세관건물에서 50m쯤 내려오면 큼직한 은행건물이 보이는데 예전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다. 한때 카바레, 노래방으로 쓰이다 지금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건물이 됐다. 1차대전때 인질로 잡힌 독일인이 설계하고 1923년 중국인들이 공사를 했는데 여러 차례의 개조공사에도 불구하고 외양은 여전히 장엄했다. 쓰레기로 채워진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건물도 늙고 병든다고 하지만 이렇게 초라하게 변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교 뒤편에 가면 좀처럼 보기 힘든 건축물이 있다. 군산지역 대지주였던 시마타니가 1920년대에 지은 금고 용도의 건물이다. 3층의 콘크리트 건물로 입구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두꺼운 철제금고 문이 달려 있고 창문에는 단단한 쇠창살과 철판이 박혀있다. 시마타니가 현금, 서류는 물론이고 인근에서 마구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남을 믿지 못해, 도둑이 들까봐 다른 나라에서 빼앗은 귀중품을 별도 건물에 몇겹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보관했으니 인간의 집착과 탐욕이 과연 어느정도까지 이를 수 있을지 짐작케한다. 금고 옆에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발산리 석등(보물 234호), 고려시대 작품인 5층석탑(보물 276호), 돌석상 등 20여점의 유물이 있는데 이것도 시마타니의 수집품이다. 해방후 그가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해 보존될 수 있었다. 군산, 김제 등에 150만평이 넘는 토지를 갖고 있던 시마타니는 해방 후에도 농장을 지키려고 한국 귀화를 주장하다 좌절되자 귀국길에 올랐다고 한다.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에도 일본인들의 탐욕을 엿볼 수 있는 가옥이 한채 있다. 2층 건물로 1940년대에 지어진 큼직한 일본식 집이다. 예전 일본총리를 지낸 호소가와의 아버지 소유였는데 일본인 마름(토지관리인)이 살았던 곳이다. 500평 가까운 널찍한 대지에다 집 외관은 나무판자를 잇대놓아 마치 일본식 성곽을 보는 듯 했다. 주민 최기상(86)씨는 "이 동네엔 일본인 대지주 2명과 마름들이 살았는데 이 일대는 물론이고 익산, 김제 등에도 땅이 많았다."면서 "일본인 지주들은 한국인에게 그냥 빼앗다시피 헐값으로 땅을 사들여 대지주가 됐다."고 회고했다. 최씨의 아들인 석창(58)씨는 "일제 잔재를 과연 문화재로 보관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제가 남겨놓은 흔적을 들러보면서 아이들과 함께 한번쯤은 전북 지역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역사체험에 이만한 것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글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경북 성주 한개마을 :: 2006/08/09 14:56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성산 이씨의 집성촌경북 성주의 한개마을은 한국의 전통 마을로 성산 이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뒷산인 영취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듯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내리고 지금은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루가 있을 만큼 커다른 내가 마을 앞을 흘러 영남 최고의 길지로 일컬어진 마을이다. 공동 우물과 빨래터, 그리고 옛 정취가 풍기는 고샅이 남아 있는 전통 마을 기행. 요즘 엘니뇨 등의 영향으로 기후가 변덕을 보이고 있지만 전에는 음력으로 12월과 1월을 ‘한겨울’이라고 불렀다. 가장 추운 겨울이라는 뜻이다. 겨울해가 가장 짧은 것은 양력으로 12월 22일인 동지이지만 1월과 2월의 해가 더욱 짧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추운 날씨 때문이다. 특히 산골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산지가 많은 지형탓에 우리나라의 마을들은 대개 산으로 둘러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겨울에는 오후 5시가 채 못되어 이미 해가 산을 넘어버린다. 그리고는 곧 어스름이 찾아든다. 그러면 마을에는 인적이 끊어지고 사위가 조용해진다. 더러는 등잔불을 밝히고 책을 읽기도 하고, 따뜻한 아랫목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얘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 ||
◀ 한낮의 한개마을. 산기슭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앉은 집들의 모습이 그윽하고 정겹다. 마을도 워낙 조용하거니와 낮에는 출타한 사람들이 많아 길에서는 사람들을 별로 만나볼 수 없다.(위) 북비고택. 사도세자를 그리며 북쪽에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은거하고 살았던 집이다. 사진에 보이는 문이 바로 북비(北扉)다.(아래) 막힌 듯 열리고 닫힌 듯 이어지는 전통 마을의 고샅 경북 성주는 예로부터 ‘성주 꿀참외’라는 말이 있을 만큼 참외로 유명한 고장이다. 김천에서 대구·왜관 쪽으로 향하는 국도를 타고 가다 성주 쪽으로 꺾어져 들어가면 비닐하우스가 길게 이어진다. 바로 참외농장이다. 비닐하우스를 오가는 농부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이르면 3월 중순에서 3월말이면 참외가 나오기 때문에 지금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한개마을’은 성주읍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점,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뒤의 영취산 줄기가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며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 앞으로 큰 내(川)가 흘렀는데 지금은 물이 흐른 자리도 옮겨졌거니와 물도 예전처럼 많지 않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지형으로 예로부터 영남 최고의 길지(吉地)로 일컬어져 온 곳이다. 이곳에 약 60여 호의 전통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 가옥 중 다섯 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고, 마을 앞쪽을 중심으로 더러 새로 지은 양옥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보존이나 관리가 양호한 집들도 있는가 하면 군데군데 허물어졌거나 퇴락한 집들도 있다. 더러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도 눈에 띈다. 우리네 전통마을이 지닌 특징적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게 고샅이다. ‘샅’은 ‘사이’와 ‘틈’을 합한 말로 고샅이라고 하면 좁은 골목길을 일컫는 말이다. 대개 집과 집 사이에 쳐진 흙담이나 돌담을 사이에 두고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래서 고샅은 곧게 나 있지 않고 집이 들어선 모양새를 따라 꼬불꼬불하기 마련이다. 마을의 큰길을 중심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넓게 퍼져 있는 마을의 구석구석을 연결해 준다. 막다른 길이다 싶으면 어느새 구부러진 길이 나타나며 이어진다. 이른바 대가집들도 큰 길 옆에 있기보다는 고샅을 한참이나 따라가야 만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시골에 있는 어느 집을 찾으러 갔다가 한참이나 헤매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집은 저 멀리 보이는데 도대체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 골목인가 하고 들어가 보면 다른 집이고, 또 저 골목인가 하여 들어가 보면 그도 아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맨 끝에야 겨우 그 집을 찾아들 수 있었다. |
◀ 한개마을 입구에 선 돌 표지판과 버드나무. 예전에는 이 앞으로 내가 흐르고 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판서·유학자 등 이름난 선비 배출 한개마을에도 이런 고샅이 남아 있다. 마을 양 옆으로 큰 길이 나 있고 마을 안쪽은 좁은 골목길로 이어진다. 흙담을 끼고 길을 따라가다 보면 대문을 만나고, 다시 구부러진 길을 따라가면 또 다른 대문을 만나는, 옛 시골마을의 정취가 남아 있다. 다만 원래 있던 것은 흙길이었겠으나 지금은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되어 버린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예전 같으면 이 골목길에 아이들이 나와 구슬치기를 하거나 숨바꼭질을 하거나 땅따먹기를 하며 노는 모습을 쉬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도시로 떠나 시골에 아이들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남은 아이들에게도 시멘트로 포장되면서 놀기에는 마땅치 않은 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말 오후여서인지 아이들 몇몇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쪽 길에서는 여자 아이들이 한참을 어울려 놀다 부모님 비닐 하우스 일을 도우러 간다며 못내 아쉬운 듯 발걸음을 옮긴다. 다른쪽 골목에는 남자 아이 두 명이 양지 바른 곳에 앉아 햇살을 즐기며 대나무 활을 만들고 있다. 그래도 이런 모습이나마 볼 수 있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다. | ||
▶ 마을을 찾은 답사팀 일행이 북비고택을 둘러보고 있다.(위) 공동 우물과 빨래터. 한때는 이곳에서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물을 긷고 빨래도 하면서 오가는 정을 나누었지만 지금은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홀로 빨래터를 지키고 선 나무가 외로운 듯하다.(아래) 이 마을은 성산 이씨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의 거개가 이씨들이다. 따져 보면 다 일가친척들이 모여 사는 셈이다. 성산 이씨가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된 것은 조선 세종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때부터라고 한다. 이후로 이 마을에서는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나 한말 성리학의 이론가로 알려진 이진상(李震相) 등 이름난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 마을 위쪽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북비고택(北扉古宅)이 있다. 이 집은 조선 영조때 훈련원 주부를 지낸 이석문(李錫文)이 처음 터를 잡은 곳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고 그를 사모하여 북쪽에 사립문을 내고 평생 은거한 곳이라고 한다. 그 뒤 한성판윤과 공조판서 등을 지낸 응와선생이 사랑채와 안채 등을 지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원래 있던 북비도 그대로 남아 있다. |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당초 이곳에 큰 나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방언이다. ‘한개’라는 이름은 곧 ‘큰 개울’ 또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순 우리말이다. 지금은 낙동강 지류인 그 개울이 밭을 사이에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지만 전에는 마을 앞을 지나는 큰길이 개울이 흐르던 자리라고 한다. 마을 어른들의 얘기에 따르면 물길이 차츰 바뀌어 마을에서 먼 쪽으로 흐르게 되었고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에 의해 마을 앞으로 도로가 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루가 있으려면 물도 꽤 많은 개울이었을 성 싶은데 지금 남아 있는 개울에는 물이 별로 없다. 다만 내의 폭이 적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전에 많은 물이 흘렀을 것으로 짐작케는 한다. 마을 앞에는 한개마을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마을로 접어드는 큰길 입구 두 군데에 서 있다. 한쪽은 커다른 버드나무 아래 서 있고, 다른 쪽에는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판과 함께 서 있다. 이 버드나무는 물을 머금고 자라는 나무라는 것도 이곳에 물이 흘렀음을 보여주는 자취로 남아 있다. | ||
마을 어귀에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공동 우물과 빨래터가 남아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아낙네들이 물을 긷고 빨래를 하면서 오가는 정을 나누었을 게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집집마다 수돗물이 있고 세탁기가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이기로 생활은 편리해졌겠지만 마을 사람들의 정을 이어주던 옛 정취는 사라졌다. 이 마을 구성원이 모두 양반가로, 그래서 기와집이 대부분인 이곳에는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적지 않다. 마침 주말이어서인지 관광버스를 타고 온 한 무리의 답사팀이 마을을 찾았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드로가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올해 83세로 나이답지 않게 정정해 보이는 교리댁 이영태(李榮泰) 할아버지가 한복 두루마기를 걸쳐 입고 답사객들 앞에 나타난다. 마을 여기저기 문화재들을 안내하고, 마을의 유래며 전통 문화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다. 교리댁은 북비고택 아래 자리잡은 집으로, 이영태 할아버지의 고조부가 교리를 지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 마을의 공동 재실인 월봉정 전경.(위) 한개마을의 고샅은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되었지만 아직도 군데군데 흙길이 남아 있다.(아래) 개 한 마리가 지키는 한가로운 가게 풍경 교리댁 옆에는 하회댁(河回宅)이 있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깨끗하게 손질돼 첫눈에도 정갈한 느낌을 준다. 사랑채 대청에 우물 반자를 만든 것이나 안채 건넌방 퇴에 난간을 두르는 등 고급스러운 양식을 보여준다. 하회댁이라는 택호는 이 집의 며느리가 하회마을에서 시집을 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며느리의 가문을 따라 택호를 정하는 예는 흔치 않다. 지금도 집의 이름이 하회댁이 이곳에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86세의 나이임에도 자태가 고운 할머니는 16세에 처음 이곳에 시집을 왔으니까 70년을 이곳에서 지낸 셈이다. 하회 류(柳)씨라는 것외에 한사코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는 할머니는 사진을 찍는 것도 완곡히 사양한다. 이 집에 며느리로 들어온 후 시어른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건넌방 옆에는 일하다가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처음 시집 왔을 때 식구가 30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옛 법도에 따라 바깥 출입은 거의 하지 못하고 규중 안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할아버지는 노인회관에 나가시지만 할머니는 함께 나가지 않는다. | ||
◀ 마을에 사는 노인 한 분이 산에서 땔감을 지고 내려온다. 이 마을에는 아직 땔감을 쓰는 집들이 더러 있다. 북비댁 위로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월곡댁이 있다. 이 집은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의 집이라고 한다. 월곡댁 뒤로는 송림이 우거진 숲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마을 오른쪽으로는 마을의 공동재실인 월봉정이 있다. 이들 외에도 한주종택과 극와고택 등이 있다. 마을 위에는 신라 애증왕 때 창건했다는 감응사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을 가장 앞에는 작은 가게가 하나 있다. 시골마을의 가게가 으레 그렇듯 찾는 사람도 별로 없고 개 한 마리가 가게앞을 지키는 한가로운 풍경이다. 조그마한 가게 안에는 그대로 시골 사람들이 찾을 법한 물건은 모두 갖추고 있다. 가게 앞에는 널찍한 평상을 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잠시 발길을 멈추고 쉬었다 갈 수 있다. 4시가 조금 넘자 벌써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시골마을에는 여기저기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나이 든 할아버지 한 분이 땔감을 지고 산을 내려온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땔감을 쓰는 집이 적지 않다. 마을 앞에 펼쳐진 비닐하우스촌에서도 하루 일을 끝내려는 농군들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
문화클릭-대구문화 현안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20:51
문화클릭-대구문화 현안 |
대구가 가장 시급하게 풀어야할 문화 현안은 뭘까? 문화를 꽃피우려면 문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야 하지 않겠는가. 최근 대구시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지역 문화 현안중 대구시립미술관.방짜유기박물관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보고했다. 대구읍성복원 사업도 거론됐지만 천문학적인 예산으로 인해 보류됐다. 이들 현안 사업의 향후 전망과 공사계획 등을 살펴봤다. 편집자 가장 시급한 현안인데도, 전망은 매우 불투명한 사업이다. 반드시 있어야 할 문화인프라인데도 아직까지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 더욱이 사업시작부터 입지(수성구 삼덕동 대구대공원 부지)선정이 잘못돼 접근성 등에서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대구시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대구시는 지난해말 2003년 대구시의회 예산심의에서 미술관 부지 조사비 10억원이 전액 삭감된 아픔을 딛고, 올해 상반기중 다시한번 예산안을 제출키로 했다. 내년까지 71억원을 확보해 부지 2만1천평을 매입한 후 2005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2008년까지 완공한다는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대구시가 정부에 바라는 것은 △총공사비 777억원 중 국비 지원금 200억원의 조속한 지원 △지방교부세 형태로의 지원 등이다. 대구시의 한 관계자는 “대구시의 열악한 예산사정에 비춰 문화관광부가 2005년 공사에 들어가기전에 국비 지원금을 집행해줘야만 시립미술관을 계획대로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시립미술관은 시 외곽에 위치, 시민들의 접근성과 활용도에 큰 문제를 안고 있는데다 시립미술관 진입도로(100억~400억원 소요)를 먼저 건설해야만 공사에 들어갈 수 있는 어려운 점을 안고 있다. 더욱이 기존 계획을 전면 재검토, 시내 중심가에 미술관을 짓자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 앞으로도 미술관 건립에 적잖은 난관이 있을 것 같다. 전문 박물관 하나없는 문화 불모지 대구에 볼거리 명물로 등장할 방짜(方字)유기 박물관건립 작업이 새해 들면서 빨라지고 있다. 이미 대구시는 지난해 확보한 3억5천만원의 예산으로 박물관 설계용역 계약을 마쳤고, 28일 설계용역착수 보고회를 갖는다. 올해 안에 필요한 부지매입에 11억5천만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대구시 동구 도학동 공무원 교육원 예정지 인근에 5천여평 위에 들어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박물관 건립에는 모두 109억원이 필요하지만 대구시는 국비 28억원을 확보하면 오는 2005년까지 완공이 무난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박물관에는 중요 무형문화재 77호인 이봉주(77.납청유기 대표) 유기장이 기증한 세계 최대의 징을 비롯, 각종 유기들과 전통 악기류 및 궁중제기류.전통유기제작 공구 등 1천250점의 물품이 전시된다. 2001년8월 기증 받은 대구시는 그동안 박물관 건립이 발등의 불이었던 것. 자칫 머뭇거리다간 기증받은 물건을 되돌려 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 지난 2001년12월 박물관 부지를 결정한 뒤 우선 대구시비로 예산을 확보함에 따라 1년만인 올해부터 본격 궤도에 오르게 된 것. 대구시 문화예술과 박물관 담당자인 배남식씨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수많은 유기관련 물품들이 기증돼 대구로서는 전문박물관 건립을 통한 전국적 볼거리를 마련할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됐지만 국비확보가 문제”라고 말했다. 평북 정주 납청출신으로 현재 경기도 안산에서 유기를 제작중인 이봉주씨는 “시에서 예산을 들여 박물관을 만들어주면 앞으로도 필요한 유기관련 물품들을 계속 제공해 박물관 활성화에 도움이 되도록 할 계획”이라 약속했다. 대구시는 방짜 유기박물관이 들어서는 것을 계기로 오는 10월부터 유기 박물관 일대 4만8천여평에 박물관 6개동을 비롯한 체험학습 등 시설을 갖춘 박물관 타운을 조성할 계획이다. 도학동의 탈바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구 중구 약령시 한방 테마거리 조성구간내 지중화 공사중 옛날 대구읍성의 유적 일부가 발견돼 복원여부가 관심을 모았으나 사실상 읍성복원은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영남문화재 연구원 박승규 연구실장 등 문화재 전문가들은 대구읍성 전체 복원 대신 구 영남제일관 부근에 읍성 상징물 건립이나 읍성지도나 당시 생활모습 등을 담은 거리조성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대구시는 한방 테마거리 조성을 위해 대구 약전골목의 전력시설 지중화 공사를 벌이다 과거 대구읍성의 성벽돌로 추정되는 유물이 나오자 영남문화재연구원에 의뢰, 긴급 문화재 시굴조사를 벌였고 공사를 일단 중단됐다. 연구원은 지난해 12월 10일에 걸쳐 조사를 편 뒤 일부 구간의 전력시설 지중화를 우회토록 하고 테마거리 주차장 예정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등을 건의하고 문화재청도 지난 20일 이러한 내용을 대구시에 통보, 2월이면 중단된 공사가 재개될 예정이다. 이같은 대구읍성의 유적발굴에도 불구, 대구시내 일원을 연결했던 과거 일제시대 철거 전 모습의 대구읍성 복원은 현실적 문제가 너무 많아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대구시측은 결론짓고 있다. 대구시 문화예술과 김희석 문화재담당자는 “과거 읍성이 통과한 지점들이 이제 모두 상업지역으로 변해 편입에 따른 보상의 어려움과 상인들의 반발 및 교통난으로 복원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대신 상징물 건립 등의 대안마련이 바람직할 것”이라 말했다. 대구읍성은 조선조 선조때 처음 축성됐으나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뒤 영조(1737년)때 둘레 2.65㎞로 증개축했지만 1906년경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
| - 2003년 01월 27일 - |
매일춘추-달성공원에 가면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20:40
| 매일춘추-달성공원에 가면 |
대구시민이라면 누구나 달성공원에 동물원 구경을 간 기억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덩치 큰 꼬끼리와 재주부리는 원숭이, 갈기 달린 사자와 신기한 새들의 구경은 이내 동물원 속으로 흠뻑 빠져들게 된다. 한참 지나 돌아서 나오는 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 시비를 보았을 것이며,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옮겨 놓은 관풍루와 향토자료관도 둘러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달성공원을 다녀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동물원을 구경한 기억은 있지만, 동물원이 들어선 그 곳이 바로 옛 달구벌의 터전인 달성토성의 유적임은 미처 몰랐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달성토성은 지금으로부터 180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토성(土城)으로, 최근 초기백제의 유물들이 발굴되어 학계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서울의 풍납토성에 버금가는 유적이다. 달성토성이 지금처럼 달성공원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05년 일제의 침탈 이후 그네들의 신사(神祠)를 만들고 공원을 조성함으로써 시초가 되었으며, 이에 더하여 1970년에 동물원을 개장함으로서 유적보다는 동물원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요즈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문화유적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 문화유적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기본에는 유적으로서의 원형과 생명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달구벌의 역사가 담긴 달성토성을 신사(神祠)와 공원으로 바꾸었던 일제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다. 달성공원의 상화시비가 전해주듯이 빼앗긴 들에는 벌써 봄이 왔건만 아직 달성토성은 역사의 향기를 충분히 내뿜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달성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동물원 구경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달성토성의 유적을 통해 달구벌의 역사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달성토성과 이를 둘러싼 내당·비산동고분군의 조사와 보존정비에 새로운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박승규(영남문화재연구원 연구실장) |
| - 2004년 02월 03일 - |
잊혀진 문화유산 - 경산 임당지역 고분군 (대구매일신문) :: 2006/04/0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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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의 뿌리 달성공원(2) - 이렇게 복원하자 :: 2006/04/01 16:43
달구벌의 뿌리 달성공원(2) - 이렇게 복원하자
달구벌 역사의 뿌리가 개발과 무관심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동물원, 연못 등 공원조성으로 '달성(達城)'의 원형이 훼손되고, 빌라 신축 등 재개발을 통해 달성고분군이 마구 파헤쳐지고 있다.
대구시민들은 역사의 뿌리를 곁에 두고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지방자치단체나 학계는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거나 보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이 같은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10년이나 20년 뒤에는 고분군의 실체가, 아니 대구의 뿌리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지자체와 학계, 문화계가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이다. 가칭 '달구벌 역사유적지 조성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꾸려 장기적인 마스터 플랜을 짜야한다는 각계의 목소리가 높다.
윤용진 경북도문화재연구원장은 "고대부터 대구분지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한 세력은 비산동 내당동 평리동 일대 고분군을 근거로 한 집단"이라며 "달성고분군에 대한 보존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뿌리 찾기 -‘지명 바로잡기운동’ 다행
일제의 공원조성에서 비롯된 달성공원의 이름을 사적 제62호 '달성(達城)'으로 되찾아야 한다는 것. 달성공원은 달구벌의 정치적 통합을 이뤄낸 세력의 근거지로서 달성 또는 달성토성으로 개명해야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다. 올해 달구벌얼찾기모임(대표 이정웅)이 달성공원을 달성으로 바꿔 부르는 '지명 바로잡기 운동'에 나선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또 일제시대의 '달서고분군', 학계 일부에서 나온 '내당.비산동 고분군'이란 명칭도 달성의 축조세력 또는 달성을 근거로 활동한 지배층의 무덤에 걸맞게 '달성고분군'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원형 복원 - 동물원 이전사업 서둘러야
달성과 달성고분군의 원형을 복원하고, 정비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달성 안에는 고대 우물터(集水井), 군사훈련장, 주거지, 유물 등이 산재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달구벌 역사의 근거를 규명할 수 있는 주요 자료인 셈이다.
그러나 연못을 조성하고, 동물의 주거나 활동 공간을 마련하면서 원형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원형 복원을 위해서는 동물원 이전사업을 서둘러야 한다. 대구시는 지난 97년 달성공원 동물원을 수성구 고산동 대구대공원으로 옮긴다는 방침을 정해놓고도 예산확보 및 운영주체 선정난 등을 이유로 7년 동안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달성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서구 비산4동, 내당 2.3동 일대도 빌라 등 신축건물이 잇따라 들어서고 있으나 사전 지표조사도 벌이지 않는 등 해당 지자체가 유적지 훼손을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표조사와 발굴을 통해 사라지고 있는 달구벌 역사의 흔적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적지 조성 - 인근 부지매입 방안 마련을
달성과 달성고분군 일대를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대구시가 학계, 문화계, 시민 의견을 반영해 유적지 조성을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마련해야 한다. 학계는 △대구 문화유적 분포지도 작성 △달구벌(또는 달성)역사박물관 개설 △고분공원 조성 등 사업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지자체가 달성고분군 일대에 대한 무차별적 개발을 막고, 장기적으로 부지를 매입하는 등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
부산시가 지난 69년부터 98년까지 30년간 10차례의 조사를 통해 유적지를 발굴하고, 10년간에 걸쳐 고분군 일대 부지를 매입한 뒤 '복천박물관'과 '고분공원'을 조성한 사례는 시사하는 점이 크다. 또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박물관, 경남 함안군 도항.말산리 고분군과 함안박물관, 합천군 옥전고분군과 합천박물관 등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대구매일 2004년 03월 29일자
달구벌의 뿌리 달성공원(1) - 이름부터 바꾸자. :: 2006/04/01 16:42
달구벌의 뿌리 달성공원(1) - 이름부터 바꾸자.
▨이름부터 바꾸자
'달성공원의 이름을 바꾸어 대구의 역사를 제대로 찾자'. 대구시민 대부분은 달성공원을 코끼리와 호랑이가 사는 동물원으로 알고있다. 그러나 달성공원이 대구의 옛 성터이며 대구의 뿌리가 시작된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공원이라는 이름에 가려 달구벌의 영욕을 품에 안은 국내 最古의 성곽인 달성토성의 성터이며 대구의 뿌리라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대구의 뿌리를 찾기위해서는 대구의 시작인 달성(達城)을 놀고 즐기는 공원이라는 이름대신에 본래의 이름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있다.
▨1800년 역사…국내 最古 성곽
과연 달구벌의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신라가 경주 사로국(斯盧國)을 터전으로 고대국가를 형성했을 때 대구에는 소국이 없었을까. 대구의 뿌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답은 대구시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 일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게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영남문화재연구원 박승규 연구실장은 "달성은 달구벌의 성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보존이 잘 된 토성"이며 "남쪽 비산동, 내당동 일대는 대구의 원류를 찾을 수 있는 고분군"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달성공원이 그동안 동물원으로 더 알려진 데다 '달성고분군'이 있는 주변 일대가 재개발과 재건축 바람으로 신축 건물이 여기저기 들어선 바람에 문화유적지로 제대로 조명되지조차 못했다. 더구나 최근 마구잡이 개발로 유적지 상당부분이 훼손되면서 대구의 뿌리인 달성공원은 '유적지'란 사실은 잊혀진 채 '동물원'으로만 짙게 각인되고 있다.
▨‘달성’근거 고대 달구벌국 형성
달성 안에는 지금도 수많은 주거지와 군사훈련장 터, 우물(集水井), 고대 유물이 묻혀 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 역사의 향이 스며있는 달성은 공원으로, 동물원으로 조성되면서 그 빛을 바래고 있다.
사적지란 꼬리표가 무색할 지경이다. 달성공원, 아니 달성(達城)이 달구벌의 뿌리로 자리잡지 못한 것은 일제 탓이다. 일제가 지난 1905년 달성토성 안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는 바람에 문화유적지의 의미는 간곳이 없고 놀고 즐기는 공원의 기능이 주가 됐다.
이어 1969년 대구시가 달성공원을 개원하고, 이듬해 동물원을 만들면서 사실상 '달성' 또는 '달성토성'의 본이름을 잃고, '달성공원'이 된 셈이다.
▨유적지 대신 동물원으로만 각인
달성은 200~300년대 쌓은 삼한(진한)시대 토성이다. 대구.경북이 신라에 편입되기 전, 경산에 임당동 토성을 근거로 한 압도국이 있었고, 달성군 지역에 화원토성을 근거로 한 소국이 있었다면 대구에는 달성토성을 근거로 한 달구벌국이 있었다는 것. 1968년 경북대박물관이 달성공원 입구에서 남쪽 약 150m 지점의 바깥쪽 성벽 일부를 조사한 결과 기원전에 사용된 회흑(灰黑)색 와질(瓦質)토기와 초기 철기시대 조개더미, 나무 울타리(木柵) 등이 출토됐다.
청동기 시대 이래로 대구지역 중심집단의 생활 근거지에 쌓은 성곽이 바로 달성이다. 대구 오페라하우스 남석모 공연기획과장은 "달성 안에 곰과 호랑이 굴을 파고, 물새장 등 연못을 만들면서 토성의 원형이 크게 훼손됐다"고 말했다.
달성이 달구벌의 뿌리를 잇고, 1800년 역사의 향을 내뿜을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사학계가 나서야 할 시점이다. 달구벌 얼찾기 모임 이정웅 대표는 "달구벌의 얼을 되찾기 위해서는 우선 달성공원이란 명칭을 달성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구매일 2004년 3월 22일자
옛 영천비행장 격납고…이틀만에 파손 - 대구 매일신문 2006.03.25 :: 2006/04/01 09:35
| 옛 영천비행장 격납고…이틀만에 파손 | |
| 근대 문화재 등록예고…"땅값하락 우려 부순듯" | |
영천시 문화재관계자는 "문화재 등록 예고 이후 격납고의 활용방안과 개·보수 등의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소유주를 방문했는데, 이미 격납고가 굴삭기 등으로 파손된 뒤였다."면서 "격납고의 소유주가 문화재로 지정되면 재산권 행사와 땅값 하락을 우려, 급히 부순 것 같다."고 말했다. 영천문화원 전현욱 사무국장은 "일제말기의 전쟁태세와 전시동원 등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아픈 역사지만 역사적 가치가 높은 근대문화재인데 파손돼 안타깝다."며 "문화재 지정에 앞서 사유재산권의 보상 등 소유주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무리하게 등록 조치를 취해 귀중한 근대문화의 손실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파손된 격납고는 일제가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 전투기를 숨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시설로 영천시에는 금호읍 신월리와 봉죽리 일대에 반파된 1기를 포함 7기가 있다. 이 격납고들은 1929년 지어진 영천화산공소와 영천 구 화룡교 등과 함께 역사적의미와 구조적 특색과 양식이 뛰어나 점이 인정돼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됐다. 영천·이채수기자 cslee@msnet.co.kr | |
| - 2006년 03월 25일 - |
일제 격납고 문화재 지정놓고 '갈등' - 대구 매일신문 2006.03.16 :: 2006/04/01 09:34
| 일제 격납고 문화재 지정놓고 '갈등' | |
'아픈 역사도 역사'라는 주장과 "우리지역에서 수치스런 역사를 보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 영천지역 비행기 격납고는 2차대전 말, 일제가 공습에 대비해 비행기를 숨겨두고 임시활주로로 사용하던 곳이다. 영천지역에는 금호읍 일대에 20~30여기의 격납고가 산재했으나 현재 금호읍 신월리, 윤성 APT 맞은편의 과수원에 3기와 금호읍 봉죽리에 2기, 금호읍 해현지 못안에 반파된 격납고 1기 등 6기가 남아 있다. 70㎝ 두께의 반원형 콘크리트로 입구는 넓고 뒤의 폭은 좁히는 깔때기 형태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격납고는 소유주들이 대부분 창고나 닭사육장 등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조성 당시 시공기술이 조악하고 급조한 시설이어서 균열이 심하고, 방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안전사고에도 무방비로 노출돼있다. 반면 문화재청은 이 격납고의 보존을 위해 등록문화재로의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역사적 의미를 갖거나 구조적 특색과 양식이 50년 이상 된 근대문화재를 조사해 소유자의 이의신청이 없으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시민들은 "지난 1995년 서울의 중앙청도 수치스런 역사라며 없애면서 영천에 이런 것을 보존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격납고 부지 소유주인 이모씨는 "수년동안 격납고를 없애달라고 요구했는데, 오히려 영천시와 문화재청이 문화재 지정을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지문근 씨는 "남아 있는 격납고가 거의 없고 영천지역의 경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며 "일제강점기 때의 침략 현장을 알 수 있는 좋은 교육자료"라고 말했다. 한편 등록문화재가 돼있는 격납고는 경남 밀양시 구비행장 격납고 2기(근대문화재 206호)와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 1기(등록문화재 39호) 등이며 영천에서는 일제강점기때 만들어진 영천역 급수탑이 2003년 등록문화재 50호로 지정됐다. 영천·이채수기자 cslee@msnet.co.kr | |
| - 2006년 03월 16일 - |
대한민국! 문화재를 파괴하는 나라 - 신동아 2001년 3월호 :: 2006/03/31 23:12
| [문화재 전문위원의 현장고발] | ||
대한민국! 문화재를 파괴하는 나라 | ||
도굴범들이 한번 휘젓고 지나간 다음에 고고학자들이 뒤늦게 ‘역사적 발견’이란 식으로 언론의 각광을 받으며 발굴에 들어가는 나라,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주체가 오히려 파괴에 적극적인 이상한 나라, 유적을 복원한다며 드릴로 화감암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희한한 나라, 바로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보존 현주소다. | ||
| 주강현 <문화재전문위원 우리민속문화연구소장> | ||
캄보디아의 고대 앙코르왕국(657∼1432년)이 전성기를 누리던 12세기 초에 세워진 앙코르와트사원. 둘레 6㎞에 달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미국 CNN방송은 지난해 처참하게 잘려나가고 있는 앙코르와트사원의 실상을 방영하여 세계인의 공감을 샀다. 도굴꾼들은 기계톱을 동원하거나 원시적인 지렛대는 물론이고 크레인까지 동원하여 사원 벽면과 석상을 잘라냈다. 불상은 머리통이 잘린 채 흉물스러운 잔흔을 남기고 있다. 약탈된 문화재들은 이웃 방콕으로 넘어가서 국제시장으로 팔려나간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뜻있는 한국인들도 혀를 찼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더 나아가 6·25전쟁 기간을 통하여 이와 같은 도굴과 파괴가 한반도 전역에서 비슷한 상황으로 벌어졌음을 고려할 때 남의 일이라고 비판만 할 수 있을까. 현재 중국언론에서는 양쯔강 중류에 건설되고 있는 산샤(三峽)댐 건설 속보를 속속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양쯔강에는 불후의 명작‘이소(離騷)’의 작가인 초나라 굴원(屈原)의 옛집과 삼국지의 무대 백제성(百帝城)이 있다. 상류의 펑제(奉節)에서 하류의 이창(宜昌)에 이르는 곳곳에는 명·청조의 누각을 비롯한 수천 점의 중요 문화재가 산재한다. 유구한 양쯔강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이 남긴, 수량으로 알 수 없는 많은 양의 매장문화재가 숨겨진 곳이다. 또한 강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해온 이들의 오랜 취락과 그네들의 삶의 양식이 간직한 문화총량은 도저히 계산 불가능할 정도로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보도는 천편일률적이다. 수몰될 8만명의 이주 완료, 세계 최대규모의 댐, 280억달러의 예산, 연간발전량 850억㎾/h 등이 거론될 뿐이다. 세기적 대역사로 중국정부의 21세기 야심작임에 틀림없으나 문화재파괴는 ‘보도통제’되고 있다. ‘현대화 신화’에 몰입한 중국정부의 개발드라이브 정책에서 ‘거추장스러운’ 문화재보존 따위는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현실이다. 샨샤댐보다는 작지만 우리에게도 크고작은 댐, 저수지, 간척지, 공장부지, 항구, 도로, 아파트단지 등이 건설되었거나 앞으로도 속속 들어설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유산이 정처없이 쫓겨나거나 파손되었다. 이런 우리에게 중국의 샨샤댐으로 인한 문화재 파괴를 무조건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또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자.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원목을 ‘고급 취미’로 선호하게 되었다. 이면지를 쓰자는 구호만 들릴 뿐 종이낭비 지수도 세계적이어서 나무 소비량이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들이 남방으로 진출하여 원시림을 벌목, 일부는 들여오고 일부는 재가공하여 제3국에 수출한다. 벌목으로 인하여 숲은 줄어들고, 수천년간 숲에 의지하여 살아온 소수민족들의 문화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있다. 단순한 문화 차원이 아니라 삶의 근거지 자체가 소멸되고 있다. 이런 일은 멀리 극동시베리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이는 세계의 무형문화 파괴에 한국기업이 일조하고 있는 사례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이처럼 문화유산 보존에 관한 문제는 일국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국제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화와 산업화, 현대화 등의 담론으로 무장한 개발론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문화유산의 보존이란 담론과 대척점에서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우리의 2001년 현주소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 ||
| 의연한 전통, 멈추지 않는 도굴 행렬 | ||
오늘의 문화유산 보존을 가로막는 최대문제의 하나는 역시 절도와 도굴이다. | ||
| 부서지고, 깨지는 유적지들 | ||
문화유산 보존의 최대 논란거리는 역시 개발인가 보존인가 하는 해묵은 과제 아닐까. 지자체의 빠듯한 살림 속에서 한푼이라도 더 벌어들이겠다는 경제논리가 문화논리를 앞서면서 문화유산 분야에도 속속 문제가 터지고 있다. 신자유시장의 밀어붙이기는 문화유산에서도 예외가 없다. 몇가지 사례만 살펴보아도 개발의 진통이 무척 심함을 알 수 있다. | ||
| 드릴로 구멍뚫는 복원 작업? | ||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논란은 그치지 않는다. 익산미륵사지를 갈 때마다 느끼는 의문점의 하나는 왜 그렇게 ‘두부썰듯’ 반듯하게 돌을 잘라서 복원했는가 하는 점이다. 시간이 걸리고 돈이 들더러라도 손작업을 하여 돌을 챙겼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 ||
| 문화유산보존과 삶의 조화 | ||
서산 해미읍성을 가면 텅빈 들판 같은 성안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반면에 순천 낙안읍성을 가보면 고즈녁한 풍경 속에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다가온다. 해미읍성은 조선후기 이래로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이 된 채 문화유산으로 보존해오고 있는 반면에 낙안읍성은 일종의 ‘살아 있는 민속촌’으로 ‘활용’한다. | ||
| ‘예고된 참사’ 풍납토성 훼손 사건 | ||
문화유산보존과 삶의 조화가 문제가 된 최대의 사건은 역시 백제유적 풍납토성 발굴현장 훼손사건이 아닐까. 주민들이 굴착기로 발굴현장 1200여평 가운데 150평의 유적과 대형 수혈유구(구덩이)를 흙으로 덮고 건축자재를 쌓아 일부 파손하였다. 이들의 행위는 마침 유물정리작업을 위해 현장을 찾은 한신대 발굴단 학생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면서 중단됐다. | ||
| 유형문화만이 문화유산인가 | ||
14년 전인 1987년 여름, 지금은 시화호로 변한 화성군의 음섬과 형도 등지를 수차례 답사한 적이 있다. 그때의 답사노트는 당시의 생생한 민중생활사를 증언해준다. 지금은 사라진 음도 선착장, 시화호에 한가롭게 떠도는 돛배들… 그러한 ‘풍경과 상처’가 빛바랜 사진첩처럼 다가온다. | ||
| 고고학 중심의 문화재 편향 | ||
문화재보호법부터 따져보자. 제1장 총칙 제2조에 의하면, 문화재는 성격에 따라 1) 유형문화재 2) 무형문화재 3)기념물 4)민속자료로 구분된다. 문화재관련 법령을 보면, 유형문화와 기념물은 대체로 고고학 분야가 담당하고, 무형문화재와 민속자료는 민속학분야가 주로 취급하는 문화재로 보인다. 그만큼 민속학 분야가 다루어야 할 문화재 비중이 적지 않음을 일러준다. | ||
| 역사 불명의 지역문화 축제 | ||
2001년은 문화관광부가 정한 ‘지역문화의 해’다. 도대체 지역문화란 어떤 문화를 기반으로 설정해야 할까. | ||
| 신화는 훌륭한 문화관광 상품 | ||
둘째, 분명한 실패사례의 하나로 울산의 처용암을 꼽아본다. 문화와 환경의 절대관계를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 ||
| 유형에서 무형으로 | ||
‘뉴욕타임스’는 연초에 사라지는 캐러번(낙타 대상)을 집중 보도하였다. 푸른색 옷과 터번을 즐겨 착용하여 ‘사하라의 푸른 영주’로 불려온 사하라사막의 대상들이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특집으로 보도한 것. 낙타를 끌고 사막 이남과 알제리,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지역을 오가면서 물건은 물론이고 문화를 전파시켰던 중요한 메신저들이 사라졌다. 이제 더이상 사막을 낙타로 이동하지 않는다. 자동차가 대신할 수 있기 때문. | ||
| 50년 전 밀짚모자도 구할 수 없다 | ||
무형문화적 관점에서 새롭게 문화유산관을 정립해나가다 보면, 근대문화유산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눈에 뜨인다. | ||
| 사라져가는 근대문화유산 | ||
2001년 벽두에 덕수궁 뒤편 옛 배재학당터 고층빌딩 재개발이 논란을 빚고 있다. 국내 최초의 신교육 발상지로 고종황제가 직접 이름붙인 유서깊은 옛 배재학교 자리 3100여평에 배재학당측이 고층 주상복합건물과 업무용 빌딩 등 고밀도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승만대통령, 한글학자 주시경선생 등을 배출한 유서깊은 건물이 재단측의 경제적 이유 때문에 위기에 서 있는 것이다. | ||
| 비판받는 문화부와 문화재청 | ||
문화유산보존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문화부의 확고한 신념과 정책집행일 것이다. 문화유산보존과 관련하여 문화부에 많은 비판이 퍼부어지고 있다. | ||
| 학계부터 자성해야 | ||
그러나 무엇보다도 반성해야 할 집단은 학계다. 가령 풍납토성 문제로 학계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떠들썩하였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백제유적지를 파괴해버린 시민들의 행동은 만인의 지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고 온갖 매체에 비판적 글을 올린 학계는 스스로 투명한가부터 반성해야 한다. | ||
| 문화유산 지키는 시민들 | ||
전문인력이 투입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올바른 시민문화관에 입각한 문화유산보존운동은 앞으로 많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몇가지 사소한 사례부터 집단적 노력까지 민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례를 살펴보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본다. | ||
|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필요 | ||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문화유산의 보존에서도 이제 정부가 모든 것을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풍납토성의 예에서 보듯 국민의 사유재산 침해가 문제가 되면서 국민과 함께 문화유산을 지켜나가는 운동이 절실해진 것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시민과 민간영역이 커지면서 문화재청과 국립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관 위주의 문화유산 보호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 ||
| 빠름의 문화관에서 느림의 문화관으로 | ||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문명관은 지난 20세기 동안 서구식으로 교육받고 길들여져온 결과물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새로운 선택 없이 문화유산의 올바른 전승을 기대할 수는 없다. |















